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주의Futurism

미래주의는 이탈리아인의 정신과 지성의 침체를 타파하고 W. W. 마틴이 『미래주의 미술과 이론 1909~1915 Futurist Art and Theory 1909~1915』에서 말한 대로 “정치적인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웠던 19세기 중반 이래로 이탈리아 국민들이 끈기 있게 기다려 온 문화적 부흥”을 일으키려는 일련의 시도에서 절정을 이룬 것이다.
이처럼 미래주의는 기존의 확립된 체제에 대한 공격과 이탈리아를 유럽 문화 발전의 주류 속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독창적인 개혁안을 추구했다.
미래주의는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다른 혁신적인 운동과 어느 정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들과 달랐다.
또한 미래주의는 전적으로 시각예술과 관련된 것이 아니며 진정한 미학적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미래주의는 처음에 문학 개혁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회화, 조각, 건축, 연극, 음악,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 분야까지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미래주의는 그 호전적인 민족주의 및 과도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유럽 미술에서 중요한 진보적인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미래주의 운동의 선동자이며 지도자였던 인물은 시인이자 선전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 이탈리아인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1876~1944)이다.
그의 첫 번째 미래주의 선언은 1909년 2월 20일 파리의 일간지 『르 피가로 Le Figaro』에 실렸으며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퍼졌다. 격렬한 무정부주의적 어조의 이 선언문은 매우 선동적인 언조로 새로운 문학 및 사회 운동의 탄생을 알렸으며, 젊은이들에게 미래주의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호소했다.
폭력과 투쟁이 만연한 이 선언문의 전반적인 어조 “아름다움은 오직 투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그 영향은 단절되지만 보초니와 젊은 미래주의자들은 니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래주의자들의 운동과 변화에 대한 열정은 베르그송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이탈리아의 진보적인 지식인층에서는 베르그송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이 선언문은 문화와 정치에서의 전통적인 사회적 가치와의 단절, “교수, 고고학자, 관광 안내자, 골동품 상인과 같은 이탈리아의 부패한 암적인 종양”으로부터 이탈리아의 해방을 요구했다.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젊은이들에게 마리네티가 속도 및 기계 기술로 상징화했던 현대의 역동성에 몰두하기를 요구했다.

움베르토 보초니Umberto Boccioni(1882~1916),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1871~1958), 카를로 카르라Carlo Carra(1881~1966),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1885~1947),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1883~1966)가 서명한 화가들의 첫 번째 선언문은 1910년 2월 11일에 쓰여진 것으로 3월 8일 토리노에 있는 키아렐라 극장에서 보초니에 의해 낭독되었다.
특히 이탈리아 젊은 화가들에게 초점을 둔 이 선언문은 “무모하고 심지어 파괴적이기까지 한” 독창성 자체를 높이 샀으며, 젊은 예술가들에게 “모든 형태의 모방을 경멸할 것”을 권고했다.
이 선언문은 화가들에게 “동시대의 삶 속의 구체적인 기적”에서 영감을 찾아낼 것을 촉구하면서 마리네티 선언문의 일반론을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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