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눈인데 얼마나 놀라운 눈인가!"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마네와 모네의 이름은 비슷해서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된다.
어떤 작품은 마네의 것인지 모네의 것인지 혼돈스러울 때도 있다.
마네는 인물을 주로 그린 화가지만 그가 그린 풍경화를 보면 모네의 것과 유사한 데가 있고,
모네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지만 모네가 그린 인물화를 보면 마네의 것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우정을 나눴으므로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832년에 태어난 마네는 1840년에 태어난 모네보다 여덟 살이 많지만 동시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마네는 한 스승 아래서 6년 동안 수학하면서 모델에 대한 드로잉을 충분히 익혔고 루브르 뮤지엄을 포함해서 여러 곳의 뮤지엄에서 대가들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대가들의 화풍을 익혔다.
작품을 팔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유산이 많아 당대의 많은 화가들에 비하면 좋은 조건 아래서 작업할 수 있었다.

마네가 많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연구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할스, 틴토레토, 필립피노 립피, 브루위, 안드레아 델 사르토, 기를란다이오, 파르미지아니노, 고야 등의 화풍들이 베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신지식인에 해당되는데 자신이 익힌 많은 대가들의 주제와 화풍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또 다른 류의 화풍을 창조해냈다.
마네는 의도적 구성이나 생략으로 화가 자신만의 느낌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으며, 따라서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고, 모델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 예로 아내 수잔을 그린 11점의 인물화는 모두 걸작이 못 되었지만 빅토린 뫼랑을 모델로 한 10점은 대부분 걸작이 되었다.
인물화와 달리 그의 풍경화는 당대 풍경화 화가들의 것들에 비하면 특기할 만하지 못하다.
그의 풍경화 일부는 모네를 의식하고 그의 화풍을 흉내냈지만 졸작으로 나타났다.
다만 그가 타계하기 얼마 전에 그린 풍경화는 시적이며 그만의 미적 관점으로 나타났다.

마네와 달리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모네는 아버지의 경제적 도움이 전혀 없는 가운데 화가의 길을 걸었다.
따라서 그는 고향에서 부댕에게서 잠시 수학한 것을 제외하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다.
파리에서 무료로 모델을 그릴 수 있는 화실에서 잠시 모델을 그린 것 외에는 인물화와 드로잉에 대한 수학은 하지 못했다.

부댕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모네에게 화실은 건물 안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었다.
그는 산으로 들로 나가서 자신이 직접 바라본 장면들을 그렸다.
그는 대가들의 화풍을 연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눈과 느낌만을 신뢰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는 다만 모네가 있을 뿐이다.
작품을 팔아야만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동료 화가 바지유가 보불전쟁 때 전선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그를 경제적으로 도왔으며 그후에는 마네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도와주었다.

마네와 모네와 어울린 폴 세잔은 모네를 가리켜서 "그는 눈인데 얼마나 놀라운 눈인가!"라고 했듯이 모네가 자연을 바라보는 눈은 보통 화가들의 것들과는 달랐다.
모네는 아주 독특한 눈을 갖고 빛이 일기의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사방으로 분산되는 것을 마음 속으로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마네를 일컬어 '인상주의 화가들의 왕'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지만 정작 그 영예를 받아야 할 사람은 모네이다.
여덟 차례에 걸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룹전에 마네는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이 선호하는 모델이자 동생 외젠느와 결혼한 하가 베르테 모리소에게 그들의 그룹전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했다.
모리소는 마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룹전에 참여했다.

마네는 일찍이 파리 화단에서 유명해져 인상주의 운동의 선구자라는 영예를 얻었지만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마네는 국전을 통해 그리고 낙선전을 통해 파리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훌륭한 화실을 갖고 있었으며, 또 나이도 많아 카페에 가면 모두들 그의 주위로 몰렸다.
그는 주로 카페 게르부아에 자주 갔는데 그곳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단골 카페로 바지유, 팡탱-라투르,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등이 자주 갔으며, 드가는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어쩌다 갔지만 그들 모두 마네를 그룹의 리더로 생각했다.
이들 그룹은 마네의 화실이 있는 바티뇰 가의 이름을 따서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알려졌다.
바티뇰 그룹의 화가들이 인상주의 운동을 전개했고 마네가 그룹의 리더였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자연스럽게 마네를 인상주의의 왕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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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포드 스틸,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여기에 있다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로드코와 평생 우정을 나눈 클리포드 스틸Clifford Still은 회계사의 아들로 1904년 노스 다코타주의 그랜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겨했으며 색, 빛, 사물을 관찰하면서 화가가 될 소질을 나타냈다.
그는 음악과 문학, 시에도 관심이 많았다.
스물 한 살 때인 1925년 그는 뉴욕으로 와서 11월 6일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
그는 첫날 강의 45분 만에 학교를 떠나면서 “학교 공부는 내가 수년 전에 이미 실습한 것들이라서 그것들을 다시 배운다는 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훗날 말했다.
그는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다”면서 “진정한 회화는 양심의 문제이다”라고 했으며 “진정한 예술가는 진실로부터 그림을 그린다”고 주장했다.

스틸은 1926년 가을 워싱턴주의 스포케인Spokane 대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봄학기를 마친 후 자퇴하고 캐나다로 갔다.
1931년 가을 그는 스포케인 대학에 복학했는데 이번에는 장학금을 받았으며 1933년 봄에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곧 원싱턴 주립대학에서 1941년까지 가르치면서 개인적으로 회화를 연구했다.
그는 학교에서 철학과 함께 문학비평도 공부했는데 그가 연구한 사람들은 플라톤, 롱기누스, 베네데토 크로체였다.

그는 1935년에 말했다.
"나는 고전 유럽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 내 방식대로 그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익살스러운 주장과 풍자적인 프란시스 피카비아와 마르셀 뒤샹 그리고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 혹은 1910년대와 20년대 대중적으로 알려진 색다른 외국 문화인 피카소와 모딜리아니를 거부했다."

그는 1941년에 말했다.
"나는 캔버스에서 공간과 사물의 모습들을 온전하게 정신적인 본체로 분석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나를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오직 나의 에너지와 직관의 한계에 의해 융합되는 도구가 되었다.
자유에 대한 나의 느낌은 이제 절대적이며 무한히 쾌활해졌다.
30년대 중반부터 이 문제들을 자유롭게 친구와 예술가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스틸은 유럽의 모더니즘을 데카당스로 규정하고 외부 세계가 아닌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회화의 본질을 찾으려고 했다.
이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공통된 태도이기도 했다.
그가 로드코를 만난 것은 1943년 친구의 집에서였다.
그때 두 사람은 유사한 미학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고 떨어져 있을 때도 서신을 주고 받으며 우정을 나눴다.
두 사람 모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은 여느 예술가들이 나누는 것과 전혀 수준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그림에는 이성적 요소들이 나타났고 감성적 요소는 고도로 문명화된 것으로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이해가 가능한 그림이었다.
고도의 이성을 추구한 스틸은 대중을 무감각하고 주의산만하다고 보았으며 당시의 사회 윤리를 “전체주의의 함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장사꾼들에 의해 미술계가 조작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장사꾼들은 예술가들의 존엄성이나 번영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그는 또 “평론가들은 백정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중의 창자를 위해 햄버거로 만든다.
학자들은 단순히 마비되었다”고 실랄하게 비난했다.
그의 친구는 “스틸은 모든 것을 못마땅해 했다”고 증언했다.

스틸은 40대 후반에 자신의 그림에 관해 말했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나의 현존이며 느낌이고 나 자신이다.
나는 색이 색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질이 질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이미지가 형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들 모두가 살아 있는 정신 안으로 융합되기를 원한다."

그는 회화가 어떤 것을 묘사하거나, 암시하거나, 상징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에게 회화는 자체의 권리를 가지며 전체처럼 존재했으므로 색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는 “검정색은 죽음의 색이지만 공포의 색은 아니다”라면서 오히려 검정색은 자신에게 “따뜻하고 생산력 있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그는 1951년에 헌터 칼리지에서 가르쳤고 이듬해와 1953년에는 브루클린 대학과 시티 칼레지에서 판화를 가르쳤다.

스틸은 천성이 학자였고 철학자였으므로 말할 때나 글을 쓸 때는 간단하게 언급하더라도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는 로젠버그의 평론에 반박하는 글을 쓰면서 폴록과 자신의 그림을 동시에 변명하기도 했다.
그는 로젠버그를 “살롱 좌담가”라고 부르면서 “지성적으로 촌놈”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는 폴록에게 자신은 “근본적으로 회화방법을 바꾸었다”면서 폴록이 물감을 흘리면서 검정색을 쏟아부어 추상을 추구한 방법에 감동했다고 했다.
폴록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본 스틸은 폴록이 미술계에서 희생된 것이라면서 그를 딱하게 여겼다. 그가 보낸 편지가 몰락하던 폴록을 감동시켰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자네는 자네의 전시회를 부끄러워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자네를 통해 예술가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경멸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대해 부끄러워하는가?
그것은 대단한 값을 지불하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스틸은 1957년 모마로부터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으며 그후 세 차례나 더 참가를 거절하면서 비엔날레의 정치성을 비난했다.
그는 1967년 샌프란시스코 뮤지엄이 그를 위한 기념전을 제안했지만 전시회 기간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1972년에 미국 아카데미로부터 메릿 메달Merit Medal을 수여받았고 1978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1980년에 타계했다.

1950년대 중반 평론가 케네스 렉스로스는 스틸에 관해 기술했다.

사람들은 그의 거대한 그림 앞으로 조용히 걸어가서는 불평없이 그 안에 넘어진 후 아무 말없이 그곳으로부터 걸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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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드코,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마크 로드코Mark Rothko는 클리포드 스틸과 함께 한쌍으로 기억되는데 두 사람의 미학이 유사하고 두 사람이 평생 우정을 나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포함되지만 그린버그에 의해 컬러-필드 회화Colour Field painting를 창조한 영예로운 화가들로 따로 분류되었다.

로드코는 1903년 러시아 비테브스크의 드빈스크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대인 아버지는 약사였으며 가족은 1913년 미국으로 이민 와 오레곤주의 포틀랜드Portland에 정착했다.
그해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은 백만 명이 넘었는데 동유럽에서 많은 난민들이 왔으며 그들 가운데 유대인이 많았다.
아버지가 위장병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미국에 도착한 지 7개월 후 1914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로드코는 신문을 배달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때 배고픔을 경험했다고 그는 훗날 말했다.
학교성적이 우수했으므로 그는 1921년 명문대학 예일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여가가 있으면 피아노와 만도린을 연주했고 시를 썼는데 그의 시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내가 화가가 된 이유는 뒤떨어진 회화를 음악과 시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고 했는데 파울 클레의 말을 상기시킨다.

당시 아이비 리그 대학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반유대주의 감정으로 인해 로드코는 학교측으로부터 더이상 장학금을 받을 수 없으며 원한다면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융자해주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 유대인 학생들에 대한 명문대학들의 차별정책 때문에 뉴욕에 거주하던 우수한 학생들이 헌터 칼레지와 시티 칼레지로 몰렸다.
사람들은 시티 칼레지를 가난한 학생들의 하버드 대학이라고 불렀는데 1920년 당시 두 대학 학생들 가운데 무려 팔구십 퍼센트가 유대인이었다.
로드코는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했으므로 1923년 대학을 자퇴하고 “여기저기 서성거리는 거지”가 되었다.
그는 뉴욕으로 가서 봉제공장에서 천을 자르는 일도 했으며 1925년 10월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해 막스 베버Max Weber의 정물화반에서 6개월 동안 수학했다.
그는 베버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했고 자신을 가리켜서 본질적으로 독학한 화가라고 했다.
이 시기에 그는 폴란드에서 온 젊은 피아노 연주자 아서 게이지와 방을 함께 썼다.
그는 게이지에게 “내가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고등어 통조림 하나와 빵 한 줄 그리고 훔친 우유로 사흘 동안 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로드코의 친구 한 사람은 “로드코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처럼 외로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면서 로드코의 친절한 성격은 그가 부분적으로 외로웠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훗날 말했다.
1932년 여름부터 로드코는 더이상 외롭지 않았는데 친구들과 함께 캠프에 갔다가 자신의 만돌린 연주 솜씨에 반한 에디스 사차를 만났기 때문이다.
사차는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유대인으로 로드코의 첫 아내가 되었다.
로드코는 1929년부터 브루클린에 있는 센트럴 아카데미의 강사로 재직했으며 이때부터 30년 동안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로드코는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는데 폴록, 드 쿠닝, 고르키를 만났고 개인적으로는 이웃에 사는 아돌프 고틀립과 우정이 두터웠다.
고틀립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지성인이었으므로 로드코는 그와 수준 높은 미학을 논할 수 있었다.
그는 고틀립을 거의 매일 만나 신화에 관해 대화하면서 신화에서 주제를 발견하여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로드코는 클리포드 스틸을 만난 후 그와도 지성적인 대화를 나눴고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지만 서신을 교환했는데 두 사람의 서신이 지금도 남아 있다.
스틸은 그때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로드코는 초현실주의로부터 영향을 받고부터 신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진동하는 듯한 색의 면을 그려서 관람자로 하여금 그림의 공간 속으로 친숙하게 빠져들게 하기 위해 커다란 그림을 그리기를 선호했다.
그는 어두운 모노크롬 그림을 그렸으며 분명하지는 않지만 우주적 의미와 감성을 환기시키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47년에 사각형태로 물감을 캔버스에 촉촉히 젖게 하여 마치 사각형이 물에 떠내려가는 듯한 그림을 그렸다.
그가 1949년에 <무제 Untitled>로 그린 것도 그런 것들 중 한 점으로 그는 세로로 세운 직사각형 캔버스에 가로로 누인 직사각형 형태들을 그려 넣었다.

그는 유화물감을 수채처럼 엷게 사용하여 캔버스에 촉촉히 젖게 하면서 직사각형 형태의 가장자리를 불분명하게 했다.
그의 떠내려가는 색들은 분명한 형태를 띠지 않기 보통이었으며 미세한 운동과 색들이 제공하는 촉감들이 평면에서 깊이를 나타냈다.
이런 그의 그림들은 이후 5년 동안 진전되면서 대개는 커다란 사각형태들로 색이 있는 배경 위에 그려졌다.
물감을 물에 엷게 적신 듯이 다양한 색조를 지닌 로드코의 형태들은 캔버스에서 구름처럼 시각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듯 보였다.
그가 1950년에 그린 <초록, 빨강, 오렌지 Green, Red, Orange>는 거대한 크기의 그림인데 형태와 색이 매우 단순화되어 있었다.
휘트니 뮤지엄은 그의 그림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그는 휘트니 뮤지엄을 “쓰레기 매매장”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림을 팔지 않았다.

그는 1951년에 말했다.

"나는 매우 큰 그림을 그린다.
나는 커다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매우 장엄하며 과시하게 된다는 걸 알았다.
내가 크게 그리는 특별한 이유는 관람자에게 친근해지고 인간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이다.
그림을 작게 그리는 것은 네 자신을 너의 경험 밖에 두는 것이며 입체환등기처럼 경험을 쳐다보는 것이다.
그림을 크게 그리게 되면 넌 그 안에 있게 된다. 이는 네가 명령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1950년대 로드코의 명성은 높았으며 1954년 그의 그림 한 점이 4천 달러에 팔렸다.
(History of Modern Art 457) 그의 컬러-필드 그림은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가 폴록과 드 쿠닝 그리고 프랜츠 클라인의 그림을 이벤트로 보고 액션 페인팅이란 말로 분류한 것에 비해 좀더 사변적이었다.
로드코는 인간의 감성 문제와 고뇌를 감각적으로 묘사할 줄 알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나는 색·형태 혹은 어느 것과의 관계에도 관심이 없다.
난 오로지 기본적인 인간의 감성을 표현할 따름이며, 비극, 희열, 운명을 표현한다.
많은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 울거나 나약해지는 것은 나의 인간적 감성이 그들에게 전해진 까닭이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종교적 경험을 하는 사람들로서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이런 경험을 한다.
여러분이 색들의 관계만을 생각한다면 초점을 잃게 될 것이다."

로드코의 그림값이 앙등했으며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그는 1960년대에 팝아트가 성행하자 격노하면서 “팝아트 예술가들은 사기꾼들이며 기회주의자들이다”라면서 “젊은 예술가들이 우리를 살해하려고 한다”고 투덜거렸다.
말년에 그는 폭음했고, 1944년 두 번째 아내로 맞은 앨리스는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요양소에 보내졌다.
동맥류로 고생하던 로드코는 1970년 초 동맥을 끊어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말년에 정신적으로 고독해지면서 빛의 시인으로 불리운 그의 그림들은 자꾸만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며 마지막으로 그가 그린 그림은 밤의 풍경화와도 같았다.
1978년 구겐하임 뮤지엄에서는 그를 위한 기념전을 대규모로 개최했는데
당시 그의 그림 한 점이 19만 7천 달러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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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결정되었나?

이 글은 호킹이 1990년 4월 캠브리지 대학에서 열린 시그마 클럽Sigma Club 세미나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호킹뿐 아니라 생존하는 혹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20세기의 중요한 물리학자들은 철학적 질의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했다.
물리학의 끝에 도사린 문제는 역시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에 있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물리학적 신비주의의 태도를 취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자유로운지 그리고 의지의 한계와 그 책임에 관심을 나타낸다.
호킹도 이 강연에서 물리학적 결정론 혹은 운명론을 제시하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로서는 도저히 운명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했다.

형이상학metaphysics은 '물리학 이후'라는 뜻이다.
meta는 after란 뜻이다.
물리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논리의 법칙을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주제의 논의를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학문이다.
분석철학 이후 특히 비트겐슈타인이 대부분의 형이상학적 질의들을 무의미한 것들로 취급한 이래 형이상학은 허황된 분야로 떨어지고 말았다.
대신 물리학의 발달로 우리는 본질적인 질의를 계속 논할 수 있게 되었는데
호킹을 포함한 20세의 중요한 물리학자들의 역할이 크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호킹의 강의를 읽기 바란다.


줄리우스 시저는 극중에서 카시우스 브루투스에게 말한다.
"남자들은 때로 자신들의 운명의 주인이다."
우리는 정녕 우리 자신들의 운명의 주인이란 말인가?
혹은 모든 것을 우리가 결정했는가?
결정론에 대한 논쟁으로 신은 전지하신 분이므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이미 알고 계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유의지Free Will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은행을 털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무죄여야 할 것이다.
헌데 그 사람은 왜 자신의 행위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하는가?

최근 결정론은 과학에서 논쟁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우주에는 잘 규정된 법칙들이 있어서 그것들에 의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시간 안에서 발전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비록 우리가 이런 모든 법칙들을 수용하는 완전한 법칙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가장 극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을 결정하는 것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
나는 앞으로 20년 내에 완전한 법칙을 우리가 발견할 확률이 반반으로 믿는다.
만약 우리가 그 법칙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이 강연 제목에 대한 논쟁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우주의 시작으로부터 우주의 진화를 결정짓는 완전한 법칙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법칙들은 신에 의해 결정된 것 같은데
신은 우주 안에서 법칙들을 어기는 데 간섭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법칙에 의해서 진화되기로 결정되어 있는 듯 한데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운명의 주인이라고 생각되기 어려워진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어떤 커다란 통일된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첫째, 통일된 이론은 수학적으로 보면 함축되고 정밀한 것인데
어떻게 그 그 통일된 이론이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하고 하찮은 세부적인 것들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통일된 이론이 신니아드 오코너Sinead O'Connor가 이번 주에 있을 시위에 최고의 위치를 차지할 것인지 혹은 마돈나가 코스모스폴리탄 잡지의 표지모델로 선정될 것인지를 이미 결정하고 있겠는가?

두 번째 문제는 그 통일된 이론이 모든 것들을 결정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하는 어떤 것들도 이 이론에 의해 벌써 결정되어진 것들일 텐데
왜 그것들은 옳아야만 하는가?
그런데 얼마나 많은 오류의 이론들이 있는가.

세 번째 문제는 그 통일된 이론이 모든 것들을 결정하고 있다지만 우리는 스스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자유의지란 환상이란 말인가.
만약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어떤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런 결정론의 문제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거론되어 왔다. 
  

첫째 문제부터 살펴보자.
통일된 이론이 어떻게 하찮은 세부적인 것들까지 예고할 수 있을까?
우주 초기에 모든 것이 아주 가까이 한 데 있었으며,
그때 아주 많은 불확정한 것들이 있었고,
그때는 우주의 가능한 상태들이 많았다.
이런 상이하고 가능한 초기 상태들은 우주의 상이한 역사들의 전체 가족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비록 확률은 낮더라도 나치가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 역사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연합군이 승리한 역사 속에 살고 있으며 마돈나가 단순히 코스모폴리탄 잡지의 표지가 되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두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의 행위가 통일된 이론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이론은 왜 우주에 관해 틀린 것보다는 바른 결론을 결정해야 하는가?
우리가 말하는 어떤 것들도 왜 어떤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대답은 찰스 다윈의 자연적 선택의 개념에 근거한다.

아주 원시적 생명체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원자들의 우연적 결합에서부터였다.
원시적 생명체는 아마 커다란 분자였을 것이다.
그 생명체는 아마 DNA가 아니었을 것인 즉 닥치는 대로의 결합에 의해 온전한 DNA 분자가 형성될 우연은 적기 때문이다.
초기 생명의 형태는 스스로를 재생했을 것이다.
양자 불확정 원리와 원자들의 닥치는 대로의 열운동들은 재생에 어떤 결함이 있음을 뜻한다.
이런 결함들의 대부분은 유기체의 생존 혹은 재생의 능력에 치명적이다.
이와 같은 결함들은 차세대에 유전되기보다는 스스로 소멸되어버렸을 것이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의 발전은 초기 상태의 개량이었으며 이것이 어떤 초기 생명체들로 대신할 수 있는 진전이었다.
진화는 진전되어 그것이 중앙 신경조직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인간인 종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고도의 원숭이와도 같았는데 우리의 몸과 우리의 DNA 모두 이와 비슷했다.
우리의 DNA 속에 있는 약간의 다양함이 우리로 하여금 언어를 발전시키게 했다.
우리는 말로서 자료들과 경험들을 차세대에 알렸으며 나중에는 문자로 그렇게 했다.

인간으로 진화하는 데는 무려 30억 년 이상 소요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문자를 발전시킨 것은 1만 년 동안이었으며 문자는 동굴 속에서 거주하던 우리로 하여금 발전하게 하여 오늘날 우주의 궁극적 이론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지난 1만 년 동안에 우리는 신체적으로 특별히 진화되지 않았고 DNA에도 변화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해 얻은 자료들로부터 바른 결론들을 끄집어내는 우리의 능력, 지성들은 우리가 동굴 속에서 살던 때 혹은 그 이전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이제 세 번째 문제 우리의 행위에 대한 자유의지와 책임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체적으로 느낀다.
하지만 이는 그저 환상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혹은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들 모두가 옳을 수는 없다.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실험해보자.
가령 우리가 다른 유성으로부터 온 손님 '작은 푸른 사람'을 맞이했다고 하자.
우리는 그 작은 푸른 사람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처럼 행위하는 프로그램을 가진 로보트인지 어떻게 식별할 수 있겠는가?
궁극적인 자유의지의 실험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우주인이 유기체의 행동을 예언할수 있는가?
만약 그가 예언할 수 있다면 분명 그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미리 결정되어 있는 대로 행위할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행동을 예언하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자유의지의 정의에 불만을 갖고 우리가 완전한 통합이론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예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의 두뇌 역시 불확정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분야이다.

사람의 행동 속에 양자역학에 관련되는 닥치는 대로의 요소가 있다.
하지만 두뇌 속에 관여되는 에너지들이 너무 작아서 양자역학적 불확정은 매우 작은 결관만을 말해줄 뿐이다.
우리가 사람의 행동을 예언할 수 없는 진정한 이유는 그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두뇌작용에 대한 기본 물리학적 법칙들을 알고 있으며 그것들은 비교적 단순하다.
몇몇 미분자보다 더욱 많은 미분자들이 관여되면 그것들을 방정식으로 정립하기가 너무 어려워지며 중력의 단순한 뉴턴 이론에서도 방정식을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미분자들에 대해서일 뿐이다.

세 미분자들이나 그 이상의 미분자들을 위해서는 근사치 밖에는 방정식화할 수 없으며 미분자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어려움은 가중된다.
사람의 두뇌는 10의 26자승 혹은 1억 10억 10억 미분자들을 가지고 있다.
이 숫자는 너무 많아서 우리로 하여금 방정식을 정립하지 못하게 하며 두뇌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예언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두뇌의 최초 상태조차도 측정할 수 없는데
만약 측정하려고 한다면 두뇌를 모두 분해해야만 하고 또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기록할 미분자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두뇌는 최초의 상태에 아주 예민하여서 최초의 상태 안에서의 작은 변화는 아주 크게 다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두뇌를 작용하는 근원적인 방정식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람의 행동을 예언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유용한 이론들을 사용할 뿐이며 이것들은 근사치이다.

예를 들면 물은 전자들, 양자들, 중성자들로 된 분자들이 수십 억의 수십 억 개가 있다.
이것은 훌륭한 물에 대한 근사치이고 속력, 밀도, 온도들의 성격도 갖고 있다.
물에 관한 유능한 이론의 예언들은 정확하지 않고 마치 일기예보와 같으나 기름파이프나 배들을 디자인하기에는 충분히 훌륭하다.
우리의 행위들에 대한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의 개념들은 이와 같이 유동체 역학들 안에서 유용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무엇이 진행되기로 결정되었는지 모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행위들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 이유 가운데 다윈의 동기가 작용하는데 그이 이론에 따르면 사회 안에서 각 개인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이 있을 때 이런 것들이 모두 함께 작용하여 사회는 사회의 가치들을 퍼뜨리며 생존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통계적이다.
'거의 자유의지'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신은 다음 코스모폴리탄 잡지의 표지에 누가 모델로 선정될지를 이미 알고 있을까?

양자역학의 불확정 원리로는 우주는 어느 한 역사가 꼭 이루어지게 되어 있지 않으며 가능한 역사들의 한 집합으로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역사들은 거시적으로 본다면 비슷하게 보일른지 모르지만 매일 매일의 단위로 본다면 그것들은 대단히 다르다.
우리는 어느 특별한 역사 속에 어쩌다 살고 있는 것이다.
결론으로 이 글의 제목은 질문으로서 "모든 것은 결정되었는가?"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무엇이 결정되었는지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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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있는 시계와 비행기 안에 있는 시계를 비교하면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이론을 혼용하게 되면 시간 자체는 150억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미래 언젠가에는 종말을 맞게 된다.
그러면서도 다른 류의 시간 안에서 우주는 경계가 없고,
창조된 것도 아니지만 멸하지도 않으며,
그냥 존재할 뿐이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사람들이 우주적 시간 개념을 버린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고 빛에 대한 속도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며 빛은 1초에 18만 6천 마일의 속도로 나아간다고 했다.

지상에 있는 시계와 비행기 안에 있는 시계를 비교하면 극히 미세하더라도 비행기 안에 있는 시계는 지상의 시계보다 느리다.
우리가 지구를 4억 번 돌게 되면 우리 인생은 1초가 길어지는 만큼 비행기 안에 있는 시계는 지상의 시계보다 느리다.
아인슈타인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은 공간과 나눠서 생각할 수 있는 우주적 숫자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지난 시간과 다가올 시간은 단지 방향들directions에 불과하고 마치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 전진과 후진과 같으며 공간-시간space-time이라고 부른다.

아인슈타인이 1915년에 공식화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gravity은 단지 공간-시간 내에서 일어나는 힘이 아니고 물질mass과 물질 속에 있는 에너지에 의해 생겨나는 공간-시간의 방향이라고 했다.
포탄과 유성들이 공간-시간 내에서 똑바로 전진하려고 하나 공간-시간이 평편하지 않고 구부러졌기 때문에 그것들을 구부정하게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또 지구가 똑바로 나아가려 하지만 태양의 물질에 의해 생겨난 굽어진 공간-시간 때문에 지구는 구부러지게 전진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돌게 된다.
빛도 마찬가지로 똑바로 나아가려고 하나 태양 근처의 굽어진 공간-시간 때문에 별들의 빛이 태양 근처에 도달해서는 구부러진다.

1919년 영국 물리학자들은 그해 일식을 관측하여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확인하며 공간-시간이 평편하지 않고 물질과 그 속에 있는 에너지에 의해 굽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공간과 시간에 관한 개념들을 바꾸어놓게 만들었다.
우리는 더이상 시간과 공간이 영원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지구의 중력은 우리를 지구의 중심으로 잡아당기고 태양의 중력은 지구가 궤도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수축되고 있거나 팽창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주장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데 1929년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이 은하들galaxies이 우리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음을 발견한 이래 사람들은 우주에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이런 사실을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데 대해 "내 생애에 가장 큰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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