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주의와 입체주의 그리고 초현실주의


여기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그리고 초현실주의에 관해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유학파는 물론 일본의 작가들도 이 세 가지 사조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없었고 다만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세 사조의 작품들을 눈으로 보고 스스로 이해한 데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이 이런 사조의 양식을 영향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고는 하지만 눈으로 본 것을 피상적으로 모사한 것들에 불과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말한 대로 서양의 호랑이를 일본 화가가 고양이로 그린 것을 우리나라 유학파가 부엉이로 옮겨놓은 격이었다.
고양이는 그나마 호랑이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부엉이는 고양이를 잘못 그려 생겨난 것으로 호랑이와 비교할 경우 전혀 그 영향을 지적할 수 없다.

1905년에 등장한 야수주의와 1906년에 등장한 입체주의는 20세기의 첫 혁명으로 집단이 조직적으로 폈으며,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으므로 당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고, 오늘날에도 그것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사회적 견지에서 볼 때 이 두 혁명은 현대를 특징짓는 동요, 불안, 근본적 변형의 요청 등 시대적 요구에 대한 부응이자 결과였다.
예술철학의 견지에서 말하면 이성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어 이에 대한 모반이자 20세기 초 유행했던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직관 찬양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다. 시대적 요구란 일체의 관습에 대항하며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진실을 밝히려는 욕망의 분출이며, 새로운 세기를 맞아 거기에 걸 맞는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희망적 노력이었다.

이 시기에 직관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이의 철학적 리더가 베르그송이었다.
자연과학의 위대한 새로운 가설이 이성보다는 직관에 의존해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런 점을 오늘날의 물리학자들도 동감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예술가들은 과학에 대해 두 가지 입장 중 하나를 취해 왔는데 하나는 예술에 있어서 합리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과학을 이용하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직관을 권리로 여기고 과학에 반발하는 것이었다.
야수주의 예술가들은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 반면 입체주의 예술가들은 예술을 과학으로 바꾸어놓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과학을 창조하려고 했다.
따라서 야수주의 회화에는 막연하고 애매한 요소가 있었고, 입체주의 회화에는 분석·합성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질서가 있었다.
입체주의가 더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 기욤 아폴르네르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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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누스와 영지주의 
 

플로티누스가 영지주의를 반대한 두 가지 이론은 혼에 관한 것으로 그는 혼이 태양과 달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만물을 만들었다면서 혼을 지성적인 신성의 소산으로 보았다.
혼이 물질세계를 창조할 때 지성적인 신성에 관한 기억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선했으며 우리의 감관이 사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영지주의를 반대한 것은 영지주의자들은 신성은 태양, 달, 그리고 별들과 관련이 없으며 그것들은 악의 정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람의 혼만이 오직 선할 뿐이라고 믿었다.

플로티누스는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을 신과 같은 존재들로 인식하면서 인간에 비해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은 철학이라기보다 신앙 고백과도 같았고 지식이라기보다 의견에 가까워서 신학에 더욱 더 어울린다.
그의 견해는 <티마에우스 Timaeus>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며 오리게네스가 받아들였다.
마지막 종교철학자로서플로티누스는 모든 혼은 유한하고 결국 하양하여 그것들에 걸맞는 몸둥이와 결탁하게 되는데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적 욕망에 의해서라고 했다.
그의 이론에서 박카스 종교에서 비롯된 윤회설이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을 거쳐 그에게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혼이 몸을 떠나면 반드시 다른 몸과 결탁하게 되는데 죄에 대한 댓가로 우주의 정의가 징벌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사고는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에 의한 환생과 다름 없었다.
그는 가령 네가 어미를 살해했다면 너는 죽은 후 여인으로 환생하여 아들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라는 논리인데 윤리적인 면에서 덕을 요구하며 인과응보를 말하는 불교와 같은 이치이지만 그의 윤회와 윤리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불의 혹은 윤리적인 죄 그리고 부덕이 늘 반복된다면 현재 세상에 일어나는 사악한 일들은 전생의 연장으로 악이 승리하는 게임은 연장전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정의의 원래적인 고유한 의미와는 무관하고 마치 시지프의 신화처럼 인간은 신으로부터 끊임없는 노역과 벌을 운명처럼 받는 존재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업보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우리가 지금 환생하여 살고 있는 것이라면 전생의 일들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논리적으로 가능한데 근래 신학자들은 응답하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플로티누스는 우리가 기억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티벳의 중들도 기억할 수 있다는 데 전적으로 동감할 것이다.
플로티누스는 혼은 영원한 생을 동경하므로 기억력이 희미해지는 것이라면서 친구, 아내, 자식 등에 관해서는 망각하고 오로지 지성의 실제들만을 사유하며 개성은 망각한다고 주장했다.
결론으로 그는 혼이 나우스Nous와 하나가 되고 그것은 불멸하며 나우스와 혼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신과 나우스가 또한 둘이면서 하나이니까 이 세 가지 신, 나우스, 그리고 혼은 셋이면서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을 그가 제기한 것이며, 그의 심위일체론을 기독교가 환호하며 반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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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누스의 철학 
 

플로티누스에 관해서는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포피리Porphyry가 쓴 일대기를 통해 주로 알려졌는데 포피리는 셈족Semite(특히 유대인을 말함)으로 본명이 말추스Malchus였다.
포피리에 의하면 플로티누스는 이집트에서 태어났고 젊었을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했는데 그곳은 그리스 문화가 널리 알려진 도시였다.
그는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로부터 수학했으며 39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플로티누스는 황제 고디안Gordian 3세 때 페르시아인을 탐험하는 간첩 일에 가담했는데 그는 자신의 의도는 그 일보다는 동양의 종교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황제는 어렸고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그때가 244년이었다.
그는 종교에 관한 공부를 중단하고 로마에 안주한 후 가르치는 일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황제 갈리에누스Gallienus가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49살 이전까지 플로티누스는 아무것도 쓴 게 없지만 그후 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글은 포피리에 의해 편집되었다. 포피리는 플로티누스보다는 피타고라스의 이론에 더욱 더 심취했으므로 이런 그의 경향이 신플라톤주의를 좀더 미신적으로 나타나게 만들었으며 그가 플로티누스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을 대단히 존경했으므로 그를 기술할 때는 he가 아니라 He라고 하여 플라톤이 유일한 철학자였음을 시사했고 고대 철학자들을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자들이라고 기술했는데 그들 가운데 유물론자들은 배제되었다.

플로티누스의 형이상학은 삼위일체Holy Trinity로부터 시작된다.
신The One, 정신Nous(혹은 Spirit), 혼Soul 이 세 가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각각 다른 것들이다.
가톨릭 초기 신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오리게네스Origen는 플로티누스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그와 더불어 같은 스승으로부터 철학을 수학했다.
오리게네스는 신은 가장 우수하고 다음으로 정신이 우수하며 그 다음이 혼이라면서 플로티누스의 견해를 전적으로 따랐는데 그의 이론을 기독교인들은 이단시했다.
플로티누스는 신 혹은 선Good은 존재를 초월하는 존재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것에 관해 무엇이라고 설명하려고 하면 안되고 그것을 그저 그것이라고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영원한eternal이란 개념이었다.
그는 신을 모든 것이라고 해서도 안되는 까닭으로 신은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신은 모든 것을 통해 나타나지만 아무 곳에도 없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플로티누스의 신 혹은 선에 대한 개념은 노자의 도에 대한 개념과 같다.
도The Way를 도라고 말하면 더이상 도가 아니라는 노자의 말은 플로티누스에게도 해당된다.
플로티누스는 신을 정의할 수 없는 이유는 신이 우리가 정의할 수 있는 모든 술어들 그 이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신을 선이라고 말할 때 아름다움Beauty이 포함된다.
그가 가진 신에 대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에 대한 개념과 같았는데 신은 부동유동자Unmoved Mover를 의미했고 유일하다The One는 그의 개념은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침묵 안에서 더욱 진리였으며 노자의 도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플로티누스는 삼위일체 가운데 두 번째 정신을 나우스Nous라고 했는데 그리스어 나우스를 영어로 정신Spirit 혹은 마음Mind으로 번역하지만 로고스Logos(혹은 Word), 이성Reason, 절대의지Absolute Will 등등의 의미도 있으므로 그냥 나우스라고 사용하는 것이 보다 그가 말하는 개념에 가깝다.

플로티누스를 번역한 맥케나McKenna는 나우스를 지성적 원리Intellectual Principle라고 번역했는데 말이 길어서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특히 종교와 관련해서 설명하면 썩 어울리는 말이 못된다.
그러나 정신이란 말로는 의미가 부족하므로 지성적 정신이라고 하면 좀더 적절할 줄 아는데 전지전능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신의 정신이니 오죽 수준이 높겠는가!
피타고라스, 플라톤, 플로티누스 이 세 사람에게 수학, 이데아의 세계, 그리고 감각할 수 없는 모든 사고는 신성했으며 이런 것들은 나우스의 행위이거나 거의 그런 행위에 유사한 것들로 인식했다.
플라톤의 지성적인 요소가 요한복음서의 저자에게 영향을 주어 요한은 그리스어로 복음서를 쓰면서 하나님을 로고스(말씀)라는 말로 표기했다.
유의할 사항은 그는 나우스를 반드시 혼의 상급자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인데 이 점은 기막히게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드는 부분으로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적 이론정립에 아주 유용했다.

나우스는 신의 이미지인데 신(말씀)이 발하여 생긴 것이고 신 자체가 영상Vision을 가지는데 보이는 영상이 나우스로서 플라톤이 <공화국 Republic>에서 동굴이야기로 비유한 대로 설명한다면 태양 자체이면서 태양이 발하는 빛인데 태양과 빛은 동일한 것이며, 나우스는 빛으로 신이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보는 것이라 하겠다.
그는 부분들이 없는 존재를 그 자체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보는 사람Seer과 보는 것Seen은 하나가 된다고 했는데 이런 경우 자각이란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의 나우스는 그러니까 신의 자각을 의미하며, 그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망각할 때 오히려 신의 정신을 알 수 있다고 했고, 우리가 신의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혼이 가장 신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로티누스는 "신성한 지성 자체에는 위대한 것이 함유되어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나우스를 순수하게 하면 신에게 향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하고 모든 것을 질서있도록 한 신의 정신을 알게 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신의 정신을 가지게 되면 나우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신을 또한 볼 수 있다고 그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우리가 신성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의 영상을 표현하거나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나중에는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마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환희를 염두에 두고 주장한 것 같다.

그는 "그것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힘도 없지만 나중에 혼이 빛을 가진 후 그런 영상을 가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빛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며 신이다. ... 그는 빛을 운반하면서 오고, 빛은 그의 출현을 증명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느냐? 모든 것을 잘라버릴 때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혼은 대체적으로 나우스보다 열등한 편인데 그 이유는 혼의 양면성 때문이며 혼은 나우스처럼 되기를 의도하지만 외부세계를 직면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했다.
외부세계를 직면하는 혼은 하향하는 운동을 일으키는데 하향하면서 혼은 자체의 이미지를 산출하며 그 이미지는 자연과 감관의 세계라고 했다.
스토익주의는 자연을 신과 동등하게 여겼지만 플로티누스는 자연을 신에 비해 수준이 조금 낮은 것으로 인식하면서 자연은 혼이 나우스를 바라보는 것을 망각할 때 혼이 발산하는 이미지라고 했다.
이것은 감관의 세계를 악으로 생각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같은 견해이지만 그가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따랐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감관의 세계를 아름답고 축복받은 혼들의 주거지로 보았으며 단지 지성의 세계에 비해 덜 선한 것으로 인식했을 뿐이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이 우주와 우주의 창조자를 악이라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반박하면서도 영지주의자들의 교리 몇 가지는 수용했는데 물질에 대한 그들의 하찮은 생각은 플라톤의 사고와 일치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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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두 번째 서양화가는 김관호이다

우리나라 두 번째 서양화가는 김관호이다.
그도 고희동과 마찬가지로 총독부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므로 두 사람 모두 서양화를 전폭적으로 후원한 일본 메이지 정부의 정책 수혜자였다.
김관호는 1890년 평양의 부호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서울에서 다니고, 고희동이 도일하던 1909년에 따로 동경에 건너가 처음에는 공업을 전공할 뜻으로 메이지 학원에 들어가 2년 동안 다니던 중 집안에서 공업 전공을 반대하고, 그가 달리 관심이 있던 서양화 전공은 허락하여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고희동이 졸업한 이듬해인 1916년 같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졸업 작품 <해질녘>이 졸업하던 해 관전官展으로 불린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우리나라에서 이 사실이 보도되었지만 작품은 소개되지 못했다.
『매일신보』는 독자들에게 이 점에 양해를 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전람회에 진열된 김군의 그림은 사진이 동경으로부터 도착하였으나 벌거벗은 그림인 고로 사진으로 게재하지 못함.”

김관호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문부성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문부성전람회는 1907년 일본 문부성 주최로 열렸고 1917년부터 제국미술원에서 경영했다.
이때부터 제전으로 불리었으며 1937년에는 신문전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1944년까지 이어졌다.
문전과 제전은 일본의 관전으로 전쟁 후에는 관전제도가 폐지되고 문전에 관계했던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사단법인 일본미술전람회(약칭 일전)가 열리고 있다.
<해질녘 혹은 석모>은 누드화로 두 여인의 뒷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그가 고향 평양 능라도 부근 대동강을 배경으로 물에서 미역을 감고 올라온 여인들의 모습이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크고 영예로운 전람회는 관전이었고 관전은 1940년경까지 일본 화단의 주류였다.
따라서 관전에 입선되는 것은 영예로운 일로 여겨졌으며 특선을 할 경우 정부가 작품을 매입하는 등 특혜가 주어졌다.
관전은 1907년에 시작된 문부성미술전람회로 문전으로 불리었으나 곧 문전보다는 관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문전은 1919년 주관처가 제국미술원으로 넘어가면서 제전帝展으로 명칭이 달라졌으며 1935년 개혁과 더불어 다시금 문부성 주관의 문전으로 되돌아갔고 그 때부터 초기 문전과 구별하기 위해 신문전新文展으로 불리었다.
1922년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선전鮮展은 일본이 문전을 모델로 만든 것이다.
문전은 2차 세계대전 후 재단법인인 민간단체로 이전되었으며 일전으로 불리게 되었고 매년 가을에 전람회가 열리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관전 심사위원들 대부분은 동경미술학교 교수들이었다.
그러므로 동경미술학교에서 강조하던 인상주의 양식의 작품이 주로 입선되었고 동경미술학교 재학생 작품 중 교수들이 만족해하는 작품을 출품하면 입선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해질녘>을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인상주의 양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작품이다.
김관호가 인상주의 양식을 배웠고 그런 양식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면 동경미술학교 교수들의 인상주의에 대한 이해에 큰 오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이 학교의 미술교육에 관해 알 수 없지만, 김관호의 양식은 인상주의가 출현하기 전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낭만주의 양식에 가깝다.
김관호가 이런 양식들에 관해 알고 있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해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여인의 두 누드를 캔버스에 가득 차게 그린 것만으로도 심사위원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을 만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남자와 여자의 누드가 조각과 그림으로 묘사되었지만, 동양에서는 그런 발상이 쉽게 용인되지 않던 때였다.
실내에서 그린 누드모델의 모습을 고향 풍경화에 삽입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오른편 여인의 응덩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두 다리를 붙인 채 몸의 균형을 잡는 어색함이 있지만, 서양화가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되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크게 한 발작을 내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923년에 개최된 제2회 조선미전에 누드화 <호수>를 출품했으나 이때도 신문은 그의 작품을 게재하지 않았다.
누드화는 용인하면서도 신문에 게재하는 것이 윤리적인 문제로 인식되던 때였다.

고희동이 귀국 후 10년만에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서양화에서 멀어진 것과 같이 김관호도 제2회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한 후 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그의 작품 활동 기록으로는 1917년에 『매일신보』에 소개된 <조선 처녀>와 1922년 제2회 선전에 출품한 <호수> 등이 전부이다.
<호수>는 잔잔한 호수와 바위언덕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앉은 젊은 여인의 나상을 치밀한 사실적 수법으로 그린 것이었다.
그는 정상적인 작품 활동을 스스로 저버림으로써 고희동과 마찬가지로 좌절자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고희동처럼 전통화가로 전향하지도 않았다.

서양화가 정착되기에 우리나라의 토양은 아직 개간되지 못했다.
서양화에 대한 일반인의 몰이해와 서양미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는 환경 그리고 재료 구입의 어려움이 활동을 제약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관호에 이어 세 번째로 일본에 유학한 김찬영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했지만 화가로서보다는 문필가로 활동했다.
김찬영은 1925년에 김관호와 함께 평양에 소성회화연구소塑星繪畵硏究所를 개설하고 그림에 재능과 뜻이 있는 학생들에게 서양화를 지도했으며, 동양화부도 두어 김윤보와 김도식이 전통적 묵화를 가르쳤다.
이 연구소는 1930년경까지 지속되었으며 박영선이 이곳의 연구생이었다.
서양화를 우리나라에 이식시키려고 노력한 첫 세대 화가들 모두 중도에 포기했는데, 이는 우리 문화가 서양화를 받아들일 만큼 여유가 없었던 데에 주된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들의 선구적 정신의 바탕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탐험하는 선구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회화에 대한 사상적 신념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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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창설자 플로티누스Plotinus(204~270)는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창설자 플로티누스Plotinus(204~270)는 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는 아주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부터 로마 군인들의 힘이 하늘 옾은 줄 모르고 쑥쑥 자라더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황제를 선출했으며 나중에는 황제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를 많은 권리금을 받고 팔았다.
중이 고기맛을 안 것처럼 군인들이 돈벌이에 전념했으니 자연히 국경을 지키는 일이 허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틈을 노린 독일군이 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가해왔으며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공격을 감행하면서 잃어버린 그들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고 했다.
전쟁과 흑사병이 이탈리아 인구를 삼분의 일로 줄어들게 했으며 정부는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세금을 올렸으므로 과중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달아났고 군인들은 시민들이 달아나지 않도록 감시하기에 바빴다.
이런 어지러운 시기에 위대한 철학자 플로티누스가 태어난 것이다.

플로티누스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디오클레티안Diocletian과 콘스탄티누스가 왕국을 재정비하면서 질서를 회복했는데 이런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지만 플로티투스의 글에는 시대에 관한 암울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선과 아름다움이 있는 영원한 세계를 사유했는데 아마 대단한 낙천주의자였거나 초현실주의자였던 것 같았다.
낙천주의자답게 그는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인들을 차별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잘 어울렸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가망 없다고 판단했으므로 희망이 있는 정신세계에만 머무르려고 했다.

그가 추구한 정신세계란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망한 후에야 즐길 수 있는 하늘나라였지만 그에게는 환상과도 같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반대되는 관념의 이데아 세계였다.
딘 인제Dean Inge는 플로티누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플라톤주의는 부분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발기지 않고서는 플라톤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했다.
플로티누스 안에서 플라톤은 부활을 맞았다.

플로티누스는 중세 기독교 신학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가톨릭 신학에서 중요한 인물으로 인정받고 있다.
플로티누스가 설명한 이데아 세계는 아주 아름다운데 단테Dante가 낙원을 찬양한 것에 해당한다.
플로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가장 정련된 환상으로는 순수하게 응집된 거침없는 노래가 사파이어 색들로 아롱지는 왕좌에 앉아 있는 그분 앞에서 불려진다."

사파이어 광채가 아롱지는 왕좌 앞에서 노래하는 플로티누스에게 당시 군국주의의 부패 따위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럿셀은 플로티누스에 고나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주가 반사하는 것에 의해 수반되는 기쁨과 비탄만이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산출하며, 사람은 즐거워하는 절망주의자이거나 비애스러운 희망주의자인데 플로티누스는 후자에 속한다."

비애스러운 희망주의자 플로티누스는 유물론을 배척했으며 플라톤의 이론을 아주 선명하도록 재현했고 영혼과 몸에 관한 그의 이원론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욱 더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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