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예수는 과연 누구일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이 물음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알아봐야 할 주제이지만 여기서 간략한 답을 먼저 찾아보자.
그는 산타클로스처럼 가공의 인물도 아니고 상징주의자들의 인격화된 신화적 인물도 아니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사도 바울에게서 들을 수 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여인에게서 나고 율법 아래 놓였던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는 모든 유대인들의 자식과 마찬가지로 태어난 지 여드레 후에 할례를 받았으며 아주 흔한 이름인 여호수아로 불리었다.


그의 청소년기는 베일에 싸여 있다.
그래서 유언비어 같은 가설들이 전해졌다.
그가 장사꾼들을 따라 영국까지 갔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인도로 가서 불교 교리와 요가를 몸소 익혔다는 주장도 있다.
그가 십자가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요가법으로 살아남아 인도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는 주장도 있다.


예수는 누구일까?
복음서 저자들은 한결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자연히 우리는 무엇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도록 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누가복음서에 유일하게 어린 시절의 기록이 있는데 예수가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이다.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관례에 따르면 열두 살의 어린이는 율법과 예배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글쓴이).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누가복음서 2:41-50】


유월절이 되면 면적이 약 30만 평 되는 예루살렘 성내 전체가 북새통을 이룬다.
유대의 각 지역뿐 아니라 국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유월절에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망국의 한을 푼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는 순례자들의 행렬로 파도를 이루며, 그들 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예루살렘의 거리들은 아주 비좁아서 흔히 미아들이 속출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잃어버린 줄 알고 몹시 낙담했다가 사흘 후 성전에서 아들을 발견하자 매우 기뻤다.
그러나 열두 살 난 아들의 말은 아주 뜻밖이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누가는 예수를 감히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는 조숙한 소년으로 묘사하여 경건함과 지혜가 이미 어린 소년에게 깃들어 있었으며, 그가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정해져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를 끝으로 이후 약 20년에 걸친 예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글을 쓴 누가마저도 이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그 무렵 유대에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헤롯 대왕이 B.C. 4년에 사망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세 아들이 유대를 분할하여 다스렸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에 터전을 마련하고 유대, 이두매아, 사마리아를 다스렸으며, 안디바는 갈릴리와 요르단 동편 베레아를, 빌립은 다마스커스와 레바논에 접경을 둔 게네사렛 호수(갈릴리 호수) 북부와 북동부를 다스렸다.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베들레헴 주변의 사내아이를 죽인 헤롯은 B.C. 4년에 사망한 헤롯 대왕을 가리키며 그 이후에 나오는 헤롯은 아들 안디바를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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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예수의 성장배경은 어떠했을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기록했으며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밤나무골 용식이, 만수의 아들 용팔이 식으로 부르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야고보를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마리아는 야고보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예수의 호칭은 그가 나사렛에서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예수 당시 사람들은 그를 ‘나사렛 예수’라 불렀으며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마태와 누가는 나사렛을 큰 동네처럼 기술했지만, 나사렛은 갈릴리 남부 산간지대의 그리 경사지지 않은 언덕 위에 있는 해발 380m의 조그만 마을이다.
나사렛은 구약성서에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지만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가운데 하나로 B.C. 2000년경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다.


예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예수가 바로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분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자 나다나엘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복음서 1:46】


이렇듯 나사렛은 베들레헴처럼 유대의 왕이 나실 곳으로 예언된 마을도 아니고 예루살렘처럼 경건화 된 곳도 아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촌락이다.
나다나엘의 말처럼 그야말로 특별히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는 나사렛이 바로 예수가 성장한 고향이었다.


갈릴리 지방은 오래된 주거지역이다.
비가 적당히 내려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며, 갈릴리 호수에는 물고기가 많아 사람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4km이며 둘레는 약 50km이고 넓이는 약 170km2 나 된다.
호수의 북쪽 헤르몬 산으로부터 흘러온 물이 갈릴리 호수를 이루며, 호숫물은 남쪽으로 흘러 요단강을 거쳐 사해로 빠진다.
호수는 고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작은 하프 모양의 악기처럼 생겼는데, 양손으로 줄을 뜯어 연주하는 그 악기를 헤브라이어로 ‘긴노르(Kinnor)’라고 부른다.
호수의 모양이 긴노르처럼 생겼다고 해서 구약시대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긴네렛 호수라고 불렀고 예수 당시에는 게네사렛 호수로 불렸다.
복음서에 나오는 게네사렛 호수가 바로 이 갈릴리 호수이다.


《유대 고대사》의 저자 요세푸스는 갈릴리의 비옥함과 아름다움을 칭찬해마지 않았다.
그는 갈릴리에는 모든 종류의 동물과 식물이 있다고 하면서 특히 게네사렛 호수 주변의 온화한 기온을 지적했다.
오래 전부터 대지주들이 소작인들을 시켜 농사를 지었고 부유한 이방인들도 이곳으로 이주해와 대지주가 되었다.
갈릴리의 대지주들이 농부와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부렸으므로 그들이 대지주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이 예수의 설교에서 발견된다.
갈릴리라는 말은 ‘민중들의 지방’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이 국가로 형성되기 전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엔 갈릴리를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 불렀다(마태복음서 4:15).
유대 지역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배타적이라고 여겼지만 갈릴리 사람들의 신앙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신앙에 비해 오히려 순수한 편이었다.


갈릴리의 산간지대에 위치한 나사렛은 예수 조상대부터 살던 마을이다.
예수는 가축을 기르는 우리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보잘것없는 촌락 나사렛에서 성장했다.
나사렛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수태했음을 알려주었다는 집이 있는데 그곳에는 오늘날 ‘마리아 수태고지 교회’가 있다.
예수는 적어도 여섯 남매와 함께 나사렛에서 성장했다.
결혼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여러 누이들 외에도 네 형제들의 이름이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마태복음서 13:55-56】


예수가 처형된 후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된 야고보, 요셉의 헬라화된 이름인 요세, 신약성서 유다서의 저자로 믿어지는 유다, 이름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는 시몬이 예수의 형제들이다.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조상의 이름에서 딴 것이며 요세(Joses)와 예수(Jesus)는 헤브라이어를 그리스어로 부른 이름이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건축업자가 아니라 목재를 다루는 목수였다.
165년에 순교한 유스티누스는 요셉이 목재로 된 농기구나 쟁기, 멍에 등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예수가 청년이었을 때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불리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직업도 목수였다(마가복음서 6:3).


나사렛에 보존되어 있는 예수가 생존했던 당시의 서민주택을 보면, 흰 석회를 바른 골방에 창문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예수가 살던 집도 그와 같은 골방이었을 것이다.
당시 갈릴리 목수들의 대부분이 품팔이꾼이었듯이 예수도 일감을 찾아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며 노동을 해서 홀어머니 마리아를 부양하는 가난한 생활을 했다.


나사렛에는 불구자와 병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낮에는 무척 덥고 밤에는 비교적 추운 동네라서 동풍이 부는 계절에는 폐렴환자가 급증하며, 이질도 가끔 발생하고 말라리아 병이 유행하기도 했다.
복음서에 언급되는 고열병 환자와 귀신들린 자는 말라리아 환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는 귀신들린 자와 갖가지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병자들을 낫게 했다.


나사렛에서 성장하는 소년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이라고는 회당에서 행해지는 구약성서에 관한 가르침이 전부였다.
예수는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배웠다.
그가 회당에서 강론을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읽을 줄 알았고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쓸 줄도 알았다.
그가 글을 써서 제자들에게 준 적은 없었지만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언가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요한복음서 8:6, 8:8).
그가 구약성서를 읽은 것으로 보아 헤브라이어를 알고 있었으며 일상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갈릴리가 헬레니즘 지방에 근접해 있으므로 예수와 제자들은 그리스어도 알았거나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예수는 예언자들 가운데 이사야를 가장 존경했다.
그는 이사야서를 가장 많이 인용했으며, 이사야의 말씀에 관하여 가르치기를 즐겨했다.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펴서 읽은 적도 있었다(누가복음서 4:16-17).
그는 헬레니즘과 로마의 풍습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들로부터는 영향 받은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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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예수는 언제 어디에서 활동했을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예수는 삼십대 초반이던 27년 또는 28년 초봄에 고향 나사렛을 떠나 유대 광야로 갔다.
청년 예수의 행적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당시 유대교의 주류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약한 반면, 그들에게 반감을 가졌던 비주류 종교운동의 지도자들은 주로 광야에서 활동했다.
세례자 요한 역시 광야에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광야로 간 예수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한동안 요한의 제자가 되어 광야에 있었다.


맑고 푸른 갈릴리 호수에서 흘러나온 물은 요단강을 이루며 유대 광야 옆을 흐른다.
그 물로 예수는 세례를 받았다.
세례예식은 네 복음서 저자들이 모두 빠지지 않고 기록하였듯이 예수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


세례자 요한이 분봉왕 안디바에 의해 처형당하자 예수는 광야가 자신의 사역지로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요한과 같은 최후를 맞고 싶지 않았던 예수는 갈릴리를 자신의 사역 지역으로 생각하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에 비해 교육을 받지 못했고 고집이 셌다.
이들은 유대 사람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으나 훨씬 순수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
예수는 가버나움에 거처를 정하고 갈릴리에 있는 동네들을 방문하면서 설교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었다.
당시 갈릴리는 안디바의 통치영역이었다.
예수는 안디바가 새로 건설한 도시에는 가지 않았으며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가버나움, 벳새다, 거라사 등 주로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는 회당이나 산과 들에서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도 병자들을 직접 고쳐주는 것도 그의 사역에 포함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를 지상에 이룩하는 것을 자신의 사역 목적으로 삼았다.
그가 병자들을 고쳤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갈릴리 전역에 퍼졌으며, 연일 병자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가르침을 듣고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직접 보려고 오는 사람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갔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가르쳤으며,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여 낡은 율법으로 인한 속박에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였다.


예수가 얼마 동안 활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예수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세 번 갔다고 기록했는데 그렇다면 그 기간은 3년이 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그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간 것을 한 차례만 언급했으므로 그것은 1년에 해당한다.
예수의 활동은 27년 또는 28년 이른 봄부터 시작되어 29년 또는 30년 4월 7일에 마감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가 안디바가 단장한 성전을 비유로 들어 말한 적이 있는데 안디바가 성전을 건축한 시기가 27년과 28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들(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복음서 2:19-20】


예수는 30년 4월초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신의 사역을 마감했다.
그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 자신이 생명이며 또한 부활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으며,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아 하나님의 집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되돌려놓았다.
이는 마치 유대교에 대한 정결예식과도 같았다.
이로써 그는 지상에서의 과업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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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미술 500년 - 모방에서 창조로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전리품이 된 미술품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나폴레옹의 동생 루시앵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대사로 파견되어 1801년 아란후에즈 조약을 체결한 날 루시앵은 형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에 조약을 체결한 대가로 레티로의 화랑으로부터 훌륭한 그림 20점을 받았다면서, 이것들이 자신에게는 십만 개의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하다고 적었다.
미술품 수집을 즐긴 루시앵은 자신의 고문이자 화가인 기욤 르티에르에게 스페인 화가의 작품 70점을 구입하도록 지시했다.
루시앵이 받은 20점과 구입한 70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중에는 무리요의 작품이 3점, 모로의 작품이 1점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부채를 든 여인>302이 포함되어 있었다.
루시앵은 1801년 11월 파리로 돌아왔고 작품들은 루시앵이 새로 장만한 거처인 브리엔 호텔에 장식되었다.
루시앵은 신분이 낮은 여인과 결혼한 것 때문에 형의 노여움을 사 로마에 정착하여 평민으로 살았다.
소장품은 모두 1803년 말에 로마로 우송되어 루시앵 저택에 장식되었다가 1816년 런던에서 팔렸다.

1808년 5월 9일 나폴레옹은 나폴리의 왕으로 있던 형 조제프를 스페인의 새 국왕으로 세우고 나폴리 왕국은 자신의 처남인 뮈라에게 통치권을 주었다.
조제프의 즉위가 알려지면서 스페인은 전면적인 봉기에 휩싸였으며, 주동자들의 요청으로 영국 총리 캐닝이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5월 말 1개 사단을 거느린 뒤퐁 장군에게 장 안도쉬 쥐노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의 지원을 받아 안달루시아를 거쳐 카디스를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1808년 6월 10일 조제프가 새 국왕으로 마드리드에 입성했지만 이튿날 뒤퐁 장군은 바일렌에서 스페인군을 맞아 치욕적인 항복을 했으며 나폴레옹 대군이 무적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조제프는 나폴리를 버리고 스페인으로 온 것을 후회했다.
몇 주 만에 스페인은 불에 타고 피로 물들었다.
마드리드에서의 소요는 1808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나폴레옹은 12월 4일 몸소 마드리드로 가서 형 조제프를 왕위에 앉혔다.
3주 후 나폴레옹 뮤지엄의 디렉터, 도미니크-비방 드농이 마드리드로 와서 파리의 뮤지엄으로 가지고 갈 회화작품 20점을 선정했다.
그는 과거의 궁정 소장품, 고야의 <옷을 걸친 마하>266와 <벌거벗은 마하>196가 포함된 고도이의 소장품, 귀족의 소장품들 가운데서 선정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농이 회화작품을 가져갈 것이라면서 형이 포획한 작품들이 많은 줄 알며 그것들 중 파리의 뮤지엄에는 없는 걸작들로 50점을 자신에게 선물로 보내주면 이에 상당하는 것들을 나중에 보상하겠다고 적었다.
조제프가 나폴레옹에게 보내는 회화작품들은 1812년에야 파리로 운반되었다.
조제프는 50점 외에 250점을 더 보냈는데, 이것들을 본 드농은 매우 실망하면서 나폴레옹 뮤지엄에 전시할 만한 것은 여섯 점에 불과하다며 조제프가 형편없는 것들만 보냈다고 투덜거렸다.
나폴레옹 뮤지엄에 전시할 만한 것들에는 수르바란의 <소틸로에서의 크리스천과 무어인의 전투>303와 무리요의 <로마 제국 지방 집정관의 꿈>304이 포함되었다.

나폴레옹에게 300점의 회화작품을 보낸 지 몇 주 후 조제프는 아주 많은 짐을 꾸리고 1813년 6월 마드리드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그의 짐 속에는 165점의 회화작품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무리요와 리베라의 훌륭한 작품들과 벨라스케스의 <세비야의 물장수>164도 있었다.
이 작품들은 조제프가 그의 아내와 살던 마드리드의 레알 궁전을 장식했던 것들로 나폴레옹에게도 주지 않고 그가 아꼈던 것들이다.
조제프의 행렬은 장군 위고(빅토르 위고의 아버지)의 인솔로 파리로 향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영국의 명장 아서 웰레슬리 웰링턴 장군의 군대를 만나 회화작품들을 포획 당했다.
페르디난도 7세는 자신의 왕위를 복위시켜준 웰링턴에게 그것들을 선물로 주었고, 이 작품들은 현재까지 웰링턴의 저택에 소장되어 있다.

회화작품에 대한 조제프의 집착은 아주 컸으며 걸작을 수집하려고 노력하는 나폴레옹과 드농의 눈을 속이고 은밀히 보관하다가 파리로 운반한 것들이 몇 점 있다.
그가 특별히 아끼던 것들로 이것들에는 당시에는 딴 화가의 작품으로 인식되었으나 훗날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확인된 3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들 중 일부는 스페인에 남겨두었지만 일부는 그가 미국의 필라델피아로 망명할 때 가지고 갔으며 이 작품들을 전시에 종종 빌려주었다.
1841년 그는 미국을 떠나 피렌체로 가서 1844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 갖고 있던 작품들 중에는 무리요와 벨라스케스의 걸작들이 있었고,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묘사한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305와, 이것을 작은 크기로 모사한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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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 에어로빅이나 두뇌 훈련은 나이를 불문하고 뇌에 효과적이다 
 

『아이브레인 iBrain』(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디지털 이주민의 뇌는 정보처리에 시간이 더 걸리지만, 이들의 신경회로는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며, 기억과 학습 증진에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정보를 익숙한 맥락과 연결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다. 이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정보 저장에 유리한 복잡한 정신적인 형판mental templates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형판들이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정보를 파악하게 하여 학습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나이가 들어서도 뇌는 유연하며 평생에 걸쳐 가소적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나이 든 사람의 뇌도 선택적인 작업을 위해 재편될 수 있으며 재훈련될 수 있다. 신경과학자들이 fMRI를 이용해 시각장애인들의 시각피질 활성화를 연구한 결과, 시각피질은 전체 뇌의 35%를 차지하는데, 시각장애인들의 시각피질이 촉각 기능의 강화를 위해 사용되고 있음을 밝혀냈다. 이들의 눈이 외부로부터 아무런 자극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뇌가 이 영역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이들의 경우 촉각 자극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청각이나 시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다른 감각에 특별한 능력을 갖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처럼 뇌는 어떤 공간도 낭비하지 않는다.

일종의 뇌 운동으로 기억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퀴즈게임이나 이와 유사한 연습인 멘탈 에어로빅mental aerobics는 뇌세포 내 수상돌기를 자극해 뇌의 정보 처리를 효율적이게 하며 노화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멘탈 에어로빅을 통한 두뇌 훈련이 인지 능력을 증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으로부터 뇌의 퇴화를 지연시킨다. 중년층 이상의 성인 3천여 명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기억하는 법과 생각하는 법을 1주일에 1시간씩 10차례 훈련시켰더니 인지능력이 증대되었으며, 훈련한 지 5년이 지난 후에도 그 효과가 남아있었다.

미시간 대학의 최근 연구는 나이 든 사람의 뇌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직면하면, 전두엽의 새로운 영역이 서서히 활성화됨을 밝혀냈다. 18-30세 사람들의 뇌 활동 패턴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60세 이상의 사람들과 비교한 결과, 피실험자들이 쉬운 과제를 수행할 때는 두 그룹의 뇌 활동 패턴이 각 연령층에 걸쳐 비슷하게 나타났지만,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을 때 노년층의 뇌에서는 젊은이들이 쓰지 않는 전두엽의 영역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멘탈 에어로빅이나 두뇌 훈련은 나이를 불문하고 뇌에 효과적이다. 퍼즐을 풀든, 악기를 배우든, 책을 읽든, 게임을 하든 정신적 자극을 주는 과제를 했을 때 그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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