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기자Giza에 있는 피라미드 
 
이집트 기자Giza에 있는 피라미드 옆에는 높이 65 피드의 스핑크스가 버티고 있다.
풍상에 많이 깍인 모습의 이 스핑크스 얼굴은 피라미드에 묻힌 왕 세프렌Chefren(기원전 2500년)의 모습으로 알려져다.
조세르 이후 200년 동안 지속된 제4왕국이 이런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한 것이다.
이후에도 피라미드는 건립되었지만 그 규모가 점차 작아졌다.
세프렌의 무덤에서 발굴된 높이 66인치의 세프렌을 묘사한 조각을 보면 이집트인의 장인적 기술이 빼어났음을 알 수 있으며 단단한 섬록암diorite을 깍은 기술을 알본다.
왕의 머리 뒤에는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호루스(매)가 날개를 편 모습으로 있다.
조각가는 왕의 모습을 비례적으로 고르게 했으며 앞모습과 옆모습을 사실주의에 입각해서 입체감이 나도록 정교하게 제작했다.

세 개의 피라미드 중 가장 작은 피라미드의 임자 미세리누스Mycerinus는 세프렌의 뒤를 이는 왕(기원전 2470년)으로 그의 무덤에서 발굴된 그와 왕후가 나란히 서 있는 조각을 보면 얼굴은 실재처럼 묘사되었지만 몸은 비례적으로 커서 초인처럼 이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높이 54.5인치의 이 조각은 두 사람이 왼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지만 조각가는 운동을 묘사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조각가는 두 사람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왕후가 오른손으로 왕의 허리를 감싸는 유연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귀족들의 무덤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조각들이 발굴되었고 루브르에 있는 한쌍의 부부를 제작한 조각을 보더라도 부부는 선 채 사진기사가 촬영을 마칠 때가지 긴장한 모습으로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아마 그 부부는 실제로 조각가 앞에서 그런 포를 취하고 오래 서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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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의 중앙집권 통치는 
 

파라오의 중앙집권 통치는 제6왕국이 멸망하면서 붕괴되었다.
이후 정치적 혼란은 7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제12왕국이 다할 무렵 쇠약해진 이집트를 북쪽에서 내려온 힉소스Hyksos가 점령했다.
힉소스가 이집트를 치려면 지역적으로 중간에 놓인 팔레스타인을 거치게 되고 해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몰고 이집트로 진격했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유대인의 이집트 종살이 430년은 이대의 이야기이다.

힉소스에 의해 이집트로 갔다가 힉소스의 세력이 약화되고 이집트가 다시 강성하게 되자 그곳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힉소스가 어떤 종족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이집트를 기원전 1570년까지 150년 동안 통치했다.
힉소스가 물러간 뒤 새 왕국이 건설되었는데 그때 성서가 말하는 모세의 이집트 탈출이 일어난다.
이를 출애굽이라 하며 애굽은 이집트를 말한다.

이집트에는 다시금 예술이 활기를 띠게 되었고 그들이 가진 원래의 웅대한 건축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기원전 1480년에 건립된 왕후 핫셉수트Hatshepsut의 장례 성전Funerary Temple을 보면 돌절벽을 뒤로 하고 그들이 거대한 규모로 건축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성전은 아문Amun과 몇몇 신들을 위해 건립된 것이다.
신을 섬기는 자들은 세 단계로 건축한 넓은 광장을 단계적으로 지나 돌절벽 가까이 있는 거룩한 성전에 도달하게 된다.
성전은 자연과 건물이 한데 어울리는 우수한 미학의 구현이었으며 피라미드와 더불어 웅장함을 시위하며 당시의 종교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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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정교해진 이집트인의 사실주의

 
이집트 왕국은 기원전 1천 년경부터 쇠퇴해지기 시작했으며 무당들이 판을 치는 나라로 전락했다.
나중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통치를 받아 샤마니즘마저 성행했다.
반면 이집트인의 사실주의는 더욱 더 정교해졌다.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의 집권이 끝날 무렵의 라모세Ramose의 무덤에서 발굴된 마이Mai와 그의 아내 우렐Urel을 석회암으로 조각한 것을 보면 머리와 장식품이 매우 정교하게 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원전 1375년에 제작된 것으로 테베스Thebes에 있는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돌을 쪼아서 구체적인 선을 나타낸 부부의 모습은 마치 종이 위에 유연한 선으로 드로잉한 만화처럼 보인다.
이집트인의 사실주의 기교는 15년 후인 기원전 1360년 그들이 제작한 아멘호텝 4세의 흉상에서도 발견되며 석회암을 깍아서 제작한 높이 3.125인치의 아주 작은 흉상은 공간에 드로잉한 것처럼 정교하다.

같은 해 그들이 제작한 왕후 노프레테테Queen Nofretete의 흉상은 유명하며 석회암으로 높이 19인치의 왕후의 모습은 미인을 상징한다.
아멘호텝 4세의 뒤를 이어 왕에 즉위한 투탄카멘Tutankhamen은 18세에 요절했는데 금으로 된 그의 관에 새겨진 그의 모습은 이집트 예술가들의 사실주의의 극치였다.
이것은 기원전 1340년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 약73인치이며 금에 이나멜을 칠한 것이다.
금을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 관을 장식한 조각으로 금의 무게만도 250파운드나 되며 반짝이는 금과 풍부한 색채가 이집트인의 고도한 기술과 미학을 뽐내기에 충분하다.

금을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 예술품의 재료로 사용한 방법은 우리나라 통일신라 시대에도 가능했다.
통일신라 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GNP가 가장 높았던 때로 사람들은 흰옷을 입었고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워올랐다.
금박에 글을 쓸 정도로 물자가 풍부했던 때였다.
페루의 인카Inka 유적에서도 금을 얇게 사용한 예술품들이 발견되지만 이런 방법을 일찍이 이집트인이 사용한 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집트인의 사실주의 회화와 조각의 기교는 그리스를 포함해 중동의 여느 나라뿐 아니라 로마인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므로 서양미술에서의 이집트의 영향은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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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500년과 3000년 사이 
 

기원전 3500년과 3000년 사이 이집트에서 파라오들의 왕국이 강성할 때
이라크 조상의 나라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도 고상한 문명이 발흥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란 말은 '강들 가운데 땅'이란 뜻으로 여기서 말하는 강은 물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말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두 강 사이의 반달처럼 생긴 땅에서 시작되었으며 두 강은 나일 강에 비해 폭이 넓어 좀더 의젓해 보인다.
두 강의 길이는 나일 강과 마찬가지로 700마일로서 반달처럼 생긴 강 사이의 땅은 농사를 짓기에 안성맞춤이다.
나일 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두 기다란 물침대는 장마때는 수위를 높여 농부들을 골탕먹이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 풍년이 들어 잘먹고 잘살게 해주었다.

기원전 2500년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곡식농사가 현재 캐나다에사 가장 풍년이었을 때의 밀농사와 비교할 만했다.
먹고도 남을 곡식이 있고 강에서 물고기를 먹고 남을 정도로 잡았을 테니 그들에게 고상한 문화가 있었던 건 매우 당연해보인다.

한량들의 게으르고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문화의 씨를 뿌리는 법이다.
TV 수상기에 가서 켜는 것도 게을러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리못컨틀롤러를 고안해내는 법이다.
게으른 사람들이 있어야 문명의 이기들이 생산된다.
배가 터지도록 먹을 게 있어야 사람들은 환상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 환상은 문화의 씨앗이 된다.
게으른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에는 많이 있었고 그들이 우수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문화적으로 가장 두드러졌던 수메르Sumer는 메소포타미아 남쪽 페르시아만 강가에 위치했던 나라로 영토의 길이가 100마일가량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코카서스 백인들Caucasians로서 이웃 남서쪽에 살던 셈족Semitic(특히 히브루족)과 티그리스 강 건너 북쪽에 거주하던 이람족Elamites과는 달랐다.
메소포타미아 남쪽에 살던 사람들을 학자들은 수메르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기원전 4천 년 전부터, 그러니까 이집트인이 왕국을 건설할 때부터, 페르시아Persia로부터 그곳으로 이주해 왔으며 나중에는 다른 종족과 섞였다.
수메르는 기원전 4천 년경 청동시대를 맞았으며 메소포타미아 남쪽에는 돌이 귀했으므로 수메르인은 진흙을 물에 개어 말려서 벽돌을 사용하여 집을 지었다.
그들이 흙벽을 사용해 건물을 지었으므로 이집트와는 달리 거의 현존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건물의 기초만 폐허로 남아 있을 뿐이다.
요즘 CNN TV에서 유적지를 종종 보여주는데 기초의 폐허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놀라운 건축기술이 있었다.
그들은 벽돌을 쌓아 성전을 건립하면서 천장을 하늘에 닿을 듯 매우 높게 지었으며 그런 성전들 중 하나가 미술사책에 으례 등장하는 지구라트Ziggurat이다.
이 지구라트는 기원전 2500년에 건립된 것으로 이를 구약시대 사람들은 바벨탑the Tower of Babel이라고 불렀다.
구약성서에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세 단계로 높은 층을 이루며 하늘로 솟은 지구라트는 현재 터전만 남아 있으며 위로 솟은 상층 두 단계는 없어졌지만 황룡사의 터전으로 황룡사의 높이와 크기를 측정할 수 있듯이 남아 있는 터전을 근거로 당시의 성전의 규모를 어림하면 얼마나 크고 웅대했었는지 알 수 있다.
지구라트는 그리스인이 믿었던 신들의 거주지 올림푸스 산Mount Olympus과 비교할 만하다.

수메르인의 문자는 보통 원시인들의 문자와는 달랐다.
그들에게는 동물과 식물의 종자를 구별하는 사형문자가 있었으며 이런 부호들은 뜻이 변하지 않아 뜻글자로 발전했다.
그들에게는 문자가 넉넉했는데 예를 들어 여인과 여인의 외음부를 표기하는 말이 따로 있었으며 외음부는 여인을 상징하기도 했다.
발을 그린 상형문자는 몇가지 뜻을 함축했는데 '선다', '간다', 그리고 '운반한다'는 뜻이었다.
발로 서고 가고 물건을 운반한 데서 생긴 여러 가지의 뜻이다.

수메르인은 두 개의 단어를 한데 묶어 새로운 뜻의 단어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알았다.
예를 들면 여인과 산이라는 두 단어를 합성시켜 여인산이라는 말을 만들었으며 여인산은 여자 노예를 의미했다.
이런 문자는 그들이 주변에 있는 산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다 노예로 부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에게는 동의이어들도 있었는데 물고기를 하ha로 표기하면서 하를 또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들의 언어 일부가 오늘날에도 현존하는데 알코올alcohol이 그중 하나이다.
왕의 비문에 문자가 쓰여지기 시작한 건 기원전 2700년경이었으며 가장 오래된 성문법은 수메르인의 수도 우르Ur를 통치한 왕 우르-남무Ur-Nammu가 기원전 2100년경에 선포한 법전이다.

우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대인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이다.
그가 이런 문명이 발달한 도시를 떠나 하란을 거쳐 황무지 가나안으로 간 것은 아마도 세력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가족을 데리고 600마일을 걸어서 팔레스타인으로 갔는데 원래 문명의 도시출신이라서 하란에서 장사로 돈을 제법 벌어 많은 종들을 데리고 신천지를 개척할 수 있었다.
유대인과 아랍인들의 불화가 오늘날에도 매우 심각한데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은 같은 족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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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인의 도시국가에는 
 

수메르인의 도시국가에는 각 도시를 상징하고 보호하는 신들이 따로 있었다.
재미난 사실은 두 도시국가가 싸워서 한 국가가 승리하면 그 국가의 신이 진 국가의 신보다 우월한 지위를 얻게 된다.
신들의 등급은 이렇게 정해졌다.
당시 왕들은 신들과 동격이었으므로 왕은 신들과 마찬가지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통치했다.
구약성서에 언급되는 바벨탑, 즉 지구라트는 현재 터전만 남아 있는데 이보다 먼저 기원전 3000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믿어지는 우룩Uruk(이를 성서에는 Erech로 표기하고 있다)의 도시 와르카Warka에 남아 있는 건물들은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처음 건축하기 이전에 건축한 것들로 수메르인의 건축술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우룩에는 긴 담이 있는데 벽의 두께가 18피드에 길이가 6마일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립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들이 가파른 길을 내고 계단을 만들어 성전에 오를 수 있도록 건축한 건물의 높이는 40피드로 벽돌들이 하얗게 변색되어 사람들은 이를 '하얀 성전 White Temple'이라 부른다.
성전에 오르면 신을 상징하는 조각이 있으며 신전에서 수메르인들은 동물을 불에 태워 굶주린 신의 밥통을 채워주었다.
유대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물을 피를 뺀 후 불에 태워 야훼의 배를 채웠다.
원시종교에서는 신의 밥통을 채워주는 것으로 신에게 아양 내지는 재롱을 떨었다.
'하얀 성전'은 하늘을 상징하는 신 아누Anu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학자들은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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