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포드 스틸,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여기에 있다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로드코와 평생 우정을 나눈 클리포드 스틸Clifford Still은 회계사의 아들로 1904년 노스 다코타주의 그랜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겨했으며 색, 빛, 사물을 관찰하면서 화가가 될 소질을 나타냈다.
그는 음악과 문학, 시에도 관심이 많았다.
스물 한 살 때인 1925년 그는 뉴욕으로 와서 11월 6일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
그는 첫날 강의 45분 만에 학교를 떠나면서 “학교 공부는 내가 수년 전에 이미 실습한 것들이라서 그것들을 다시 배운다는 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훗날 말했다.
그는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다”면서 “진정한 회화는 양심의 문제이다”라고 했으며 “진정한 예술가는 진실로부터 그림을 그린다”고 주장했다.

스틸은 1926년 가을 워싱턴주의 스포케인Spokane 대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봄학기를 마친 후 자퇴하고 캐나다로 갔다.
1931년 가을 그는 스포케인 대학에 복학했는데 이번에는 장학금을 받았으며 1933년 봄에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곧 원싱턴 주립대학에서 1941년까지 가르치면서 개인적으로 회화를 연구했다.
그는 학교에서 철학과 함께 문학비평도 공부했는데 그가 연구한 사람들은 플라톤, 롱기누스, 베네데토 크로체였다.

그는 1935년에 말했다.
"나는 고전 유럽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 내 방식대로 그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익살스러운 주장과 풍자적인 프란시스 피카비아와 마르셀 뒤샹 그리고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 혹은 1910년대와 20년대 대중적으로 알려진 색다른 외국 문화인 피카소와 모딜리아니를 거부했다."

그는 1941년에 말했다.
"나는 캔버스에서 공간과 사물의 모습들을 온전하게 정신적인 본체로 분석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나를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오직 나의 에너지와 직관의 한계에 의해 융합되는 도구가 되었다.
자유에 대한 나의 느낌은 이제 절대적이며 무한히 쾌활해졌다.
30년대 중반부터 이 문제들을 자유롭게 친구와 예술가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스틸은 유럽의 모더니즘을 데카당스로 규정하고 외부 세계가 아닌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회화의 본질을 찾으려고 했다.
이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공통된 태도이기도 했다.
그가 로드코를 만난 것은 1943년 친구의 집에서였다.
그때 두 사람은 유사한 미학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고 떨어져 있을 때도 서신을 주고 받으며 우정을 나눴다.
두 사람 모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은 여느 예술가들이 나누는 것과 전혀 수준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그림에는 이성적 요소들이 나타났고 감성적 요소는 고도로 문명화된 것으로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이해가 가능한 그림이었다.
고도의 이성을 추구한 스틸은 대중을 무감각하고 주의산만하다고 보았으며 당시의 사회 윤리를 “전체주의의 함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장사꾼들에 의해 미술계가 조작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장사꾼들은 예술가들의 존엄성이나 번영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그는 또 “평론가들은 백정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중의 창자를 위해 햄버거로 만든다.
학자들은 단순히 마비되었다”고 실랄하게 비난했다.
그의 친구는 “스틸은 모든 것을 못마땅해 했다”고 증언했다.

스틸은 40대 후반에 자신의 그림에 관해 말했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나의 현존이며 느낌이고 나 자신이다.
나는 색이 색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질이 질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이미지가 형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들 모두가 살아 있는 정신 안으로 융합되기를 원한다."

그는 회화가 어떤 것을 묘사하거나, 암시하거나, 상징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에게 회화는 자체의 권리를 가지며 전체처럼 존재했으므로 색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는 “검정색은 죽음의 색이지만 공포의 색은 아니다”라면서 오히려 검정색은 자신에게 “따뜻하고 생산력 있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그는 1951년에 헌터 칼리지에서 가르쳤고 이듬해와 1953년에는 브루클린 대학과 시티 칼레지에서 판화를 가르쳤다.

스틸은 천성이 학자였고 철학자였으므로 말할 때나 글을 쓸 때는 간단하게 언급하더라도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는 로젠버그의 평론에 반박하는 글을 쓰면서 폴록과 자신의 그림을 동시에 변명하기도 했다.
그는 로젠버그를 “살롱 좌담가”라고 부르면서 “지성적으로 촌놈”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는 폴록에게 자신은 “근본적으로 회화방법을 바꾸었다”면서 폴록이 물감을 흘리면서 검정색을 쏟아부어 추상을 추구한 방법에 감동했다고 했다.
폴록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본 스틸은 폴록이 미술계에서 희생된 것이라면서 그를 딱하게 여겼다. 그가 보낸 편지가 몰락하던 폴록을 감동시켰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자네는 자네의 전시회를 부끄러워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자네를 통해 예술가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경멸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대해 부끄러워하는가?
그것은 대단한 값을 지불하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스틸은 1957년 모마로부터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으며 그후 세 차례나 더 참가를 거절하면서 비엔날레의 정치성을 비난했다.
그는 1967년 샌프란시스코 뮤지엄이 그를 위한 기념전을 제안했지만 전시회 기간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1972년에 미국 아카데미로부터 메릿 메달Merit Medal을 수여받았고 1978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1980년에 타계했다.

1950년대 중반 평론가 케네스 렉스로스는 스틸에 관해 기술했다.

사람들은 그의 거대한 그림 앞으로 조용히 걸어가서는 불평없이 그 안에 넘어진 후 아무 말없이 그곳으로부터 걸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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