고희동은 귀국 후 자신의 집에서


일본에서의 서양화에 대한 인기가 커진 것은 유학파에 의해서였다.
1870년대부터 유럽 각지로 유학을 떠난 첫 세대들은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서양 양식들을 골고루 배웠다.
프랑스가 유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은 구로다 세이키가 1893년 파리에서 귀국한 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의 주임교수가 되고부터였다.
토방정일土方定一이 말한 대로 “행복한 환경에서, 행복한 재능을 가지고 행복한 시대”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신장시킨 화가였다.
그는 1884~93년 프랑스에서 체류하면서 처음에는 법을 공부하다가 화가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라파엘Raphael, 콜랭Collin(1850~1917)으로부터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기초를 배웠다.
구매 개이이치로久米柱一郞(1866~1934)도 콜랭의 문화생이었으며 귀국 후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백마회는 정칙파正則派라고도 불리었다.
정칙파로 불리운 이유는 콜랭에게서 습득한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정칙적 기초기법을 백마회가 따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백화 白樺』, 『스팔』 등의 잡지를 발간하여 세잔, 반 고흐, 고갱 등의 인상주의 양식에 관한 바른 지식을 일본에 보급시켰으며 젊은 일본 서양화가들로 하여금 개성의 존중과 주체적인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회화관을 갖도록 자극했다.
일본 근대 서양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구로다가 동경미술학교에 부임하면서 이 학교는 미술정책과 교육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후 유학생 대부분이 파리로 유학을 갔고 1920년대 파리로 간 유학생의 수는 2백 명에 달했다.
따라서 일본 근대 서양화에는 파리 화파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조선에 처음 나는 서양화가의 그림’이라는 부제가 붙은 고희동의 졸업작품 <자매>는 신문지상으로밖에는 감상할 수 없지만, 그가 서양의 전형적인 인물화 양식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서양화가의 효시’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서양화의 특징을 논한 다음 “일본에는 수십 전 전부터 이 그림이 크게 유행되어 지금은 명화라는 대가도 적지 않건마는 불행히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반도에서는 한 사람도 이에 뜻을 두는 이가 없더니” 고희동이 처음으로 “구한국 궁내부 예식관의 명예직을 띠운 몸으로 뜻을 결단하고 동경에 건너가 일본의 미술계에 최고학원 되는 상야미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음을 대서특필했다.

1915년 3월에 동경미술학교 5년의 정규과정을 졸업한 고희동은 귀국 후 자신의 집에서 그림을 가르치면서 회화교육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고희동은 자신에게서 서양화를 배운 김창섭, 이제욱, 장발, 안석주 등이 서울에 고려화회를 조직하고 YMCA 회관에 방을 빌어 매주 토요일에 한 번씩 모여 기초 실기 훈련을 쌓을 때 계속 그들을 돌봐 주기도 했다.
그 때 지도에는 서울에 정착해 있던 일본인 화가 산본매애山本梅涯, 고목배수高木背水, 환야풍丸野豊도 관여했다.

고희동은 『신천지』에 기고한 ‘나와 서화협회시대’에서 술회했다.
“본국에 돌아와서 스케치 막스를 메고 교외에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모두가 엿장사니 담배장사니 하고, 어떤 친구들은 말하기를 애를 써서 돈을 들이고 객지에서 고생을 해가면서 저것은 아니 배우겠네, 점잖치 못하게 고약도 같고 닭의 똥도 같은 것을 바르는 것을 무엇이라고 배우느냐고까지 시비하듯 하는 일도 있었다.
그 때에 내가 거주하던 집에 세 칸 되는 사랑방이 있었다.
거기에 6, 7인을 모아서 목탄화를 그리게 한 일이 있었다.
와서 배우는 이 소년들은 재미를 들여서 그리지마는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그림이냐고 하며 시선 외로 돌려버린다.”

고희동은 당시 기성 중진, 대가들을 회유하여 화단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그래서 1918년 6월 19일에 결성된 것이 서화협회였다.
그가 나서서 안중식, 조석진, 오세창(1864~1953), 김규진, 정대유, 현채, 강진희, 김응원, 정학수, 강필주, 김돈희, 이도영 등 13명이 발기했다.
이들은 당시 서화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정대유는 1921년 조석진에 이어 3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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