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조각의 도입
서양 양식에 의한 근대조각이 일본을 통해 조선에 유입되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미 훌륭한 조각품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제작된 불상조각과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각종 석조각들은 우리가 자랑해야 할 빼어난 조각품들이다.
조요한은 『예술철학』에서 우리의 불상조각들이 현실을 중시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또 형식을 귀중히 여기는 점에 있어 고대 그리스인과 고대 한국인의 이상이 같았음을 지적했다.
조요한은 그리스인의 이상과 같은 점을 기술했다.
“신라인은 영혼과 육체의 일치를 생각하여 일종의 정신공동체인 ‘약자若者두레’의 원장으로 미모의 여성을 택해 원화源花라 했고, 후에 남성 단장을 택함에 있어서도 육체미를 갖춘 자를 화랑花郞이라고 했다.
이것은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전체미의 관념에 의한 것이다.
신라인의 육체미 존중의 예는 ‘도화랑’이나 ‘수로부인’, 그리고 ‘처용랑’의 설화에서 읽을 수 있고, 또 ‘모죽지랑가’나 ‘찬기파랑가’ 등의 향가에서 신라인의 영육일체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전통 조각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감동을 갖고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조선의 미를 발견하는 노력은 불행하게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9년에 『석굴암 조각에 대하여』를 쓰면서 석굴암의 조성 경위와 관련 설화 등을 『삼국유사』, 『신라국 동토함산 화엄종 불국사』, 『계창기 繼訟記』 등의 문헌자료를 통해 상세히 추적했으며 제작자 김대성의 재능과 사상, 가람의 배치와 구조, 조각상들에 나타난 양식적 특성과 연원, 도상적 의미 등에 관해 치밀하게 연구했다.
조선에 대한 불교의 영향을 파악한 그에게 조선의 불상조각들은 살아 있는 종교의 의미를 지니며 종교와 예술의 일체였다.
그는 말했다.
“불교사찰이란 참으로 당우堂于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여야만 한다.
여기서 종교와 예술을 나눌 수는 없다.
미와 진을 둘로 셀 수는 없다.
여기서 사람은 깨끗해지고 소생되어 일체의 샘인 ‘하나一’로 돌아가는 것이다.”
야나기는 8세기 중엽에 제작된 높이 3.26미터의 석굴암 본존불이 지닌 아름다움의 원천을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침묵과 순간”,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정려의 찰나”, “모두를 품은 무의 경지”, “마음의 국토”, “깨끗한 정토” 등의 말로 찬탄했다.
그는 석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고 이를 동양 전체의 조각과 연결시켜 “무의 진리야말로 동양의 색채에서 선명하다”고 결론지었다.
석굴암 석가여래의 좌상은 떡 벌어진 위엄을 느끼게 하는 어깨, 곰도 멀찌감치 서서 원망하다가 웃고 간다는 자비로운 얼굴, 법의가 얇게 신체에 밀착하여 육체의 기복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자태 등은 당대 굽타 양식의 인도 조각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인도 조각은 그리스 조각을 간접적으로 영향 받았다.
조요한은 그리스 조각이 수억만 리 떨어진 신라 조각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두 민족의 인간상에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했다.
한국 불상의 최대 걸작은 미륵반가상이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백제인이,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신라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반가사유상은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상반신이 나체로 되어 있고 세 줄의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오른쪽 다리를 도사려 왼쪽 무릎에 얹고 오른쪽 손끝을 살며시 뺨에 붙이고 가벼운 미소를 띤 이 조각품에 대해 고유섭은 『한국 미술문화사논총』에서 “이 세완細腕과 동체同體가 완곡히 연접되는 흉견부에서 조선적인 미각을 느낀다”고 했으며, 김용준은 『조선 미술대요』에서 기술했다.
“이 불상을 볼 때 누가 이것을 조각이라고 하겠는가, 따뜻한 정과 여원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더구나 상반신의 간소한 표현에서 시작하여 하체의 옷주름은 소박한 복잡성을 나타내고, 다시 아담한 왼편 발끝으로는 발가락과 꽃잎들이 요란하게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