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순간 

<창세기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요셉은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 울며 입을 맞추었다.
요셉은 시의에게 향 재료를 사용하여 아버지의 시신을 썩지 않도록 만들게 했다.
시신을 썩지 않게 만드는 데는 40일이나 걸렸다.
이집트 사람들은 야곱을 생각하며 70일 동안 곡을 했다고 한다.

곡하는 기간이 지난 후 요셉은 바로의 궁전에 전갈을 보냈다. (50: 4-5)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컨대 바로의 귀에 고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그러자 바로가 말했다. (50:6)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비를 장사하라”

바로의 허가가 내려지자 요셉은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으로 갔다.
바로의 모든 신하와 궁전에 있는 장로들과 이집트 전국에 널려 있는 모든 장로들과 요셉 온 집안사람들과 형제들이 요셉과 함께 가나안으로 갔으며 오로지 형제들에게 딸린 아이들과 양과 소들만을 고센 땅에 남겨 두었다.

요셉을 모시고 가는 병거와 기병 행렬의 길이가 대단히 길었다.
그들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아닷(Atad)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 크게 호곡하며 성대하고 장중하게 장례식을 올렸다.
특히 요셉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7일 동안 곡했다.
그 지방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그들이 곡하는 것을 보고는 “이집트인들이 중대한 상사를 당했나보다”라고 생각하여 그곳을 아벨미스라임(Abelmizraim)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행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모셔다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으로부터 사서 묘지로 삼은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안장했다.
요셉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형제와 모든 호상군들과 함께 이집트로 다시 돌아왔다.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걱정했기에 요셉에게 가서 빌었다. (50:16-17)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요셉은 형들의 말을 듣고 울었다.
형들도 따라 울며 요셉 앞에 조아렸다. (50:18-21)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내가 하나님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 싶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요셉은 오히려 형들을 위로했다. 요셉의 말을 듣자 형들의 가슴은 감격에 겨워 터지는 듯했다.

요셉이 형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돌보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요셉의 나이가 110세가 되었다.
그는 에브라임의 후손 삼 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이 낳은 아들들도 자기 무릎에 받아 아들 항렬에 포함시켰다.
죽음을 앞둔 요셉이 일가사람들에게 유언했다. (50:24-25)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요셉이 죽자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썩지 않게 만들어 관에 넣고 이집트에서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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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은 그림에서 사람을 흰색과 검정색으로 구별해 

 
플라톤은 이집트 미술은 만년 동안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원전 3천 년과 기원전 500년 사이에 제작된 이집트인의 미술을 보면 플라톤의 말이 실감난다.
기원전 3200년경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이집트인이 청동으로 제작한 연장을 들고 있다.
일찌감치 철기시대에 진입했음을 말해준다.
구약성서를 보면 히브루인들은 이웃나라 이집트에 가서 농기구를 만들어 왔는데
이집트에는 대장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은 그림에서 사람을 흰색과 검정색으로 구별해 싸우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이웃나라와의 싸움을 그렇게 묘사한 것으로 이집트 북쪽과 남쪽의 왕국은 싸웠다.
결국 북왕국이 남왕국을 차지했다.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된 평편한 데 릴리프처럼 요철로 장식한 것들 중 왕 나르메르Marmer가 새겨진 것을 보고 남왕국을 점령한 나르메르의 자랑스러운 승리에 대한 기록인줄 알 것 같다.
중국 회화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인은 왕을 보통사람보다 더 크게 그렸다.

이집트인이 묘사한 왕관을 보면 왕마다 다른 형상의 것을 쓰고 있음을 본다.
판에 새겨진 서술적 내용은 오늘날 만화같은 형식으로 나르메르는 패배한 적의 머리를 쥐고 미늘창mace으로 내려치려는 자세이다.
그림 상단 오른편에 매falcon가 그려져 있는데 매는 호루스Horus로서 북왕국 신의 상징하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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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문화

아테네가 위대하게 된 것은 두 차례의 페르시아와의 전쟁 (B.C. 490년과 B.C. 480-479년) 때부터이다.
그 전에는 이오니아와 마그나 그레키아(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의 그리스 여러
도시)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태어났던 것이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로부터 마라톤에서 아테네가 거둔 승리 (BC. 490)와, 그의 아들인 후계자 크세르크세스에 대하여 아테네 영도 하의 그리스 연합함대가 거둔 승리 (B.C.480)는, 아테네에 특전을 주었다.
여러 섬에 살고 있던 이오니아인들과, 소아시아의 본토 각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이오니아인들이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자유를 얻게 된 것도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에서 추방된 후의 일이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 스파르타는 단지 자기 영토만을 위하느라 아무 구실도 하지 못하였으므로 페르시아에 대한 동맹에서 아테네가 주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동맹의 규정에 의하면 가맹국들은 정해진 수대로 선박을 내든지 아니면 이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가맹국들이 후자를 택하였으므로 아테네가 자연히 가맹국들 사이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 동맹은 점차 아테네 제국으로 변모되어 갔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현명한 영도 아래 부강하게 되어 번영을 누렸다.
그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선거를 통하여 B.C. 430년에 실각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아테네를 통치하였다.
페리클레스 시대는 아테네 역사상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시대였다.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 전쟁에 출정했던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이다.
그의 비극 중의 하나인 "페르시아인"은 호머의 작품에서 주제를 택해 온 그리스 비극의 전통을 처음으로 버리고 크세르크세스의 패배를 다루고 있다.
그의 뒤를 소포클레스가 따르고 소포클레스의 뒤를 유리피데스가 따랐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와 유리피데스는 페리클레스가 실각하여 죽은 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어두운 시대까지 생존하였으며 유리피데스는 이 후기의 회의주의를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내고 있다.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조잡하고 편협한 상식적인
입장에서 모든 주의를 비웃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제우스의 존재를 부인하고, 신성하지 못하고 사이비 과학적인 신비 종교를 퍼뜨리는 사람이라 하며 비난하고 있다.

아테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함락되었을 때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의 신전들이 불타버렸으므로 페리클레스는 이를 재건하기에 힘썼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폐허는 페리클레스 때에 건축된 "파르테논"과 그밖의 신전들이다.
조각가 피디아스는 국가에 고용되어 신들과 여신들의 거대한 조각들을 제작하였다.
아테네는 이 시기의 말기에 헬라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였다.

역사학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났으나 아테네에서 거주하면서 아테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아테네인의 입장에서 서술하였던 것이다.
페리클케스 시대에 아테네가 이룩한 업적은 역사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아테네는 그리스의 여러 다른 도시들보다 뒤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예술이나 문학에 있어서 아테네는 위대한 사람을 전혀 배출하지 못하였다.
(다만 솔론이 있을 뿐이며, 그도 본래는 입법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승리와 부와 재건의 필요성에 자극을 받아 건축가나 조각가, 또는 극작가들(이들은 모두 오늘에 이르기까지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은 오늘에 와서도 지배적인 걸작들을 내게 되었다.
당시에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아테네는 B.C.430넌경에 인구가 가장 많았으며, 약 23만명(노예까지 포함하여)으로 추산되고 주변의 영토인 시골 아티카에는 더욱 적은 인구가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인구를 가지고 그처럼 뛰어난 업적을 낳긴 예는 전무후무한 것이다.
아테네 철학에 있어서 두 사람의 위대한 인물을 남겼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그들이다.
플라톤은 얼마 뒤에 등장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의 청년 시대와 초기 장년 시기
를 페리클레스의 통치하에서 보내었다.
아테네인들은 철학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도시에서 온 스승들의 가르침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으며 변론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은 소피스트들을 찾아다녔다.
"프로타고라스"편에 보면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외래인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제자들에 대하여 흥미있는 풍자를 하고 있다.

페리클레스는 우리가 나중에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아낙사고라스를 데려 왔다.
소크라테스는 그에게서 창조에 있어서의 정신의 우위에 대하여 배웠다고 말하였다.
플라톤의 대화편 대부분이 페리클레스 시대에 소크라테스에게 일어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에는 부호들의 생활에 대하여 한결같은 묘사를 하고 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귀족 가문에 속하며 전쟁과 민주주의가 상류계급의 부와 안전을 깨뜨리기 이전의 전통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청년 시절에 일할 필요가 없었으며 한가한 시간을 거의 과학과 수학 및 철학
을 공부하는 데 소비하였다.
그는 호머를 거의 다 암송하고 호머 낭독자들의 특기를 비판할 줄 알았다.
연역적인 추리법이 발견되어 지식의 모든 분야에 걸쳐 참되기도 하고 혹은 그릇
되기도 한 새로운 학설들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에 몇 사람에게 있어서 지식과 행복이 병행할 수 있었고, 지성을 통하여 행복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황금시대를 이루게 된 힘의 균형은 안정된 것이 못되어 안팎으로 위협을 당하였다.
즉 안으로는 민주주의에 의해 위협을 받고 밖으로는 스파르타의 위협을 받았
다.

페리클레스 이후의 일들을 이해하려면 아티카의 초기 역사를 간단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아티카는 초창기에 자급자족을 하는 곳으로 농사를 짓는 지역이었다.
수도 아테네도 별로 크지 못하였으나 점차로 기술차와 숙련된 제작자들이 늘어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상품을 외국에까지 판매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차츰 곡식보다 포도나 올리브를 재배하고 곡식은 흑해 연안 등지에서 수입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재배에는 곡식을 기르는 것보다도 많은 자본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작은 농가들은 빚에 쪼들리게 되었다.
아티카는 다른 모든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호머의 시대에는
군주 정체였으나 왕은 별로 실권을 갖지 못하여 종교적인 한 관원에 지나지 않게 되고 정부는 귀족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귀족들은 시골 농부들과 도시의 기술자들을 모두 억압하였다.

이 양자사이에는 일찍이 B.C 6세기에 솔론에의해 민주주의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의 업적 중에서 많은 것이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아들들의 참주 시대를 통하여 남아 있었다.
이 세기가 끝날 무렵에 참주의 적대자인 귀족들은 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하고 나설수 있었다.
민주주의 적인 과정은 페리클레스가 몰락할 때까지 마치 19세기 영국에서와 같이, 귀족계급에게 권력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 와서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은 정권에 더욱 큰 몫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그에 제국주의적인 정책은--이 정책과 아테네의 경제적인 번영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 차츰 스파르타와의 갈등을 증진시켜 드디어 펠로폰테소스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B.C. 431~404)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

아테네의 우위는 정치적인 붕괴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존속되었다.
철학의 중심은 거의 천 년 동안이나 아테네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수학과 과학에서 아테네를 능가하였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하여금 철학에 있어서는 단연 으뜸이 되게 하였다.
아카데미는 플라톤이 이곳에서 가르친 후로 다른 어느 학파보다도 오래 남아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2세기 동안이나 이교의 섬으로서 존속되었다.
드디어 A.D. 529년에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종교적으로 완고하였기 때문에 이를 폐쇄하였으며, 유럽에는 암흑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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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제3왕국 통치자 
 
이집트의 제3왕국 통치자 조세르Zoser 시대에 재상을 지낸 헤시라Hesy-ra의 무덤을 보면 피라미드가 건립되기 전 시대의 무덤으로 땅 위로 각이지게 만들었는데 맨위가 옥상같다.
마스타바스Mastabas로 불리우는 이런 형태의 무덤은 피라미드에 비해 규모가 작고 왕의 친족들이 이런 규모의 무덤에 묻혔다.
헤시라의 무덤에서 나무를 깍은 조각품과 여타의 유적들이 발굴되었는데 이런 것들이 무덤 임자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준다.

루브르에는 높이가 1m 남짓되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여종을 묘사한 조각이 나무로 깍여져 채색되어 있는데 기원전 2천 년과 18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주인을 따라 저승길을 동행하면서 주인이 목마르지 않도록 물을 이고 간다.
속살이 비치도록 스미즈차림의 여종은 청아해 보이는 처녀의 모습이며 그녀는 왼손으로 물동이를 붙들고 오른손에는 주인이 드실 소다리를 들고 있다.
처녀의 매끈한 몸매와 옷에 새겨진 장식무늬는 오늘날 멋 부리는 여자들이 입어도 어울릴 만한 것으로 형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데 이 조각을 화랑에 가져다놓는다면 아무도 4천 전 이집트인이 제작한 것으로 믿지 않을 것이다.

피라미드의 규모와 건축적 양식의 면에서 좀더 진전된 것은 제4왕국 때 와서였으며 기자Giza에는 뾰족한 기하적 삼각형의 무덤이 3개 나란히 있다.
이것들은 기원전 2470년, 2500년, 그리고 2530년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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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선 굿맨에 의하면 표상예술뿐만 아니라


과거 철학자들이 예술의 기능을 특수한 인식적 경험 혹은 심미적 감동으로 설명했지만 이는 특수한 감동이 아니라 지적 감동으로 과학적 활동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근래의 주장이 있다.
이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넬선 굿맨Nelson Goodman으로 그는 『예술의 언어 Languages of Art』(1957)에서 예술의 기능이 본질적으로 표상적表象的이라면서 기능과 질에 있어 과학과 다를 바 없고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목적이 진리를 밝히는 데 있다면 예술의 목적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밝히는 데 있으며, 과학적 언어의 의미가 그 언어가 가리키는 지칭 대상에서 찾아진다면 언어로서의 예술작품의 의미도 그 작품이 지칭하는 대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굿맨에 의하면 표상예술뿐만 아니라 추상화를 비롯한 모든 비표상적 예술작품도 일종의 상징, 즉 언어로서의 “지칭적 기능을 하고 있으며 세계제작의 도구”이다.
굿맨은 『예술의 언어』에 적었다.
“소설, 시, 회화, 음악, 무용 그리고 그 밖의 예술은 대체로 메타포와 같은 비술어적 수단에 의해, 예시exemplification 혹은 표현expression과 같은 비지시적 방법에 의해, 그리고 종종 그림, 소리, 몸짓, 혹은 그 밖의 미분자적 체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 발견, 창조, 그리고 이해의 초석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지식의 확장 양상으로서 예술은 과학 못지않게 진지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과학과 예술은 거의 같은 식으로 탐구되고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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