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당정치 실록 1권
연시중 지음, 김윤철 엮음 / 지와사랑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장면 정권의 붕괴 원인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장면 정권은 혼란은 일시적인 현상이라면서 좀더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지만 설득력을 잃고 외면당했다.
오히려 언론으로부터 비판과 매질만 당했을 뿐이었다. 정국은 극도의 위기감에 직면했으며 군부 쿠데타 설까지 유포되고 있었지만, 정부는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5·16쿠데타를 당하고 말았다.
실로 어처구니없이 민주당 정권은 단명으로 끝나버렸다.

장면 정권의 실각은 한 정당 혹은 한 개인의 단순한 정치적 실각에 그쳤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정치적 의미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장면 정권 몰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으나 장면 정권 자체의 성격과 정치적 및 경제적 측면 그리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그 원인들을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장면은 사실 정권을 담당할 만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여기서 역사적 배경이란 반식민지 독립운동의 혁혁한 경력을 말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반제국주의 투쟁경력을 가졌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장면은 이 같은 점을 결여하고 있어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을 만한 정신적 권위를 지니지 못했다.

장면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참모진도 대부분 일제하의 관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런 점은 신생국가에 있어 초기 정치 지도층은 반식민 투쟁자들 가운데서 추대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면의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온후하고 신사풍의 인격자였으나, 후진국 혼란기의 정치 지도자로서는 매우 적합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그는 너무 우유부단했고 결단력과 포용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집권 후 민주당 구파의 이탈을 막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도 자파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 원내 안정 세력 확보에 급급했다.
그의 과단성 없는 성격은 위기에 대한 처리나 관리능력에서 거의 무능하게 나타났다.
당시 내각 사무처에서 8개 대학의 3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3.7%만이 장면 정권을 지지했을 뿐 51.5%는 사태를 기다려 보겠다는 태도로 나타났다.
장면 정권은 시민혁명이라는 물굽이에 비해 후속 조치가 미흡했고, 국민의 기대심리에 전혀 부응치 못했다.
왜 국민의 요구가 폭발하는가?
왜 자유가 범람하는가?
왜 혁신계가 도전하고 과격한 학생운동이 일어나는가 하는 데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이에 적당한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장면은 혼란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인식했으며, 야기되는 문제들을 역사적 안목에서 보고 대처해야 했는데 그럴 만한 경륜과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민주당은 훈련과 규율을 통한 정신적 응결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지도체제는 극도로 문란했으며, 분파작용이 심하게 나타나도 이를 통제하고 내부적으로 단결을 공고히 할 만한 지도력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장면 정권의 실체였다. 이런 집단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돌릴 에너지가 나올 리 없었고, 혼란만 거듭하자 종국엔 불명예스런 실격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을 고찰해 보면 첫째, 민주당은 혁명 주체가 아니라 남의 힘을 빌어서 집권했기 때문에 이들은 통치행사에서 혁명세력과 국민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따라서 외압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소신껏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
필요할 때에 강경한 조치를 결행하지 못한 것은 이에 연유된 것이다.
차기벽 교수가 지적했듯이 8·15해방 후의 비극상은 한국을 해방시키는 데 일치하지 못한 데 있었던 것처럼 4·19혁명의 미완성과 민주당 정권 단명의 비극은 혁명세력과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할 세력이 일치하지 못한 데 있었다.

다음에는 이데올로기의 결여를 꼽을 수 있다. 민주당은 반독재 투쟁과 내각책임제 실현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내세워 국민의 포용과 지지를 구해 왔다.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가 실현된 마당에 다음으로 국민에게 제시할 비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면서 다음 단계로 인도해 갈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고, 국민은 이념의 지향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민주당에 대해 기대심리의 좌절을 맛보았다.

집권당이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끌어갈 이데올로기가 빈곤하면 자연 국민의 지지를 잃고 집권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민주당이 집권하게 된 데는 학생들의 세력만이 아니라 교직자를 포함한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 그리고 변화를 원했던 일반 서민들의 지지까지 힘입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 희망적인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혼란만 심화되자 이들은 장면 정권에 등을 돌리고 오히려 비판세력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혹자는 민주당의 경제개발 제일주의를 내세워 변호할는지 모르나, 이 정책 또한 민주당 정권이 의욕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설정했던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서 취해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내각책임제하에서의 행정권 약화도 장면 정권의 몰락의 원인인데, 내각책임제는 본시 입법과 행정의 권력통합과 조화를 그 이상으로 한다. 엄격한 삼권분립에 입각한 대통령 중심제보다도 입법부와 행정부의 유기적인 긴밀한 유대를 바탕으로 효율적인 정책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각이 의회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을 때, 또는 국무총리가 의회를 조종할 때 가능하다.
반대로 국무총리가 자기의 의향대로 의회를 이끌지 못하거나 혹은 내각이 의회의 신임을 받지 못할 때는 행정권은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고 정국은 안정을 잃게 된다.
장면 정권의 경우는 불행하게도 후자에 해당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구파(신민당) 소장파의 도전에 봉착해서 의회 내 안정 세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함으로써 강력한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만일 장면이 대통령 중심제하에서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직에 있었다면 그토록 의회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신경 쓸 것 없이 소신대로 정책을 수행하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민주당은 반독재를 위해 내각책임제를 이상으로 내세웠지만, 혁명 후 폭발하는 난제를 해결해야 할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내각책임제가 과연 적합했느냐 하는 의문마저 제기된다.

아무튼 장면 정권으로서는 내각책임제하에서 일차적으로 의회 내에 안정 세력을 구축하는 데 역점을 둘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는 집권 9개월 동안 세 번이나 개각하게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장면 국무총리가 의회에 안정 세력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고심했던가를 입증해 준다.
2개월 단명의 각료진을 이끌고 어떻게 강력한 행정력을 구사할 수 있으며, 정책의 일관성과 정국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겠는가.
행정력의 약화는 그에 반비례하여 사회혼란을 야기할 뿐이었다.

내각책임제가 권력을 분산시켜 독재와 장기집권을 막고 의회와 내각의 유대로 효율적인 정책수행이 가능한 장점이 있는 반면, 정치수준이 낮고 역사적으로 혼란기를 극복해야 할 상황에서는 자칫 무력하게 허물어지는 최악의 단점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은 내각책임제를 금과옥조로 주장하고 실현시켰지만, 그 제도가 가진 최악의 취약성 때문에 무너지는 결과를 맞아야 했다.

다음으로 장면 정권의 몰락의 원인은 군부에 대한 통솔이 소홀했던 데 있었다.
어떤 형태의 정부이건 새 정부가 수립되어 일차적으로 파악하고 수행할 가장 중요한 업무는 무력을 가진 군부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는 일이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군부와 정보를 교환할 적절한 채널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또한 통제할 만한 기능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국방장관을 임명할 때부터 군부를 장악하고 작전을 수행하는 측면보다는 신파와 구파 그리고 소장파 사이의 각료직 안배의 측면에서 장관직을 배려했다.
장면 정권은 군부 내의 사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다만 각군 참모도 총장에게만 모든 것을 의지했던 형편이었다.

한편 군부는 장면 정권의 감군정책과 군부숙청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감군과 숙청은 하위 장교의 진급과 직결되어 있었다.
장면은 7·29총선 유세 때 병력을 6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감군하겠다고 공약했었다.
병력감축은 장교들이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감축시킴으로써 그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장면 정권의 감군계획은 20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줄여 심각성이 다소 완화되는 듯했으나, 국회에서 군부의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했을 때 군부의 불만은 대단했다.

민주당 정권이 군을 다루는 데 있어 범한 큰 실수는 부패 군부의 숙청을 약속해 놓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던 점이다.
군부숙청 약속은 고위 장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또 한편으로 숙청 약속을 실행하지 않는 사실은 숙청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던 하급 장교들을 실망시켰다.
민주당 정부의 군부숙청 공약에 고무되어 하급 장교들은 상관의 비위사실을 들추어내는 과감한 행동을 취했다.
이것은 하극상의 사건을 빚어냈고 후에 5·16쿠데타와도 연결되었다.
또 군은 장면 정권의 혁신계와 급진 학생들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에 대해 굴종적인 저자세를 취하는 데도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지적해야 할 점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군 장교들과 교류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사회적 출신성분과 교육배경에 있어 양자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상류계급의 출신이 많았다.
장면 정권의 주요 멤버들의 58%가 해외에서 교육을 받았고 41%가 지주의 자제들이었다.
이에 반해 군 장교들은 대체로 농민의 자제들이었고, 5·16쿠데타 후 군정 참여자의 71%가 농촌출신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국내에서 중등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군 장교들은 능률 우선주의의 훈련을 받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명쾌한 대답과 분명한 행동을 요구받는 생활습성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를 놓고 입씨름이나 벌이는 정치인들의 비능률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일단 군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하면 그들은 정부에 대한 충성심의 갈등 같은 것은 느끼지 않게 된다.

경찰의 사기저하도 장면 정권의 몰락에 원인이 되었는데,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 자유당 정권에 협조했거나 대중의 지탄을 받던 경찰관 4,500명을 숙청했고, 2,524명의 공민권도 제한했다.
따라서 경찰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으며, 자연히 직무에 회의를 느끼고 사명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경찰은 민주당 정부에 충성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경찰은 데모 진압에 적극성을 나타내지 않았고, 시위 군중으로부터 지목받을 가능성과 정부로부터 해고당할 가능성 사이에서 적당한 처신을 취했을 뿐이었다.
1945년 미군정 때 일본 경찰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조병옥 경무부장에 의해 보호되었기 때문에 훗날 정부를 보호하고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장면 정권은 경찰의 사기와 효율성을 회복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따라서 정권을 보호하는 데 경찰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시위 군중은 이 같은 경찰의 소극적인 자세를 충분히 읽고 있었다.

또한 장면 정권 실각의 경제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민주당이 선거구호로 내걸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국민의 흉금을 울렸고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국민은 민주당이 집권하면 경제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집권 후 경제사정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부정축재에 대한 처벌 가능성에 따르는 조바심과 공포감으로 인해 대부분의 기업들은 새로운 투자를 꺼려했고 따라서 경제운용도 위축되었다.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은 만성적 실업문제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특히 고등인력의 실업문제는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4·19혁명 이후 관영요금의 인상으로 시중물가가 크게 올랐고, 이에 따라 민중들은 기아와 빈궁으로 고통을 받았다.
경제지표상의 거의 모든 지표가 1960년, 1961년 두 해에 최하를 기록했다.
물가는 1961년 1, 2개월 동안에 15%나 뛰었고, 1960년의 실업률은 24%에 달했다.

장면 정권의 경제시책들 가운데 국민의 신망을 잃게 한 것은 환율변경과 미국 원조의 사용에 대한 감독과 검사를 받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500 대 1의 환율이 650 대 1로 변경되었으며, 1,000 대 1로 바뀌었다가 한 달 만에 1,300 대 1로 평가 절하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면 정권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남한의 민중들과 혁신세력들은 남북의 경제 합작과 문화교류, 나아가 민족의 통일에 의해서만이 남한에서의 민족경제와 민족문화를 복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큰 폭의 환율변경은 한국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환율 현실화의 압력이 있었으나 이를 묵살해 왔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제공한 원조자금의 지출에 대한 감독도 거부했었다.
이에 비해 장면 정권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승낙했다.
당시 미국의 원조는 한국 정부 예산의 52%나 되었다.
그러므로 원조액 지출의 감독은 한국 정부 예산지출의 52%에 대한 미국의 감독과 검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국민은 장면 정권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데 대한 불만이 컸다.
이를 장면 정권의 허약성으로 생각하고 비판을 퍼부었다.
혁신계와 극렬 학생들은 장면 정권의 굴복을 ‘국가적 수치’, ‘반동 정치인의 민족배신 행위’, ‘한국의 미국 시장화’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장면 정권을 공격했다.

또 한 가지 민주당 정부의 경제시책을 어렵게 만든 것이 식량문제였다.
1961년 봄에 접어들면서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보릿고개를 넘어가기까지에는 약 130만 가구가 정부의 구호미를 필요로 했다.
장면 정권에게는 어느 하나라도 난제가 아닌 것이 없었다.

민주당 정부는 1961년 2월 종합적인 경제 타개책의 하나로 유효수요를 늘여 경기를 활성화시키려고 이른바 미국의 뉴딜정책과 같은 국토개발사업의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안은 총 연인원 4천5백만 명에 3천만 달러를 투입하여 관개시설, 토목공사, 조림, 댐 건설 등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5·16쿠데타로 중단되었으며 5개년 경제개발 계획도 불발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1962년 군사정부에 의한 5개년 계획의 근간이 되었다.

여하간 만성적인 경기침체, 실업률의 증가, 환율변경, 식량기근, 정치자금과 관련된 경제운용 등은 “못살겠다 갈아보자” 하던 민주당 정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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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학의 정준영의 북 카페에 출연하여 한 이야기입니다

1.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과학자였는가 하는 시각에 대해서?
<모나리자>의 미소에 대한 수수께끼만큼이나 레오나르도가 수수께끼의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 진상을 밝히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최후의 만찬>은 구설수에 오른 작품으로 그 작품의 이면에는 숨겨둔 진실이 있다는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많은 가설들은 가설들로만 존재할 뿐 레오나르도를 설명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고 그가 천재였다는 점만을 부각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로서 그가 발명한 것들이 너무 방대하고 엄청나서 혹시 가짜일 수도 있다는 의심에서 그 내용을 증명해 보이는 과정에서 그의 참모습이 밝혀진 것이라고 봅니다. 결과는 과연 그는 위대한 과학자였구나 하는 것입니다.

2.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동시대 인물과 비교하면?
레오나르도를 이해하기 위한 동시대 인물로는 미켈란젤로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레오나르도만큼 큰 인물을 그에 버금가는 큰 인물과 비교해야지 그보다 못한 많은 사람들을 언급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두 거봉입니다. 이 산에서 보면 저 산이 커 보이고 저 산에서 보면 이 산이 커 보이지만, 과학을 제외한 미술에서 보면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높이가 같은 두 산입니다. 다만 미켈란젤로가 더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그가 당대에 인기 있는 작가였던 반면 레오나르도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돌이켜보면 레오나르도가 미술가로서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이 그로 하여금 방향을 돌려 과학에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오늘 방송대학에서도 그를 과학자로 조명하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날의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손수 악기를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는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으며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겼는데, 이는 과학자의 태도에 합당하다고 봅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중세의 어두운 도덕관에 젖어 있었고, 명성이 레오나르도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아 많은 돈을 벌었지만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에 빠지는 것을 죄라고 여겨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던 던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했기 때문에 일찍이 자신이 속했던 상류사회를 벗어났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기독교관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는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스스로 염세주의의 짐을 졌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도 같았습니다.

두 사람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레오나르도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이었고, 미켈란젤로는 변혁을 두려워한 과거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해나갔습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발명가로서 분주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체를 기계에 비유해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많은 글로 남겼습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의 사상에 심취해서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업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업에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늘 작품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습니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 것은 어쩌면 당연해보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닫힌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생활상은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많은 편지와 시를 남겼어도 그것들이 철학적인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을 아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레오나르도가 미켈란젤로보다 나이가 23살이나 많다보니 레오나르도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 미켈란젤로는 아직 미술계에 발을 내딛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피렌체에서 인정받지 못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피렌체에 돌아와 잠시 머문 적은 있지만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그곳에 뼈를 묻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와 로마에서 주로 활약했으므로 두 사람의 삶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겹치는 때가 별로 없어 두 사람을 한 환경 안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공존하여 유럽 전역에 두 개의 산자락으로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독보적인 존재로 한 사람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두 거인이 함께 존재한 것은 역사에 유익합니다. 두 사람은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되어 500년을 존속했습니다. 과거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경외하는 미켈란젤로의 진지함이 레오나르도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과학에 근거해서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려 한 레오나르도의 행위가 미켈란젤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줍니다. 근대가 요구한 것은 둘 모두였습니다. 두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물질문명의 발전만이 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성찰하고 부덕한 행동을 금하는 데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오늘날의 미술에도 이런 보완이 필요합니다.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하는 유물론적 경향에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사변적인 점이 결여되어 있고, 반면 지나치게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에는 물질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르네상스 패러다임은 이제 와서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패러다임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활약을 통해서 르네상스의 교훈을 얻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입니다.

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공학자가 되 계기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레오나르도가 빈치의 작은 마을에서 번화한 도시 피렌체로 간 것은 18살 경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그가 받은 교육은 읽고 쓰기, 문법과 셈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교육은 동네 성당의 신부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철자가 불규칙해 읽기에 서툴렀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고전을 읽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마흔이 넘어서야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도나텔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도제생활을 시작했는데 큰 작업장을 갖고 있던 베로키오는 회화, 조각 외에도 싼 것 비싼 것 가리지 않고 모든 장식품의 주문을 받았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배우고 조수로 활동한 기간은 12년이나 됩니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수학한 미술가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보티첼리도 포함됩니다. 레오나르도는 서른 살에 도제생활을 마치고 마스터로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감이 없어 여전히 베로키오의 조수로 그를 도왔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를 통해 수도회의 주문을 받아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는데, 거의 2.5m의 정사각형 크기로 수십 명이 등장하는 스케일이 큰 그림이었다. 화가들이 성모 마리아를 그릴 때 다리를 벌린 자세로 옥좌에 앉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는 두 무릎을 모은 채 섬세하고도 여성적인 자세로 표현했으며 이는 후대 화가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제단화를 2-3년 사이에 그려주고 돈 대신에 땅을 받기로 했지만 미완성으로 남겼습니다. 전통 도상을 따르지 않은 미완성의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성모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주변의 공간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은 장면으로 보이며, 불필요한 상황의 세밀한 묘사를 생략했고 세 가지 예물 중 유황과 몰약을 바치는 것으로 제한했습니다. 이것 외에 성서가 언급한 내용에 관한 상징물이 이 작품에는 없습니다. 교회를 장식하는 종교화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서의 내용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레오나르도가 그런 목적으로 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 대한 그의 해석은 교회의 입장과 사뭇 달랐습니다. 화면 상단에 말 탄 사람들이 서로 살상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어 고대세계의 혼돈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기를란다요와 보티첼리가 감동을 받았고 특히 라파엘로가 영감을 받아 이런 요소를 프레스코화를 그릴 때 응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거의 완성단계에까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완성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 바사리는 그가 “변덕스럽고 불안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신학적으로 문제가 너무 난해하여 자신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레오나르도가 공학자 또는 우리가 아는 과학자의 길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은 서른한 살 때에 밀라노로 가면서 부터였습니다. 피렌체에서 화가로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만약을 가정해본다면, 그가 피렌체에서 회화에 대한 일감을 많이 받았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과학자로서의 그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밀라노는 터키족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침략을 받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무기를 개발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군수사업은 오랫동안 밀라노의 주력 산업이었으므로 그가 밀라노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한 것은 당연해보입니다. 밀라노 거리에는 수십 개의 무기판매점이 있었으나 이웃나라들과 터키에 비하면 무기사업은 열등한 편이었습니다.

밀라노로 갈 때 레오나르도는 최고 권력자에게 줄 편지를 소지했는데, 12개의 항목으로 된 편지에는
1. 공격뿐 아니라 화력에도 방어가 되는 운반 가능한 다리.
2.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물을 말리는 방법, 다리 외에도 도로포장, 사다리 올리기 등 다양한 기계.
3. 제방이 높고 장소나 지역이 험준해 기존의 방법으로 폭격이 가능하지 않을 때 폭격하는 새로운 방법.
4. 돌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박격포.
5. 전투가 바다에서 벌어질 경우에 대비해서 강한 대포, 발연, 화약을 물리칠 수 있는 배.
6. 소리를 내지 않고 통로와 비밀 지하터널을 파고, 강 밑으로도 터널을 파는 방법.
7. 약점이 없는 덮개가 있는 수송수단.
8. 대규모의 사석포, 박격포, 불덩이를 투사하는 기구.
9. 사석포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대형 투석기 외에도 공격, 방어용의 다양한 기구.
10. 평화로운 시기에 물을 이동하는 방법.
11. 대리석, 청동, 테라코타를 이용하여 어떤 인물이라도 조각으로 제작할 수 있다.
12. 군주의 부친을 기념하여 말탄 모습을 대규모의 청동 말로 제작할 수 있다.

그의 편지가 군주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과학에 근거하여 각종 무기와 공격과 방어를 겸하는 기구들을 무수히 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군부의 공학자처럼 이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동갑내기로 밀라노 군주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13년 혹은 14년 섬기게 됩니다. 레오나르도가 루도비코와 가까워진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한 여인 세실리아 갈레라니의 초상을 그린 뒤부터였습니다.

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학문적 관심에 관해 말씀해주십시오.
레오나르도에게는 유머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왜 아이들이 못생겼는데 네 그림에서는 아름답게 묘사되었느냐고 묻자 “그림은 낮에 그렸지만 아이들은 밤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는 그가 사고에 있어 매우 융통성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기타와 비슷한 14-17세기의 현악기 류트lute를 배웠는데, 파티를 좋아하고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류트와 비슷한 악기를 은으로 제작했는데, 말 머리의 형상이었고 강력한 하모니와 완전한 음을 냈습니다. 발명가 외에도 음악에 재능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류트를 노래 반주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악기는 후세 화가들에 의해서 천사가 사용하는 악기로 그림에 등장합니다. 그는 그 밖에도 아쿠스틱 악기들을 발명했으며, 비올라, 녹음기, 북과 키보드가 있는 종을 발명했고, 바이올린도 발명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악보를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악보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했습니다. 그가 쓴 악보는 현존하지 않지만 즉흥적 작곡가였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최초로 옵스쿠라를 이용하여 드로잉한 것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옵스쿠라는 어두운 방이나 상자의 벽에 작은 구멍을 내 빛을 통해 바깥 이미지를 벽에 거구로 투시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레오나르도가 이런 장치를 발명하여 드로잉에 이용했는데 이는 카메라의 원리로 훗날 카메라의 발명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과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베로키오의 문하에 있을 때부터였습니다. 당시에 도제들에게 손으로 하는 일과 병행해서 기하학, 원근법, 해부학의 초보적인 지식이 교수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이 명장이고 군인을 훈련시킨다”고 보았고 “훈련에만 집착하고 과학이 없으면 조종 장치나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선원과도 같아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결코 알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정밀한 자연과학으로 보고 또한 모든 학문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학문은 비인격적인 데 반해 회화는 개인 및 개인의 타고난 재능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화가에게는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시인의 천재성에 필적할 만한 재능까지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로 전해온 “회화는 말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회화”라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예술 사이의 서열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회화의 결점이라면 시 역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점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의 노트북을 보면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데,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가운데 의사이면서 철학자, 지리학자, 수학자인 파올로 델 포조 토스카넬 리가 적혀 있고, 피렌체에서 산수를 가르치는 베네데토의 이름도 있어 그가 그들의 강의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심이 다양했고, 과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강둑을 따라 정돈된 이상적인 도시로 구상했는데, 노트북에 의하면 도시를 5천 채의 집이 있는 마을 다섯 개로 구획하고 각 마을에 3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도시를 계획했습니다. 그는 수로에 의한 십자형의 도시로 구상하면서 수로가 운하 역할을 하고, 정원에 물을 대며, 풍차칸과 수문으로 거리의 먼지를 닦아내게 했습니다. 건물의 외관을 높이고 거리의 폭을 넓게 해서 가능한 한 많은 빛이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며 굴뚝을 지붕보다 높게 만들어서 연기가 위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로를 따라서 하수도를 만들어 사용한 물이 주거지역에서 흘러나가게 했습니다. 노트북에는 건물 내부에 화장실이 넉넉해야 하고, 걸터앉는 시트를 현대화하여 회전문처럼 360도 회전해야 하며, 천장에 많은 구멍을 내 환기가 잘 되게 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5.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체를 해부했다더군요.
레오나르도가 해부학적 드로잉을 처음 그린 것이 1490년경 그가 38살 때였습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건축에 관한 책을 읽고 나름대로 공부해온 그는 건축물을 유기체에 비유하여 잘못된 부분을 병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만의 표현이 아니라 비트루비우스가 건축물을 의인화한 이래 일부 건축가들이 건축물 기둥을 사람의 갈비뼈, 좌우익부를 팔에, 앱스(건물의 끝)를 머리에 비유했습니다. 그가 건축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에 해부학적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일찍이 해부학에 관심을 기울여 그가 남긴 드로잉들을 보면 남자누드를 그린 데서 인체의 모든 부분을 관찰했음을 알 수 있고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 구조를 상세하게 묘사했음을 봅니다. 그러나 해부학적 드로잉이 38살 때에 그려진 것으로 봐서 건축물에 대한 연구가 인체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인간이 세계의 모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체의 기하를 우주의 일체와 완전함에 적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점차 대지 자체가 인간의 이미지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6.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science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철학, 종교, 예술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과학은 어떤 가정 하에서 일정한 인식목적과 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지식을 체계화하는 것 아닙니까? 지식이란 knowledge로서 knowing하는 것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란 호기심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에게는 호기심이 있었고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알려고 했으며 그런 것들을 노트북에 기록했습니다. 이는 과학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레오나르도에게 자연은 실험실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 바라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과학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는 퇴적작용으로 생긴 산에서 조개껍질과 해초화석을 발견하고 바다가 한때 대지를 덮은 적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작은 구멍을 낸 종이를 벽에 대고 광선의 경로를 시위했으며, 어둠 속에서 횃불을 빠르게 움직여 불의 선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류트의 줄이 진동할 때는 이중으로 보이는 것이나 탁상에 칼을 꽂아놓고 탁상에 진동이 생기게 하여 칼이 두 개로 보이는 환영을 보여주면서 눈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대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함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눈을 ‘영혼의 창문’으로 보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눈에서 발하는 미립자들에 의해 영상이 생긴다고 보았지만 레오나르도는 눈이 발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광선을 받아들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눈을 관찰한 그는 렌즈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눈이 이미지를 거꾸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입체영상의 원리, 즉 3차원 입체의 지각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한 순간에 빛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된다고 믿었지만 그는 빛이 지나간다고 보고 빛의 속도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으며 빛이 어떻게 발산하는가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진동을 떨림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보다 한 세기 이전에 이런 근본적인 법칙을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해 “모든 자연적 현상은 가장 짧은 가능한 수단에 의해 나타난다”고 적었습니다. 당시 레오나르도가 과학에서 거둔 결실은 컸습니다. 그는 과거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들에 호기심을 갖고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레오나르도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이라면 현존하는 방대한 양의 그에 관한 책과 그에 대한 연구이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를 화제로 나누는 이야기가 바로 유산입니다. 왜 우리가 그의 생애를 기억하고 분석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인데, 한 마디로 실용주의 태도입니다. 앞서 언급한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기존의 교리에 동조하지 않음으로써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그 그림이 미완성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여 인류에게 유익한 환경에 되게 했습니다. 인체의 해부를 통해 질병을 알아내고 질병을 방지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 이 모든 것에는 실용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인류의 안녕과 번영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의 모든 과학적 업적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인물이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뼈를 묻고 오늘날 무덤조차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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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MBC-TV 문화산책에서 다룬 주제입니다.
그동안 다섯 차례 집으로 와서 녹화했는데, 오늘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성관’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녹화는 다섯 번 했지만 낮 3시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이라서 한 번도 본 적은 없습니다. 시청자들의 미술 이해에 도움이 되기 위해 PD가 집으로 오면 기꺼이 응해주고 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성관
1. 상징으로서의 누드
클림트는 누드를 인생을 표현하는 고상한 상징물로 보았다.
1916년작 <죽음과 삶>에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의 누드가 밀집하게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삶의 상징한다.
이에 반해 왼편에 해골은 죽음의 상징물로 대조가 된다.
죽음과 삶 사이에 공간이 있지만 죽음은 삶 가까이에 있다.
1903년작 <희망 I>에서는 임산부 누드와 해골을 병치함으로써 탄생과 고통, 번뇌, 그리고 죽음을 상징했다.
새 생명의 잉태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곧 죽음의 위협을 받고 죽음과 연결됨을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곧 사망했으므로 그런 주제의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1905년작 <여자의 세 시기>를 예로 들면 그는 여자의 일생을 아이, 그 아이를 낳은 젊은 여인, 그리고 바짝 마르고 축 늘어진 모습의 늙은이로 연령으로 셋으로 상징했다.
관능적인 매력이 있는 젊은 여자와 대조되게 늙은이는 절망적인 모습이며 몸을 옆으로 돌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수치심마저 느끼는 모습이다.
늙은이는 그의 작품에서 고독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에게 누드는 자유와 평화의 여신을 의미했고 무엇보다도 에로스 자체였다.
그에게 누드는 성적 대상이면서 또한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상징주의 요소가 농후한 건 인체를 표현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889년작 <흐르는 물>을 예로 들면 여성의 누드를 활처럼 휘어지게 그렸는데, 중력에 의해 우주 공간에 떠있는 모습니다.
그는 누드를 흐르는 물로 상징했다.
<행복의 열망>과 <망자들의 행렬>에서도 보듯 그는 여성의 누드를 허공에 헤엄치듯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으며 이런 식으로 누드를 공간에 구성한 화가가 과거에 없었다.
무중력 공간을 떠다니는 여성 누드들은 고통 받는 나약한 인류가 구원을 염원하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여성 누드에 대한 다양한 상징은 1902년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베토벤 프리즈>에 잘 나타나 있다.
아르누보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벽화에서 클림트는 여성의 누드를 통해 질병, 광기, 죽음, 정욕, 음탕, 무절제를 상징했다.
이 작품에서 여성은 추하고 공격적이며 냉정하다.
여성에게 위협적 특성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클림트에게 여성은 변신을 꾀하는 신화적인 인물이며, 마녀이고, 인어이며, 선녀 같은 동물이고, 또한 세련된 아름다움을 갖춘 여인이다.
이에 비해 남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려는 도덕적인 순례자의 모습이며 구원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받기를 바라는 존재이다.

2. 남성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로서의 여성
클림트는 여성을 남성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이성으로 보았다.
처녀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꿈과 환상에 도취된 감성적으로 민감한 존재인 동시에, 요염한 제스처로 남성의 정신에 깊게 파고드는 동물적 감각이 농후한 존재였다.
클림트는 성적 충동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여성을 묘사했으며, 자위행위에 가까운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것은 마치 몰래 훔쳐보는 장면처럼 관람자에게 호기심에 대한 만족과 성적 자극을 제공한다.

클림트는 남성과 여성을 서로 즐거움을 나누는 성적 파트너로 묘사했다.
행위에 대한 묘사가 노골적이지만 사랑에 도취된 남성과 여성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의 유명한 1907-08년작 <키스>는 사랑을 이상화한 가장 우아하고 화려하며 애욕주의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그는 금을 사용하여 종교화의 성상과도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다.
아르누보의 장식적 요소가 <키스>를 더욱 미화시킨다.
남성의 의상에는 네모난 장식으로 여성의 의상에는 타원형 장식을 사용하면서 두 의상이 한데 어우러지게 하여 남성과 여성이 하나의 몸으로 융합되었다.
오른팔로 남성의 목을 감은 여성의 손가락의 구부러짐, 여성의 머리와 턱을 쥔 남성의 손가락에 나타난 선은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아르누보의 특징이다.
캐리커처를 그릴 때의 힘찬 선의 효과가 <키스>에서 두드러진 요소로 작용한다.
캐리커처는 과장하다는 뜻으로 특징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데 적절한 방법이다.

3. 클림트의 초상화는 당시 빈의 남성과 여성이 요구하는 미의 구현이다.
1900년 전후에 빈의 부유층은 자신들의 초상화를 거실에 거는 것이 유행이었다.
사실주의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클림트는 실제 묘사에 충실하면서도 모델의 성격을 얼굴 표정에서 강력하게 드러낸다.
물감을 엷게 사용하는 건 캔버스에 물감이 촉촉이 젖어드는 데서 감성적 느낌이 생기기 때문이다.
배경은 주로 장식적이며 모델을 미화하는 데 보조적인 역할을 하지만 개성을 강렬하게 드러낼 때는 배경을 단색으로 처리했다.
배경과 모델의 극적인 색의 대조를 통해 관람자의 시선이 모델에 모아지게 한 것이다.
여인의 오만함을 강조할 때는 실제 인물의 크기로 그리면서 모델이 관람자를 비스듬히 바라보도록 구성했다.
여성의 의상의 가장자리를 명환한 선으로 처리하지 않고 색을 문질러서 불분명하게 한 것은 꿈속의 이미지처럼 황홀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현란한 장식과 색채는 빈 여성들의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욕망을 채워주기 위함이고 이는 또한 빈 남성들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점이기도 하다.
1907년에 그린 <아델레의 초상>에는 아르누보 특유의 곡선, 삼각형, 사각형, 눈동자 문양 등 다양한 패턴이 나타나 있다.
그가 비잔틴 황금모자이크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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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10월 2일>] 뒤샹과 친구들
김광우 / 미술문화
"예술과 사물 간에 만리장성은 없다"







 


프랑스의 화가ㆍ조각가 마르셀 뒤샹이 1968년 10월 2일 81세로 사망했다. 현대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 단일 현대미술 작품으로 가장 많이 논의된 것이 뒤샹의 <샘>(1917)이다. 남자 화장실에 가면 반드시 있게 되어있는, 변기 제조회사에서 대량 생산된 기성제품(레디메이드ㆍready-made)인 소변기 하나를 뒤집어놓고 R. Mutt(바보얼간이라는 뜻)라고 서명한 뒤샹의 작품이 바로 <샘>이다.
진중권은 <미학 오디세이> 2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샘>이 다른 변기들과 달리 예술작품인 까닭은 무엇인가? …뒤샹은 과연 무엇을 창조한 걸까? 그것은 바로 '코드(code)', 즉 하나의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관습이다." 뒤샹은 수천년 동안 지속됐던, '눈의 즐거움'에 봉사하는 미술이라는 관습을 부정하고, 과연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가는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의문을 던졌던 것이다. 다시 진중권의 표현을 빌리면 뒤샹으로부터 "예술과 사물 사이에 만리장성은 없다."
또 다른 뒤샹의 유명한 작품은 (1919).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다 코 밑에는 콧수염을, 턱 밑에는 염소수염 같은 걸 그려넣었다. 이래놓고 뒤샹이 붙인 기묘한 작품 제목은, 프랑스어 발음대로 읽으면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는 말이 된다.
뒤샹은 이런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반예술의 다다이스트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는 평생 "예술만이 한 인간이 진정한 개인으로서 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활동"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재미 미술평론가 김광우가 쓴 <뒤샹과 친구들>은 1915년 이후 주로 뉴욕에 거주했던 뒤샹의 활동과 브르통, 아폴리네르 등 수많은 예술인들과의 교유를 중심으로 20세기 미술사를 조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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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훔치지 않겠어요


요즘 스코틀랜드에 소재하는 캠프힐 루돌프 슈타이너 학교의 치료교육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장애자들이 크리스마스를 장식하기 위해 줄을 지어 자신들의 촛불에 불을 붙이는 의식을 행하는 장면을 보고,
유태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빈에서 개업을 하던 의사 칼 쾨니히는 감동을 받아 자신의 남은 생애를 장애들을 위한 커다란 불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1940년 그는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에 캠프힐 공동체, 혹은 마을을 형성하고 뜻을 같이 하는 지인들과 함께 장애자들을 위한 특수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교육이념과 교과과정은 이미 독일에 설립된 발도르프 학교의 것을 따르고, 또한 인지학에 바탕을 둔 루돌프 슈타이너의 교육철학을 따랐습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점은 그 학교의 사례 연구 중에서 제가 느낀 바를 전하려는 것입니다.
어릴 때 와서 함께 기숙하며 교육을 받은 장애자는 성인이 되면 학교를 떠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가능한 한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이 캠프힐 학교의 목표이니까요.
성인이 되어 학교를 떠날 때가 되면 학생들은 안절부절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혼자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지요.
한 사내가 졸업한 뒤 머잖은 마을에 아파트를 얻고 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는 정부에서 얻어줍니다.

지금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상점에서 창문을 닦고 돈을 세는 일을 하면서 용돈을 벌고 있습니다.
손님들이 없을 때는 부산하게 돌아다니면 안 되고 가만히 앉아서 손님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디스코텍에 가자고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그의 아파트로 와서 마리화나를 주어 함께 핀 적도 있고, 술을 가져다주어 함께 마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화나를 피고 어지러움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그 뒤로는 그것을 피우지 않습니다.

그가 적은 글 가운데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처음 마을로 와서 다른 상점에서 일할 때,
훔친 일로 경찰이 오고 그 상점에서 해직되었습니다.
그는 적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해직한 것을 옳았다. 다시는 훔치지 않겠다. 경찰이 오고 소란스러워지며, 영창에 갇히는 것이 싫다. 이런 일이 정말이지 싫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말하는 것이 비장애자들인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훔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훔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오고 소란스러워지며, 영창에 갇히는 것이 싫어서 훔치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 줄 압니다.
다만 다수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의 대화 가운데 자신의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반지를 우연히 길에서 주웠을 때,
그 반지가 있어도 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겠느냐는 도덕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반지를 옆으로 돌리면, 자신을 투명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은행에 가서 돈을 들고 나와도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는데,
그 반지의 효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 적어도 한 번은 그 반지의 효력을 사용해보지 않을까요?
은행으로 가던, 보석을 파는 곳으로 가던, 아니면 붕어빵 아줌마에게로 가던 ...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그 장애자의 말처럼
경찰이 오고 소란스러워지며, 영창에 갇히는 것이 싫어서가 아닐까요?
사람들의 질타를 받는 것이 싫어서가 아닐까요?

그런데 아무도 모른다면,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면,
그래도 우리는 도덕적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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