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정교해진 이집트인의 사실주의

 
이집트 왕국은 기원전 1천 년경부터 쇠퇴해지기 시작했으며 무당들이 판을 치는 나라로 전락했다.
나중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통치를 받아 샤마니즘마저 성행했다.
반면 이집트인의 사실주의는 더욱 더 정교해졌다.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의 집권이 끝날 무렵의 라모세Ramose의 무덤에서 발굴된 마이Mai와 그의 아내 우렐Urel을 석회암으로 조각한 것을 보면 머리와 장식품이 매우 정교하게 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원전 1375년에 제작된 것으로 테베스Thebes에 있는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돌을 쪼아서 구체적인 선을 나타낸 부부의 모습은 마치 종이 위에 유연한 선으로 드로잉한 만화처럼 보인다.
이집트인의 사실주의 기교는 15년 후인 기원전 1360년 그들이 제작한 아멘호텝 4세의 흉상에서도 발견되며 석회암을 깍아서 제작한 높이 3.125인치의 아주 작은 흉상은 공간에 드로잉한 것처럼 정교하다.

같은 해 그들이 제작한 왕후 노프레테테Queen Nofretete의 흉상은 유명하며 석회암으로 높이 19인치의 왕후의 모습은 미인을 상징한다.
아멘호텝 4세의 뒤를 이어 왕에 즉위한 투탄카멘Tutankhamen은 18세에 요절했는데 금으로 된 그의 관에 새겨진 그의 모습은 이집트 예술가들의 사실주의의 극치였다.
이것은 기원전 1340년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 약73인치이며 금에 이나멜을 칠한 것이다.
금을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 관을 장식한 조각으로 금의 무게만도 250파운드나 되며 반짝이는 금과 풍부한 색채가 이집트인의 고도한 기술과 미학을 뽐내기에 충분하다.

금을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 예술품의 재료로 사용한 방법은 우리나라 통일신라 시대에도 가능했다.
통일신라 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GNP가 가장 높았던 때로 사람들은 흰옷을 입었고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워올랐다.
금박에 글을 쓸 정도로 물자가 풍부했던 때였다.
페루의 인카Inka 유적에서도 금을 얇게 사용한 예술품들이 발견되지만 이런 방법을 일찍이 이집트인이 사용한 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집트인의 사실주의 회화와 조각의 기교는 그리스를 포함해 중동의 여느 나라뿐 아니라 로마인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므로 서양미술에서의 이집트의 영향은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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