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과 젖은 장작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책상에 앉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창문으로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들어온다.
고개를 주욱 빼고 내다보니 몇 집 건너에서 무엇을 태우는지 연기가 피어오른다.
갑자기 며칠 전 어느 사람과 술을 마시면서 그가 한 말이 생각난다.
"첫사랑과 젖은 장작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
"타지는 않고 연기만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과연 명답이었다.

그 사람은 곧잘 이런 식의 유머를 전해준다.
"추장보다 더 높은 것이 누군지 아세요?"
한 아가씨가
"고추장이요." 하고 재빨리 응답했다.
"그러면 고추장보다 더 높은 것은?"
"초고추장이요."
그 아가씨가 또 맞추고 의기양양하다.
그가 또 묻는다.
"초고추장보다 더 높은 것을?"
그 아가씨가 답을 내지 못한다.
그가 말한다.
"태양초고추장이에요."
이건 완전히 초등학교 수준의 유머다!
헌데 그의 유머는 늘 상쾌하다.

"그가 누구일까요?" 하고 나는 묻고 싶다.
모두 알 수 없겠지.
그의 이름은 노 성 두 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이름은 '요요 마'


첼리스트 요요 마가 유명하기 전,
그가 시카고의 한 호텔에 묵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는 룸서비스를 받으려고 프론트데스크에 전화했다.
그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요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론트데스크에서는 장난전화인 줄 알고 끊었다.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 항의하자 이번에는 last name을 물었다.
그가 “마”라고 말하자 프론트데스크에서는 다시 장난전화를 건 것으로 알고 끊었다.
요요 마는 프론트데스크로 직접 내려가 자신의 여권을 보여주고 자신의 이름이 요요 마임을 입증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너무나 낯익은 1960년대 장르들의 반복과 복제
[미술비평] 표류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2008년 06월 23일 (월) 14:32:50 교수신문 editor@kyosu.net
 


   
  □ 키치 61 제프 쿤스, ‘진부함의 도래’, 1988. 분홍색의 뚱뚱한 돼지가 목에 리본을 두른 채 날개 달린 천사에 끌려오는 장면을 보고 사람들은 매혹적이고 천진하단 인상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쿤스는 키치를 고귀한 것으로 만든다.  
 
컨템퍼러리 아트가 표류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초부터다.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특정한 훈련을 통해 고유한 영역을 점하게 된 전문가란 인식을 부정했을 때, 혹은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 할 훈련이란 없음을 알고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에, 그때부터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런 자의식은 1960년대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 초는 외적으로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다분했다.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밥 딜런의 저항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은밀히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에 반발했고, 이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에 대한 반발이 미국과 영국에서 팝 아트를, 유럽에서 누보레알리슴을 생산했는데, 명칭만 다를 뿐 유사한 이런 운동의 배경은 해방이었다. 이 운동의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로서 그는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누상자인 브릴로 상자를 모사하여 1964년 봄에 화랑에서 선보였다. 실재와 외양에 있어 진부한 비누상자에 불과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미술품으로 바라봤으며, 이는 미술품이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입증했다. 해방과 관련해 1964년에 괄목할 사건이 많이 발발했으며, 비틀즈가 에드 설리반 쇼를 통해 미국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미국 전역과 곧 이어 전 세계를 휩쓴 해방정신의 상징이자 촉매가 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미술품은 더 이상 실재의 그림자나 실재의 모방이 아니라 실재 자체라는 인식이 1960년대에 보편화됐다. 아티스트들은 더 이상 소수의 엘리트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진부한 매체들을 선호했다. 그리고 대중이 미술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복제를 통해 다량 생산했다. 그들은 모든 매체를 받아들였고, 버려진 산업폐기물과 쓰레기소각장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물질들로 작품을 제작했으며, 자신의 몸을 재료로 사용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배설물까지도 미술품의 재료로 사용했다.



   
  □ 1964년 4월 21일 뉴욕 스테이블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개막일. 앤디 워홀이 브릴로 상자 조각품들 사이에서 서 있는 모습이다.  
 
우리가 현재 미술관과 화랑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작품 형식이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고도의 자의식 운동인 팝 아트와 누보레알리슴을 시작으로 1970년대 개념이 미술가들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해방의 무드가 다양한 장르들을 생산해냈는데, 아상블라주와 정크 아트, 펑크 아트, 설치, 키치, 시추에이션 아트, 비디오 아트, 해프닝, 퍼포먼스 아트, 바디 아트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성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컨템퍼러리 아트는 1960년대에 생산된 장르들의 혼재 현상에 불과하며, 수준에 있어 1960년대에 머물고 있다. 그 시대의 다양한 아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컨템퍼러리 아트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아울러서 질이 매우 저하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념의 해체를 시도하는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띠지만 이 역시 1970년대의 개념미술에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브제와 개체들이 미술품 내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 생산하고, 반복과 복제가 의미의 대상, 혹은 기호를 소멸시킨다.


팝 아트의 전형인 키치 아티스트들은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에 굶주린 대중, 혹은 감상적 자기 향락을 좋아하는 대중을 위해 문화의 질이 낮고 인습적인 가상 실재를 그대로 소재로 이용하고 있다. 키치는 복제를 통해 늘어나고 있는데, 복제를 통한 키치의 생산은 워홀에 의해 이미 극단적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그는 1963년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전시회에 대응해 이 유명한 작품을 서른 번이나 복제하면서 ‘기술복제시대의 미술작품’을 양산했다. 실크스크린 인쇄방식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키치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으로 각광받았다. 그의 복제화는 원화와의 관계에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미술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한 당시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했다. 워홀은 “서른 개가 하나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복제를 하게 되면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는가 하는 것인데, 라스코 동굴화의 복제화에서 사람들이 원화와 같은 체험을 하는 데서 복제에서도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입증됐다.


복제가 용인되자 만화, 광고, 낭만을 특징으로 하는 키치 아트가 등장했으며, 이는 팝 아트가 통속적인 회화세계를 다루고 원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는 데서 더 나간 것이다. 예술에서의 엘리트주의를 철저히 배척한 제프 쿤스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만을 제작한다. 「진부함의 도래」는 어린 천사가 목에 리본을 두른 분홍색 암퇘지를 예술로 끌어들이는 장면이다. 쿤스는 진부한 것, 즉 키치를 예술로 끌어들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하지만 내 마음에 들어’ 하는 반응을 유도한다.


유머와 아이러니는 키치 아트의 생명이다. 그만큼 대중이 키치를 사랑하고 애호하기 때문에 이런 예술이 생겨난 것이다.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좋은 취향이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키치를 진지한 미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촌티패션, 찢어진 청바지, 배꼽티, 복고열풍을 통한 값싼 재료로 모조한 옷들이 키치에 속한다. 음악에서의 웅얼거림, 무의미한 소리가 키치에 속한다. 사람들은 본래 금지되었던 것, 감동적인 것,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알게 된 것이다.


키치 아트가 팝 아트의 변종으로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성행하는 미술은 1960년대 이미 생산된 장르들의 혼재에 불과하므로 컨템퍼러리 아트는 거의 반세기 동안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김광우 / 미술평론가

필자는 뉴욕 시티칼리지와 포담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주요저서로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프랑스미술 500년』, 『백남준 VS 앤디 워홀』,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 외 다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쓰레기 백 주세여? 네? 쓰레기 봉투지요!

어제 집 근처 마트에 가서 사내 점원에게 "쓰레기 백 주세여?" 하고 말하니, 그 점원이 "네? 쓰레기 봉투지요!" 하고 말하고는, 킥킥 웃는다.
그는 한 번 더 "쓰레기 백이요?" 하고 말하고는 다시 킥킥거린다.
순간 내가 말을 잘못한 것인가 생각했다.
쓰레기 봉투를 열 장 사가지고 마트를 나와 집으로 오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말을 잘못하지 않았다.
왜 쓰레기 봉투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봉투라 함은 그것이 종이로 만들어졌든, 비닐로 만들어졌든 완전히 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납작한 것들 말하자면 주로 종이들을 넣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쓰레기를 넣는 것은 백이 분명하다.
쓰레기를 백에 넣으라고 말해야지 쓰레기를 봉투에 넣으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집으로 오면서 그 점원이 어이 없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는 모습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네? 쓰레기 봉투지요!" 하고 킥킥거렸다.

"그놈 참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진관사津寬寺에 다녀왔습니다



어제는 장항 못미처에 있는 섬진강 메기매운탕 집에서 점심을 먹고 진관사津寬寺에 갔습니다.
절터는 역사적으로 1천 년이 되었지만, 절은 4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고찰이라고 해야 할지 신찰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북한산(혹은 삼각산三角山) 자락 밑에 둥지를 트고 있어 산보삼아 가볼만한 곳입니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顯宗(992-1031) 때 건립되었지만 이조 태조 때 창건하고, 6.25동란 때 파괴된 것을 1964년에 비구니가 새로 지은 절입니다.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노승 진관조사津寬祖師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지은 절로 알려졌습니다.
그곳에 숨어있던 현종을 그 절의 주지 진관조사가 방에 굴을 파고 현종을 숨기고 침상을 그 굴 위에 올려놓고 거처하면서 화를 면하게 하여 신혈사神穴寺란 이름이 생겼고 현종 즉위 후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대가람을 짓고 절 이름을 진관사라고 했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제의 근본 도량이었습니다.
수륙제水陸齊란 봄과 가을에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입니다.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칠성각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모니불을 보존불로 모시는 당우堂宇로서 대웅大雄이란 고대 인도의 마하비라를 한역漢譯한 말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고 일컬은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나한전羅漢殿은 말 그대로 16羅漢을 모신 곳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는 12명인데 석가모니의 수제자는 16명이었습니다.
석가모니의 제자 500명을 모신 나한전도 있습니다만, 진관사에는 16명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명부전冥府殿은 재미있는 곳입니다.
명계冥界라고 하면 저승을 말합니다.
명부전은 그러니까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고 망자亡者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極樂往生하도록 기원하는 곳입니다.
지장은 브라마나 시대부터 일장日藏, 월장月藏, 천장天藏 등과 함께 별의 신으로 신앙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견주면 지장보살은 포세이돈에 해당합니다.
인도의 신앙이 중국에 들어와 염마시왕閻魔十王 신앙과 결합되고 말법末法 사상이 활기를 띠면서 지장을 통한 구제를 희구하는 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말법이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이나 깨달음이 없는 세상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민간신앙이 된 것입니다.

명부전에 있는 열 명의 대왕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대왕은 염라대왕閻羅大王입니다.
염마閻魔가 중국인에 의해 그 이름이 염라閻羅로 바뀐 것입니다.
열 명의 지옥 왕들 가운데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염라대왕은 죄인의 혀를 집게로 뽑는 발설拔舌 지옥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명부전冥府殿을 재미있는 곳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곳이 불교의 지옥地獄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곳에서 열 명의 대왕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악독한 놈은 죽자마자 다음 생이 결정되지만, 보통 사람의 경우 심판을 받고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일종의 중국식 조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대왕부터 일곱 째 대왕까지 그들은 각각 7일마다 죽은 영혼을 심판합니다.
이래서 49제가 생긴 것입니다.
7일마다 지옥의 대왕에게 유족들이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춰 죽은 영혼에게 유리한 심판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지옥의 대왕은 100일 후에 죽은 영혼을 심판하고, 아홉 번째 대왕은 1년 후에 심판하며, 열 번째 마지막 대왕은 3년 후에 심판을 하게 됩니다.
죽은 영혼의 다음 생은 3년에 걸친 열 번의 심판으로 결정됩니다.
유족들이 많은 제물을 절에 바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신앙에는 돈과 정성이 많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칠성각七星閣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사찰寺刹은 종합운동장과 같은 곳입니다.
칠성각은 원래 불교佛敎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도교道敎의 잔물입니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합니다.
칠성신七星神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능과 재물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여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입니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殿閣인 칠성각에 모셔진 것입니다.
어느 절에 가면 칠성각 대신에 삼신각三神閣이 있는데, 이것 역시 민간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사례입니다.

나한전羅漢殿 벽면에는 신선이 장식으로 그려져 있어 도교의 또 다른 영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도교, 민간신앙과 혼합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