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주의와 입체주의 그리고 초현실주의


여기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그리고 초현실주의에 관해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유학파는 물론 일본의 작가들도 이 세 가지 사조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없었고 다만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세 사조의 작품들을 눈으로 보고 스스로 이해한 데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이 이런 사조의 양식을 영향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고는 하지만 눈으로 본 것을 피상적으로 모사한 것들에 불과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말한 대로 서양의 호랑이를 일본 화가가 고양이로 그린 것을 우리나라 유학파가 부엉이로 옮겨놓은 격이었다.
고양이는 그나마 호랑이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부엉이는 고양이를 잘못 그려 생겨난 것으로 호랑이와 비교할 경우 전혀 그 영향을 지적할 수 없다.

1905년에 등장한 야수주의와 1906년에 등장한 입체주의는 20세기의 첫 혁명으로 집단이 조직적으로 폈으며,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으므로 당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고, 오늘날에도 그것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사회적 견지에서 볼 때 이 두 혁명은 현대를 특징짓는 동요, 불안, 근본적 변형의 요청 등 시대적 요구에 대한 부응이자 결과였다.
예술철학의 견지에서 말하면 이성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어 이에 대한 모반이자 20세기 초 유행했던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직관 찬양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다. 시대적 요구란 일체의 관습에 대항하며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진실을 밝히려는 욕망의 분출이며, 새로운 세기를 맞아 거기에 걸 맞는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희망적 노력이었다.

이 시기에 직관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이의 철학적 리더가 베르그송이었다.
자연과학의 위대한 새로운 가설이 이성보다는 직관에 의존해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런 점을 오늘날의 물리학자들도 동감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예술가들은 과학에 대해 두 가지 입장 중 하나를 취해 왔는데 하나는 예술에 있어서 합리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과학을 이용하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직관을 권리로 여기고 과학에 반발하는 것이었다.
야수주의 예술가들은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 반면 입체주의 예술가들은 예술을 과학으로 바꾸어놓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과학을 창조하려고 했다.
따라서 야수주의 회화에는 막연하고 애매한 요소가 있었고, 입체주의 회화에는 분석·합성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질서가 있었다.
입체주의가 더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 기욤 아폴르네르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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