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Filius, Son 
 
하나님의 아들(filius dei, 마태복음 27:54)은 삼위 가운데 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을 표시하는 것으로 양agnus(lamb)이 대표적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기 전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인의 장자를 모조리 죽이고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그냥 지나간 일을 기념하는 것이 말 그대로 지나갔다고 해서 '유월절Pass Over'이라고 한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어린 양에 비유했다.
예수는 유월절 전날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고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셨다.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이란 이런 의미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의 모습은 여러 가지이다.
단순히 양 한 마리로 상징할 때는 '하나님의 어린 양', '구약의 희생', '유월절에 희생으로 바치는 어린 양'의 뜻이다.
'예수의 부활' 혹은 '승리자 예수'는 양과 깃발로 상징한다.
양과 함께 한 깃발에는 십자가 문양이 있어야 한다.
성자의 의미를 강조할 때는 XP가 적힌 깃발을 사용한다.
깃발에 PAX(평화)라고 적힌 것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평화'를 표시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누가복음 24:36) 하고 말씀하신 데서 유래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일곱 봉인deal이 있는 책 위에 양을 올려서 상징한다.(요한계시록 5:22, 로마서 2:16)
양의 머리에 후광(둥그런 빛)을 두르고 세 줄기의 빛을 뻗쳐서 성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성인에게도 후광(nimbus halo)을 사용하는데 성부, 성자, 성신의 신성divinity을 상징할 때는 세 개의 가지가 있는 후광을 사용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심'은 양 심장의 피가 잔calix으로 흐름을 표시해서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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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주의Futurism

미래주의는 이탈리아인의 정신과 지성의 침체를 타파하고 W. W. 마틴이 『미래주의 미술과 이론 1909~1915 Futurist Art and Theory 1909~1915』에서 말한 대로 “정치적인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웠던 19세기 중반 이래로 이탈리아 국민들이 끈기 있게 기다려 온 문화적 부흥”을 일으키려는 일련의 시도에서 절정을 이룬 것이다.
이처럼 미래주의는 기존의 확립된 체제에 대한 공격과 이탈리아를 유럽 문화 발전의 주류 속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독창적인 개혁안을 추구했다.
미래주의는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다른 혁신적인 운동과 어느 정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들과 달랐다.
또한 미래주의는 전적으로 시각예술과 관련된 것이 아니며 진정한 미학적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미래주의는 처음에 문학 개혁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회화, 조각, 건축, 연극, 음악,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 분야까지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미래주의는 그 호전적인 민족주의 및 과도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유럽 미술에서 중요한 진보적인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미래주의 운동의 선동자이며 지도자였던 인물은 시인이자 선전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 이탈리아인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1876~1944)이다.
그의 첫 번째 미래주의 선언은 1909년 2월 20일 파리의 일간지 『르 피가로 Le Figaro』에 실렸으며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퍼졌다. 격렬한 무정부주의적 어조의 이 선언문은 매우 선동적인 언조로 새로운 문학 및 사회 운동의 탄생을 알렸으며, 젊은이들에게 미래주의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호소했다.
폭력과 투쟁이 만연한 이 선언문의 전반적인 어조 “아름다움은 오직 투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그 영향은 단절되지만 보초니와 젊은 미래주의자들은 니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래주의자들의 운동과 변화에 대한 열정은 베르그송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이탈리아의 진보적인 지식인층에서는 베르그송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이 선언문은 문화와 정치에서의 전통적인 사회적 가치와의 단절, “교수, 고고학자, 관광 안내자, 골동품 상인과 같은 이탈리아의 부패한 암적인 종양”으로부터 이탈리아의 해방을 요구했다.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젊은이들에게 마리네티가 속도 및 기계 기술로 상징화했던 현대의 역동성에 몰두하기를 요구했다.

움베르토 보초니Umberto Boccioni(1882~1916),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1871~1958), 카를로 카르라Carlo Carra(1881~1966),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1885~1947),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1883~1966)가 서명한 화가들의 첫 번째 선언문은 1910년 2월 11일에 쓰여진 것으로 3월 8일 토리노에 있는 키아렐라 극장에서 보초니에 의해 낭독되었다.
특히 이탈리아 젊은 화가들에게 초점을 둔 이 선언문은 “무모하고 심지어 파괴적이기까지 한” 독창성 자체를 높이 샀으며, 젊은 예술가들에게 “모든 형태의 모방을 경멸할 것”을 권고했다.
이 선언문은 화가들에게 “동시대의 삶 속의 구체적인 기적”에서 영감을 찾아낼 것을 촉구하면서 마리네티 선언문의 일반론을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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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Pater, Father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마태복음 6:9~10)
성부를 '눈'으로 상징한다.
눈은 '하나님 아버지' 또는 '전지하신 분'(히브리서 4:13)을 상징하며 여기에 삼각형이나 원형을 함께 사용하며 T자형 십자가 위에 눈을 달기도 한다.
하나님을 창조주(창세기 1:26~27) 혹은 전능하신 분(시편 34:6)으로 상징할 때는 '손'을 사용한다.
손은 위에서 아래로 손끝이 향하며 손목 윗부분은 대부분의 경우 구름으로 처리한다.
구름은 '하나님의 현존'을 뜻한다.
독립적인 위persona를 표시할 때 외에는 손끝의 방향이 반대인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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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리히터는 말했다

“다다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예술 운동이 아니었다.
이것은 전쟁이 갑자기 여러 국가들로 번진 것처럼 예술계에 몰아친 폭풍우라 할 수 있다.
다다는 구름 낀 하늘에서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으며, 지나간 뒤에는 다다에서 분출된 에너지가 새로운 형태, 새로운 소재, 새로운 사상, 새로운 방향, 새로운 사람들을 낳았다.
다다는 바로 새로운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다다 운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상적이고 불가사의하며 비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1947년 알프레드 바의 기획으로 뉴욕 모마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환상적 미술, 다다, 초현실주의’전은 다다주의를 ‘환상적 미술’의 역사적 문맥에서 20세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다루었다.
1922년경 다다주의가 붕괴되자 초현실주의가 그 뒤를 이었으며 다다주의를 주도한 많은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끌어냈다.
대중에게 충격을 주고 도발하는 것을 통해 주목을 끌고자 하는 다다의 바램이 미래주의의 선언문에서 예견되었던 것처럼, 다다 운동 속에 내재한 초현실주의적 속성도 키리코의 환각적인 그림에서 이미 나타났다.
다다가 남긴 또 다른 긍정적인 결과는 반예술 개념이다.
이 개념은 20세기 내내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생명력이야말로 다다가 단순히 전통적인 예술 개념을 희화, 패러디, 조롱하며 거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통 미술의 전당이었던 화랑, 뮤지엄 등을 대신할 새로운 무엇을 창출하였다는 증거이다.
다다의 이런 면은 미국에서는 주로 마르셀 뒤샹에 의해 예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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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암 양,

프란츠 클라인Franz Klein(1910~62)은 폴록보다 2살이 많고 드 쿠닝보다는 6살이 어렸는데 드 쿠닝과는 단짝이었지요.
그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성격이 매우 온화했습니다.
그는 1950년 뉴욕의 이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뉴욕 화단에 정식으로 데뷔했습니다.
주량의 대단해서 폴록과 밤늦도록 술을 마실 정도였답니다.

클라인은 1910년 펜실바니아 주의 윌크스-바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독일 함부르크 툴신이고 어머니는 콘발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1917년에 타계한 지 3년만에 어머니는 재혼했습니다.

클라인은 운동을 아주 좋아했으므로 1929년 바시티Varsity 미식축구 팀의 주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1931~5년까지 보스턴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1937년 파리로 갔다가 다시 런던으로 가서 헤덜리Heatherley 미술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런던에서 클라인은 엘리자베스 빈센트 파슨즈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새들러Sadler의 웰즈 발레단Wells Ballet에 속했던 무용수였습니다. 웰즈 발레단은 나중에 로열 발레단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1938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뉴욕 주 버펄로Buffalo에 있는 백화점에서 디자이너로 잠시 근무한 적이 있지요.

이듬해 뉴욕으로 와서 클라인은 더러 작품을 발표하고 했는데 그가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자를 검정색으로 굵게 드로잉한 후 무료해서 돋보기를 갖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살펴보다가 확대기 속에서 아주 인상적인 느낌을 발견했답니다.
그때부터 그는 더이상 오브제를 재현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추상화에 전념하기 시작했지요.

1952년 그의 그림이 휘트니 뮤지엄이 발향하는 연감에 수록되었고 1955년에는 모마MoMA에서 열린 '열두 명의 미국 화가와 조각가들' 전시회에 초대받았습니다.
모마에서는 1952년에 이미 그의 작품을 구입했으며 휘트니 뮤지엄은 1955년에 그의 대표작 <마호닝 Mahoning>을 구입했습니다.

미리암양이 도판을 올린 대로 클라인의 그림들은 추상인 동시에 실존주의적입니다.
바로 코 앞에서 보고 싶다고 했는데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물감의 실존을 가까이서 바라볼 때 그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리암양이 올린 드 쿠닝의 작품 몇 점이 클라인의 것들과 유사한 데가 있지 않아요?
가까이서 바라본 듯한 구성의 추상 말입니다.
그것들은 드 쿠닝이 클라인의 영향을 받아서 그린 것들입니다.

클라인은 자신의 그림을 '시추에이션 Situation"이라고 말하곤 했답니다.
캔버스에 막 색을 칠하게 되면 시추에이션이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그는 또 그림을 그릴 때 마음을 백지화한다고 했는데 이는 마치 동양의 선zen 사상을 가진 예술가와도 같은 태도였습니다.
그에게 그림은 그려지는 과정에서의 느낌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는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최종적인 그림에는 화가의 감정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클라인은 시사풍자를 창조한 오노레 도미에를 좋아했고 렘브란트와 고야의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1950년부터 그는 싸구려 상업용 페인트와 붓을 사용해 단숨에 그리는 듯한 붓질의 행위를 보여주었다.
과감히 단순화한 이미지와 색들을 검정색과 흰색으로 제한하여 그린 그의 그림들은 마치 동양의 붓글씨를 확대한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흰 캔버스에 검정색으로 어떤 부호 같은 것을 그린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검정색을 사용하듯이 흰색을 사용하며 그만큼 흰색은 내게 중요하다."

클라인은 단숨에 그림을 그리면서 육체적 행위의 에너지와 붓의 운동을 나타냈으며 행위와 자세의 아이디어를 조직으로 완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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