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익주의Stoicism 
 

스토익주의Stoicism의 출발은 기원전 3세기 초 제노Zeno의 가르침으로 시작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이 일관되게 전수된 것은 아니었고, 기원후 2세기 후반 이후 스토익주의의 간판스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가르침의 경우 제노의 가르침과는 같지 않았다.
제노는 유물론자였고 그의 주요 사상은 견유학파와 헤라클리투스의 이론을 혼용한 것이었는데 그를 따른 제자들이 차츰 플라톤의 철학을 받아들이더니 유물론을 버렸으므로 유물론을 유추할 근거가 나중에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스토익주의 철학보다는 윤리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윤리와 관련이 있는 신학에 관해서 말한다.
스토익주의는 대부분 시리아 사람들이 동조했으며 나중에 로마인이 가세했다. 탄Tarn은 저서 <그리스인의 문명 Hellenistic Civilization>에서 갈데아인Chaldean이 스토익주의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으며 길버트 머레이는 "알렉산더 이후 거의 모든 집권자들 다시 말하면 모든 왕은 자신들을 스토익이라고 말했다"고 기술했다.

스토익의 창설자 제노는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사이프러스Cyprus에 있는 시티움Citium에서 태어난 페니키아인Phoenician이었고, 그의 집안은 상업에 종사했던 것 같았으며, 제노가 아테네에 온 것은 장사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공부했는데 견유학파의 가르침이 특히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는 철학적으로 절충주의를 선택할 줄 안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을 추종한 사람들은 그의 융통성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그런 행위는 아카데미에 대한 표절이라고 비난했다.
스토익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이상적인 성자로 여겼는데 재판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당당함, 탈옥하라는 친절한 권고를 물리친 점, 죽음에 임박해서도 여유있게 침착한 태도를 보여준 점, 자신을 기소한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경고한 점, 이런 것들은 바로 스토익주의가 추구한 내용들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대로 춥거나 더위에 상고나하지 않았고, 음식과 옷차림에 무관심했는데 이런 것들도 스토익주의가 추구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플라톤의 아이디어들에 관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스토익주의자들은 그가 주장한 혼이 불멸하다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기 스토익주의자들은 혼을 비물질이라고 생각했지만 초기 스토익주의자들은 헤라클리투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혼은 물질인 불로 구성되었다고 믿었다.
이런 사고는 에픽테투스Epictetus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에서도 나타났는데 그들은 불을 만물의 네 요소들 물, 먼지, 바람, 불 가운데 한 요소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즐거움은 선으로 본 사람은 에피큐러스였다
 

즐거움은 선으로 본 사람은 에피큐러스였다.
그는 말했다.
"즐거움은 축복받은 인생의 시작이고 끝이다."
"내가 만약 맛의 즐거움과 사랑의 즐거움 그리고 듣고 보는 즐거움을 상실한다면 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에피큐러스는 또 말했다.
"모든 선의 시작과 뿌리는 밥통의 즐거움이고 지혜와 문화조차 밥통과 관련이 있다."

여러분은 그렇다면 그의 철학과 향락주의Hedonism가 다를 게 무엇이며, 그는 왜 궁상맞게 영양실조에 걸려 자신의 밥통을 학대했느냐고 묻고 싶어 할 줄 안다.
그는 향락주의자들과 견해를 달리 했는데 동적Dynamic 즐거움과 정적Static 즐거움을 구분하면서 동적 즐거움은 궁극적으로 욕망한 바를 획득하므로써 이루어지는데 이런 욕망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믿었다.
배고픔이 해결되면서 배고픔에 대한 만족은 동적 즐거움이고, 배고픔을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정적 즐거움이라는 것이 그의 구분이었다.

여러분은 식당에 동적 만족을 구하러 가는 것인지 정적 만족을 구하러 가는 것인지 먼저 자문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여러분은 자신이 향락주의자인지 에피큐러스를 추종하는 사람인지를 분별할 줄 알게 된다.
여하튼 그가 주장하는 바는 사람이 음식을 먹고 싶어서 먹게 되면 안 되고 절제있게 먹어야 정적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실제적으로 즐거움을 찾았다기보다는 고통이 없기만을 바랬던 것이다.
빵과 물을 밥통의 허기진 고통을 덜려고 그는 먹었던 것 같았는데 금욕주의자가 음식을 밥통의 즐거움을 위해 먹었다고 주장한다면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고통이 부재하는 상태가 바로 즐거운 상태이며 이런 상태를 현자의 고상한 덕으로 간주했다.

에피큐러스는 제자와 친구들에게 "문화의 모든 형태로부터 달아나라"고 주문했다.
그는 성적인 충동에 의해 섹스를 하는 것은 동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이런 섹스를 금했다.
그는 말했다.
"섹스는 인간에게 결코 선하지 못하며 만약 해가 안 된다면 다행한 일이다."

에피큐러스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자녀들을 좋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를 추종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200년 후의 사람)는 열정으로부터 떠난 섹스는 해가 되지 않음을 발견했다.
열정이 없는 섹스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만 그가 경험을 통해 이런 지식을 갖게 되었을 성 싶은데 별로 대단한 발견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설령 발견이라고 하더라도 그까짓 것을 아는 데 무려 200년이 걸렸다니 금욕주의 철학의 발달은 너무 더디었다고 생각된다.

에피큐러스는 공리주의 철학자 벤탐Bentham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늘 지혜롭게 혹은 지혜롭지 않게 자신들의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믿었다.
그는 종교와 죽음이 두려움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종교가 죽인을 불행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으며, 혼은 몸과 함께 멸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근래 사람들에게 종교는 위안인데 그는 종교를 배척하면서 미신은 자연의 법칙을 방해하므로 재앙의 근원이 된다고 주장했으며 신이 사람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에피큐러스는 신은 인간을 다스리는 불필요한 노동을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대한 짐을 덜어주었다.
그는 데모크리티우스의 이론을 받아들인 유물론주의자였기 때문에 데모크리투스와 마찬가지로 원자들은 늘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최근 물리학자들에 의해 두 사람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초현실주의Surrealism


분석-입체주의에 의한 작품은 각양각색으로 나타났으며, 이탈리아 미래주의 예술가들 움베르토 보초니Umberto Boccioni(1882~1916), 카를로 카르라Carlo Carra(1881~1966), 안토니오 상데리아Antonio Sant’Elia 등은 이를 동시성과 조형적 다이나미즘으로 발전시켰다.
입체주의의 영향은 재현으로서의 형체의 가치를 일체 부정하고 예술의 가치를 순수 창조행위에 귀속시킨 것으로 이런 점에서 입체주의자들은 여러 예술 장르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초현실주의는 입체주의의 제 전제의 필연적 발전이었다.
초현실주의가 입체주의의 이론가 아폴리네르에 의해서 발견된 것은 이런 의미에서 당연했다.
초현실주의란 말은 아폴리네르가 1917년에 쓴 희극 『티레시아의 유방 Les Mammelles de Tiresias』의 부제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는 부제에서 ‘초현실극drams surrealiste’이란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다.

초현실주의는 미술, 문학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자 철학적 견해의 표현이었다.
몇몇 비평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은 초현실주의를 양차 대전 사이에 일어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정신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초현실주의의 핵심은 현실이란 논리적인 사고에 의해 이해 가능한 사건들의 질서 잡힌 체계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우연’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은 무의식에 대한 비논리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이런 통찰은 특정한 비논리적인 자동주의sutomatism 방법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동주의란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손의 움직임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회화나 드로잉 또는 저술이나 그 외 여러 작품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여러 가지 선례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8세기 영국 수채화가 알렉산더 코즌스의 ‘얼룩 드로잉’이다.
코즌스는 풍경의 형상을 암시하기 위해 종이 위에 우연히 생긴 얼룩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은 1924년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초현실주의를 정의했다.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순수한 심리적 자동주의로 이를 통해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사고의 진정한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은 이성의 통제가 없는 곳에서 그리고 모든 미학적 혹은 도덕적 선입견의 박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백과사전: 철학 용어. 초현실주의는 이제까지 소흘히 해왔던 연상 작용과 관련된 최상의 사고 작용을 믿는다.
그것은 모든 다른 정신적인 메커니즘을 없애고, 그 대신에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 그 자체를 해결방법으로 제시하려 한다.”

초현실주의는 브르통을 비롯하여 루이 아라공Louis Aragon(1897~), 폴 엘뤼아르Paul Eluard(1895~1952), 장 콕토Jean Cocteau,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등에 의해 이론으로 무장되었고 시인 브르통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져 그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원리를 비합리주의의 이론인 베르그송, 프로이트 및 실존주의로부터 끌어왔다.
브르통은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를 “구두로, 기술로, 혹은 기타 수단으로 사고의 실제 과정을 표현하려고 의도하는 순수한 심적 자동주의Automatisme”로 규정했다.
그는 “사고를 직접 받아 쓴 것dictee이므로 이성의 작용을 일체 받지 않고 심미적이거나 도덕적인 배려도 일체 떠나 있다”고 했다.
현실과 상상의 두 극을 연결시키는 밀접한 관계를 실제로 보여줌으로써 브르통이 기대한 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별을 재정의하고 너무 오랫동안 접속되어 있지 않았던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 외부적 현실세계와 내부적 현실세계, 이성세계와 광기의 세계, 인식의 고요한 세계와 사랑의 세계, 생활의 세계와 혁명의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 어떤 고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벤투리는 이를 구상 미술 최후의 위기로 보고 자신 속에서 일체의 인습에 대항할 적극적인 이유를 찾아내는 것은 총괄적인 혁명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비평은 더 이상 재현에 관한 비평이 아니라면서 예술의 가치가, 재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인 표시된 사물을 뛰어넘어 살아 있는 표징sign의 존속성을 보증하는 능동적인 원리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대신 비평은 물상이 파괴된 후에도 오래 존속되는 표징의 이런 존속성의 인식, 즉 그 표징의 영원한 활동성과 현재성의 인식에서야말로 존재하게 된다고 했다.

브르통은 순수 이론적·논쟁적 논술로부터 예술작품의 직접성이라든가 내적·혁명적 힘 가운데서 예술작품의 타당성을 확인하는 것에 전념하는 비평문을 썼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데 키리코De Chirico(1888~1973)의 작품은 진정 초현실주의적이었으며, 샤갈의 기여가 평가받지 못한 사실은 시와 조형미술의 융합의 실현을 지향하는 제 운동 다다주의와 초현실주의에서의 중대한 과실이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에 관해 말했다.
“초현실주의의 본질적인 발견은 미리 생각해 둔 의도가 없이 펜이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연필이 자동적으로 묘사하면서 극히 귀중한 본체substance를 조직해 낸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 본체 모두가 정곡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최소한 시인이나 화가가 자신의 감동에서 도출한 광휘를 발산하는 듯하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자가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정신물리학적 영역 전체에 도달하려고 애썼을 때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이 심층이 모순의 부재, 억압에 의한 감정 전도의 유동성, 영겁성 및 쾌락의 원리에 의해서만 다스려지는 심리적 현실의 외적 현실로의 치환 등에 의해 지배된다고 했다.
자동주의는 이 영역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가 이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한 방법은 현혹될 정도로 정확하게 꿈의 이미지를 기록하는 것으로 이는 그들에게 약점이지만, 그것은 경험을 확신하는 데는 훨씬 덜 확실한 방법이며 함정투성이다.
따라서 브르통은 이브 탕기Yves Tanguy의 작품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달리의 작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는 탕기의 작품에서는 시적 원리를 간파하려고 했지만 달리의 표현 기법이 메소니에Meissonier로 돌아간 것을 후퇴로 보면서 그의 양식을 아카데믹으로 간주하면서 부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에피큐러스 학파 
 
그리스 철학에 관해 언급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두 학파는 스토익 학파와 에피큐러스 학파Epicureans이다.
스토익 학파의 창설자는 제노Zeno이고 에피큐러스 학파의 창설자는 에피큐러스Epicurus인데 두 사람 모두 같은 시기에 태어났고 아테네에 거주했으며 수년의 간격을 두고 각각 자신의 학교를 설립했다.
스토익 학파는 오래 존속했고 기원후 180년에 사망한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스토익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에피큐러스 학파를 먼저 살펴본 후 스토익에 관해 알아보기로 한다.

에피큐러스에 관해서는 기원후 3세기에 활동했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Diogenes Laertius가 전한 바가 있는데 그가 전한 내용이란 것이 스토익 학파 사람들이 상대 학파의 지도자 에피큐러스를 비방하기 위해 퍼뜨린 유언비어였으므로 라에르티우스가 유언비어를 알리려고 기록으로 남겼는지, 아니면 자신도 유언비어에 동조했으므로 그런 내용을 남기려고 했는지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다.

전해오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된다.
에피큐러스의 어머니는 야바이꾼 여자 예언자였고, "그들은(스토익) 말하기를 에피큐러스는 어머니와 함께 가가호호 다니면서 속죄하는 기도문을 읽었으며 비참한 수도사에게 지급되는 돈을 얻으려고 아버지가 기초 과목을 가르칠 수 있도록 그를 도왔다."

베일리Bailey는 저서 <그리스의 유물론자들과 에피큐러스 The Greek Atomists and Epicurus>에서 "만약 그와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에피큐러스는 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다니면서 어머니가 주문을 외는 것을 보고 미신을 증오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미신에 대한 증오는 현저하게 그의 가르침에 나타나 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길버트 머레이는 저서 <다섯 단계 Five Stages>에서 에피큐러스는 어머니를 유난히 사랑했다고 기술했는데 그렇다면 베일리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게 된다.

에피큐러스에 관해 분명하게 알려진 것은 그의 아버지는 피타고라스의 고향 사모스Samos 섬에 살던 가난한 그리스 해외 이주민이었고, 에피큐러스는 기원전 342~1년에 태어났는데 태어난 곳은 사모스였는지 애티카Attica였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자신이 14살 때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했으며, 18살 때 아테네에 갔다고 했는데 그때 기원전 322년에는 알렉산도 대왕이 사망한 후라서 아테네는 사모스를 식민지화할 때였다.
그의 가족은 소아시아에 난민이 되었으며 그는 그곳으로 가서 가족을 재회했다.
타오스Taos에서 그는 최초의 유물론자로 알려진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추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나우시파네스Nausiphanes로부터 철학을 수학했으며 기원전 311년에 자신의 학파를 결성했고 기원전 307년부터 타계한 270~01년까지 아테네에서 거주했다.

에피큐러스는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정원을 갖고 있었는데 정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그의 세 형제는 개교 이래 그의 제자였고, 학교는 번성했으며, 노예와 매춘부들도 제자가 되기를 바랬다.
매춘부들이 모인 것을 빌미로 그를 시기한 적들은 그에 관한 나쁜 소문을 만들어 퍼뜨렸다.
그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가난했으며 그들은 주로 빵과 물로 생활하면서 스스로 만족해 했다.
학교는 기부금에 의존해 운영되었는데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에피큐러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치즈를 보내주면 향연을 베풀 때 사용하려고 하오."

그가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네 자신과 네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거룩한 육신을 위해 기부를 하게."

에피큐러스는 평생 병에 시달렸는데 형연을 열 때나 겨우 치즈를 먹을 정도였으니 짐작컨대 병의 원인이 영양실조였던 것 같았다.
그가 거룩한 육신을 빵과 물로만 접대한 방법은 썩 훌륭한 방법은 못되었다.
그는 사람은 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은 스토익 학파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타계하기 며칠 전 환자의 몸으로 편지를 썼는데 자신은 행복하다고 주장했으며 제자들에게 자녀들을 잘 돌보라고 일렀다.
제자들은 그의 교리를 신경Creed처럼 배워야 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들에 보태거나 뺄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콜라주 기법을 충분히 이용하던 피카소는


1912년경 피카소와 브라크는 콜라주collage와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s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콜라주는 풀로 붙인다는 뜻이며 파피에 콜레는 종이를 풀로 붙여 장식적이 되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 기법은 1913년 브라크가 이비뇽의 한 상점에서 본 나뭇결무늬의 벽지 조각을 정물화 속에 붙여 최초로 사용했다.
존 골딩은 브라크의 <기타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Guitar>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작품에 사용된 파피에 콜레 조각들은 세 가지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평면적으로 채색된 회화적 형태이다. 둘째, 회화 속에서 색채나 질감의 유사성을 통해, 또는 실마리나 암시를 덧붙여 어떤 대상을 묘사하거나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종이조각 그 자체로 존재하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다른 입체주의 콜라주와 연결된다. 다시 말해 그림 속에 통합되고 견고하고 촉각적인 외계 물질로 인식되며 물질적 현존성이 강조된다.”

피카소는 즉시 이 기법을 채택했으며 현대 미술의 여러 진보적 화파들도 이를 사용했다.

콜라주와 파피에 콜레 기법은 브라크와 피카소 그림의 기본이 되는 현실주의를 강조함과 동시에 회화 기법에서 유래한 환영적 요소나 감각적 매력을 극단적으로 배제하려는 것이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콜라주 기법은 이를 계승한 일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활용되었으며 거기에서 제기된 새로운 미학적 문제와 가능성은 그 후 몇 년 동안 계속 탐구되었다.
파피에 콜레는 장식적 목적이 아닌 구성상의 본질적 요소로서 사용되었다.
그 사용법은 현실주의적인 것으로, 그것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화면 속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평면으로 존재했다.

피카소와 같은 나라 화가 후앙 그리스Juan Jose Vittoriano Gonzalez Gris(1887~1927)는 피카소와 브라크보다도 계통적·논리적 입체주의에 몰두했다.
그는 화면의 분석·이동의 기법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좀 더 합리적으로 설계한 기본 계획에 따라 구축해 나갔다.
종합적 입체주의로 알려진 입체주의의 두 번째 단계는 거의 그리스에 의존하고 있다.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의 그리스는 하나의 대상이 갖는 다양한 시각적 인상을 모두 일정한 기하적 면의 도형으로 환원시켜 결합했다.
그러나 종합적 입체주의 단계에서는 그리려는 대상을 나타내는 어떤 상징을 이용하여 그것을 재창조했다.
이런 상징은 이전의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험의 세부 사항이 그대로 그림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화가의 시각적 기억 속에서 결합·융해되어 실제 보이는 사물과는 다른 변형된 상태로 표현된다.
결국 그림은 자연과 평행을 이루며 그 상징적 요소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의 작품에는 왜곡의 요소가 없다.
그의 그림 형태는 실제 사물의 형태와 유사하지만 결코 그것을 베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콜라주 기법을 충분히 이용하던 피카소는 1913년 고부조적인 구성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의 회화와 밀접하게 결합되었으며 입체주의 회화의 삼차원 단계로 불리운다.
이런 시도는 앙리 로랑스Henri Laurens(1885~1954)와 자크 립시츠Jacques Lipcjtz(1891~1973)에게 이어졌으며 또 많은 입체주의 조각의 기초가 되었다.
뒤샹 비용Pierre-Maurice-Raymond Duchamp-Villon(1876~1918), 알렉산더 아키펭코Alexander Archipenko(1887~1964) 등이 입체주의와 관련된 조각을 제작했고 브랑쿠시도 어느 한도 내에서는 이에 포함된다.

한편 야수주의 예술가들과 입체주의 예술가들이 서로 대립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폴리네르는 1906~08년의 야수주의 작품이 입체주의의 서막을 장식한 것으로 보는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예술가들 모두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감각주의를 밀어내려고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더 진실 되고 심원하게 실재에 다가간다는 자신들의 뜻을 선언하면서 자연의 외관으로부터 생긴 감정의 의존하기를 거부했다.
이런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 문명에 대한 거부와 역사상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깊은 불신이었다.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는 『미술 비평사 History of Art Criticism』에서 폴 고갱의 타히티 체류와 랭보Rimbaud의 아프리카 탐험으로 예증된 선례를 따라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예술가들은 비역사적인 문명으로 회귀함으로써 역사를 회피하려고 했으며, 그 결과 시각적 표현에 있어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모두 저통 투시법과 조소적 형체를 거부하고 대신 색면으로 이루어지는 회화, 즉 색채가 지닌 절대적인 가치와 표현의 직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기술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