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와 인간의 뇌 격차에 대한 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살아있는 뇌 세포와 실리콘 회로를 연결하는 뉴로칩neurochip을 개발했다. 칩의 반도체 속의 전류는 신경세포 내의 전류를 기록하여 살아있는 세포와 기계가 직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한다.

과학자들은 최근에 간질 환자를 훈련시켜 생각만으로 컴퓨터의 커서를 움직이게 했다. 뇌수술을 통해 이 환자의 뇌 표면에 자그마한 신호감지 전극을 부착했으며, 이것으로 전극에 연결된 컴퓨터 커서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쉬운 건 아니었지만, 훈련을 거듭함으로써 단지 생각만으로 커서 움직임의 70%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뇌와 컴퓨터 사이의 이런 인터페이스에 대한 연구가 급속하게 발달함으로써 신경 손상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바야흐로 생각으로 전자기기를 직접 통제하는 포스트 키보드 시대post-keyboard age의 도래가 멀지 않게 된 것이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기술은 뇌의 생리적, 심리학적 전기적 신호를 전환하여 컴퓨터 커서나 키보드 같은 출력장치와, 심지어는 의족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 이런 기술은 원래 운동신경을 심하게 손상당한 사람을 돕기 위해 개발되었는데, 이에 의해서 뇌 연구가 급속히 도약하게 된 것이다. 이 기술을 이용하여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통제하여 손으로 쓰는 속도의 절반 정도인 1분에 15자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실리콘 기반 기술이 다음 몇 년 안에 빠르게 발전하면, 생각하는 것만으로 보통 말하는 정도의 속도로 컴퓨터에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뉴로칩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디지털로 연결되기 위해 뇌수술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뉴로칩을 이식하기보다는 EEG 전극을 두피 표면에 부착하여 신경활동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피 표면을 읽는 기기에 피실험자가 연결되면, 연구자는 fMRI를 이용하여 대뇌의 혈액의 흐름을 측정하고 순간마다의 결과를 피실험자에게 제공한다. 이에 따라서 피실험자는 자신의 뇌파 출력을 조정하여 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컴퓨터 게임도 할 수 있게 된다.

뇌에 정보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초음파 파동신호를 이용한 기술이 개발 중에 있다. 미 국방성 과학자 스투 울프Stu Wolf는 이를 이용하여 몇 십 년 내에 텔레파시로 네트워크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컴퓨터 헤어밴드를 착용하여 마음속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마음에 직접 전달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신경과학자들은 뇌 기능을 측정하고 자극하기 위한 방법을 정교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 뇌 활동을 추적하기 위한 방법은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의 뇌 영역과 신경회로를 모니터링하는 것이다. 가장 작은 전극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여러 세포들이 모인 곳에 자극을 주면 단 한 번의 전기 자극만으로도 수많은 세포들을 흥분시킬 수 있다.

머지않아 우리는 뇌의 각 세포들의 신경활동을 자극하고 모니터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미 레이저로 감광성 단백질을 1000분의 1초 단위로 분석하는 새로운 기기를 개발했다. 이로써 우리는 뇌 세포가 생물학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속도를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기술을 바탕으로 레이저를 이용하여 각 뇌신경 세포들을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에는 건망증 정도는 레이저 광선의 스위치를 켜기만 해도 간단히 치료될 것이다. 또한 원격조정을 통해 신경회로를 교정하고 점검할 수 있는 날도 곧 도래할 것이다.

컴퓨터가 더 빠르고 더 효율적으로 진화하여 사이버 뇌가 일반화되면, 세대 간의 뇌 격차로 인한 문제보다는 컴퓨터와 인간의 뇌 격차에 대한 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는 이미 오랫동안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의 인기 있는 테마였다. 현재 우리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만든 가상세계는 미래의 뇌를 갖게 될 미래 세대에게는 연구하고 휴식하며 창조하는 실제의 작업 공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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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 혹은 들라크루아파와 앵그르파


마네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기 전, 프랑스 화단과 영국 화단의 모습을 잠시 살펴봅니다. 프랑스 화단은 들라크루아파와 앵그르파로 나눠져서 양파간의 투쟁이 매우 심했습니다. 이런 양상은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의 대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들라크루아파는 낭만주의를 앵그르파는 신고전주의를 추구했습니다.

낭만주의Romanticism라는 말은 르네상스시대부터 사용된 말로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 국경에 있는 로마냐Romagna(로마냐는 로마Roma에서 온 말), 즉 라틴어의 방언 로망스어로 쓰인 이야기라는 의미이면서 공상적 혹은 경이적이란 뜻도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1798-1863)의 작품에서 공상적 혹은 경이적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는 과거의 어떤 고전주의보다도 더욱 엄격하고 냉철하며 계획적이고, 종래의 어떤 고전주의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형식을 압축하여 직선적인 것과 구성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을 추구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전형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을 강조했습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1780-1867)의 작품에서 이런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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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의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 Odalisque with Slave>, 1842, 유화, 76.2-105,4cm.

앵그르의 양식은 프랑스 전통 회화의 양식을 따른 것이지만, 그 내용은 애욕적인 요소, 즉 현대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누드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줍니다. 오달리스크란 말은 술탄의 하렘에 사는 첩을 나타내는 터키어가 프랑스에서 와전된 것입니다. 오달리스크는 우리말로 후궁입니다. 왕이 찾기 전까지는 할 일 없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냅니다. 프랑스 화가들이 오달리스크의 섹시한 모습을 즐겨 그렸는데, 당시 이국풍의 회화가 프랑스인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렘에는 300여 개의 방과 46개의 화장실, 8개의 목욕탕과 지하 감옥이 남아있어 관광객들이 관람합니다.

들라크루아의 <사자 사냥 The Lion Hunt>, 1861, 유화ㅡ 76.5-98.4cm.

들라크루아의 양식은 현대적이지만, 그 내용은 고전적입니다. 앵그르의 화법은 곧 종식되지만, 들라크루아의 화법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거쳐 오늘날에도 표현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대 회화는 들라크루아파의 뒤를 이어 탄생한 것입니다.

도미에의 <화파들의 전쟁: 이상주의 대 사실주의 Battle of the Schools: Idealism vs. Realism>, 1855, 석판화, 16-18cm.



결과적으로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 추종자들은 회화에 있어서 색과 선으로 대립했습니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불린 나폴레옹 황제 밑에서 궁정화가를 지낸 자크 루이 다비드가 앵그르의 스승이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회화의 전통을 스승으로부터 계승한 앵그르는 선을 회화의 기본요소로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드로잉을 먼저 하고 색을 선 안에 칠하는 것입니다. 반면 들라크루아는 선이 색과 색의 경계에서 절로 생기는 것으로 보고 색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색을 문질러 사용했습니다. 앵그르는 채색하기 전의 드로잉을 회화의 생명으로 여겼으며, 자신이 그릴 그림에 관한 모든 요소를 충분히 이해한 후에야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무 살 때 고유한 자신의 양식을 발견한 앵그르는 자신의 양식을 평생 바꾸지 않았으며, 드로잉은 그가 말한 ‘추상의 질’로서 선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말년에 이국적인 내용과 욕망을 자아내게 하는 교태 있는 야인의 누드를 그렸습니다.

앵그르와 마찬가지로 고전주의를 고수한 그의 위대한 적 들라크루아는 앵그르에 비해 색을 보다 자주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색의 귀재였습니다. 그는 색소를 부드럽게 하는 대신 격렬한 느낌을 주는 색을 그대로 사용했고, 마치 붓으로 색을 쓸어버리듯이 그림을 자율적으로 그렸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색의 자율성은 그를 따르던 젊은 화가들이 회화에 새로운 통로를 여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는 들라크루아의 이국풍 주제와 과격한 장면, 격렬한 감성, 그리고 바로크의 색과 자유로운 붓놀림을 통해 가능해졌다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색에 대한 그의 표현 가능성은 바로크 화가들과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의 회화에서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자율적인 색의 사용은 곧 출현할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회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빈센트 반 고흐와 폴 세잔이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스스로 ‘순수 조전주의자’라 칭하면서 ‘신고전주의자’ 앵그르와 구별했습니다. 그의 회화가 인상적인 이유는 회화적 기교 때문만이 아니라 격렬한 보색, 예를 들면 주홍색과 청록색을 사용하여 공명한 화음을 창조한 때문이고 음악에서의 스타카토처럼 색을 짧게 칠함으로써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양식을 먼저 실습한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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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의 미술읽기 개장


오늘 '광우의 미술읽기'란 방을 하나 만듭니다. 미술을 블로거들에게 보편적인 문화의 하나로 소개하고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술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면서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소위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미술을 이해시키고 가까이 접하게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여 이 방을 개설하는 것입니다. 우선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활동한 에두아르 마네와 클로드 모네를 중심으로 그들과 더불어서 파리 화단을 구성한 르누아르라든가 다양한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을 설명함으로써 블로거들이 미술에 입문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블로거들에게 이런 지식을 심어준 뒤 조금씩 추상화라든가 좀 더 설명이 요구되는 작품으로 옮겨갈 예정이며, 르네상스와 17, 18세기의 서양미술도 다룰 예정입니다. 블로거들이 열심히 따라와 준다면, 20세기 미술을 폭넓게 다룰 것이며, 또한 예술철학도 병행하여 쉽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서두의 이야기가 방대하지요? 그렇지만 공허한 말이 아니라 하려고 합니다. 다만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블로거들의 참여가 실현을 가능하게 해줄 것입니다. 올리는 글에 대한 질문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성의껏 답변해드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술을 가까이하면 삶의 풍요로워진다고 말하고 싶으며, 이 말을 블로거들이 증명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은 첫날, 제목을 ‘에두아르 마네, 부르주아의 아들 화가를 꿈꾸다’로 하겠습니다.
<오귀스트 마네 부부의 초상 Portrait of M. and Mme Auguste Manet>과 <틴토레토의 자화상 모사>를 보면, 마네가 후기르네상스 베네치아 태생의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1518-94, 본명은 Jacopo Robusti)의 양식을 익혀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네가 이십대 후반 화가를 꿈꾸며 그린 습작 정도의 수준의 그림들입니다. 앞으로 자주 언급하겠지만, 마네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노력하는 화가였습니다. 루브르 뮤지엄에 가서 대가들의 양식들을 모사하며 그들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발견한 건 서른을 갓 넘긴 후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할 수 있다고 했는데, 마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10년 이상 열심히 모방한 끝에 대가 양식들의 장점들을 취해 빛이 주는 효과를 회화에 적용했습니다. 틴토레토가 이미 모델의 얼굴에 빛의 효과를 적용할 것을 볼 수 있지요? 중요하지 않은 의상은 어둡게 해서 디테일이 나타나지 않게 하고 관람자의 시선이 모델의 얼굴에 모아지도록 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무대의 장면 같아 보이지요? 화가의 의도가 빛의 사용으로 드러나지요? 빛을 조명으로 사용하니까 모델의 얼굴이 진지하게 보이며 성격이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까?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는 파리 북쪽 교외에서 8대째 지주로 행세한 부유한 집안 출신입니다. 1814년 쉰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클레멘트는 파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지성인으로 고향 제네빌리에에서 존경받던 인물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시장으로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제네빌리에의 거리 명칭을 클레멘트로 붙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오귀스트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대를 졸업하고 한동안 법무부의 고위 공직자로 지내다 나중엔 판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완고하면서도 교양을 갖춘 볼테르주의자로 전제정치와 제국에 대한 혐오감으로 무장한 공화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주아답게 유명한 재단사가 지은 수세기 동안 달라지지 않은 전통 양복을 입었으며, 프랑스인이면 누구나 갈망하는 레종도뇌르 훈장을 상징하는 빨간 리본을 달고 다닌 멋쟁이였습니다. 오귀스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스웨덴 외교관의 딸 이제니 데시레 푸르니에와 1831년 1월 18일에 화촉을 밝혔는데, 그는 서른네 살이었고 신부는 스무 살로 열네 살이나 어렸습니다. 외제니의 아버지 푸르니에는 스톡홀름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스웨덴 왕과 친분이 두터워 외제니는 스웨덴 왕의 대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성악에 재능이 있었고 음악교육도 충분히 받았으므로 특별한 모임이 있을 때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이상은 마네의 할아버지와 부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화단의 총아로 떠오를 에두아르 마네가 태어난 건 1832년 1월 23일이었고, 태어난 곳은 파리의 센 강 남쪽에 위치한 프티소귀스탱, 지금의 보나파르트 가 5번지(사진)입니다. 에두아르 마네가 태어난 4층 건물에는 마네 가족 외에도 어린 에두아르에게 데생을 가르쳐준 외삼촌 에드몽 에두아르 푸르니에도 살고 있었습니다. 1800년에 태어난 에드몽은 에두아르가 태어날 무렵 포병대 장교로 계급이 대위였습니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대부이기도 한 에드몽을 통해 회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드몽은 주말에 에두아르와 에두아르보다 한 살 어린 외젠, 그리고 세 살 어린 귀스타브 삼형제를 미술의 성지 루브르 뮤지엄에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루브르와 뤽상부르 뮤지엄에서는 정부가 구입한 당대 미술가들의 작품이 대중에게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루브르의 푸르탈레 갤러리는 많은 스페인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했기 때문에 파리의 ‘스페인 뮤지엄’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작품들은 스페인이 동란의 소용돌이로 어수선할 때 루이 필립 왕이 스페인 미술전문가 바론 테일러를 고용해 비밀리에 구입한 것들입니다. 테일러는 백만 프랑 이상으로 4백 점 가량 구입했지만, 정작 대가들의 작품은 몇 점 안 되었습니다. 스페인 작품들은 1838년부터 대중에게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1842년에는 영국인 미술품수집가프랭크 홀 스탠디시가 죽으면서 자신이 소장했던 스페인 미술품 5백 점 가량을 프랑스 왕에게 기증했습니다. 그의 기증품에는 고야 8점, 엘 그레코 9점, 리베라 25점, 무릴로 38점을 포함해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대거 포함되었습니다. 따라서 스페인 회화는 자연히 프랑스 회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마네가 훗날 스페인 화풍을 응용해서 그림을 그린 건 당연해 보입니다.
에두아르는 열두 살 때 롤랭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로 5학년부터 가르치는 사립학교였습니다. 학생 4백 명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목요일과 일요일에만 집에 보내졌습니다. 에두아르는 입학하던 해에 5학년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해 낙제했습니다. 아들의 장래에 대한 오귀스트의 걱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두아르는 학교에서 앙토냉 프루스트와 단짝이었는데 그와 평생 우정을 나눴으며, 훗날 문화부 장관이 된 프루스트는 에두아르와의 추억을 『회고록』으로 펴냈습니다. 프루스트는 역사과목 시간에 교사가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저작물인 『백과사전』의 편집장을 맡았던 문필가이자 철학자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1713-84)의 『사교계』를 학생들에게 읽게 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디드로가 동시대 화가들을 향해 어차피 세월이 지나면 유행에 뒤질 모자를 무엇 때문에 그리느냐고 꾸짖는 대목에서 마네가 소리를 질렀다. ‘디드로도 멍청한 놈이었군. 화가는 자신이 산 시대를 증언해야 하는 거야. 유행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기가 본 것을 그려야 해’라고 말했다.”
에두아르가 학교를 졸업한 건 1848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법대에 진학해 가업을 이어주길 바랐지만 법대에 진학할 만한 성적이 못되어 강권할 수 없었습니다.
마네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해군이 될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해군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연령은 16세였습니다. 마네는 1847년 7월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마네는 1848년 12월 군사훈련 목적의 견습용 배에 승선하여 브라질의 수도 리오데자네이로로 갔습니다. 이듬해 4월, 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친 지망생들이 보는 시험에서 다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해군이 될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마네는 해군의 꿈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1849년 가을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1856년까지 6년 넘게 쿠튀르의 화실에서 수학했습니다. 프루스트는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마네는 모델에게 일주일 동안에 취해야 할 제스처를 설명하는 월요일마다 항상 말썽을 일으켰다. ... 하루는 탁자 위에 올라서서 모델들에게 화를 냈다. ‘좀 더 자유로운 포즈를 취할 수 없어요?’ 듣다 못한 한 모델이 ‘너 같은 애송이한테 매번 그런 소릴 듣기란 쉽지 않은 일이군. 그래도 내 덕택에 로마풍의 포즈를 볼 수 있는 것 아네요?’라고 대꾸했다. 마네의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여기는 로마가 아냐! 여긴 파리이고 난 로마에 갈 생각이 없어. 중요한 건 파리라고.’
... 한 번은 마네가 모델에게 일상의 옷을 입힌 채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 그때 쿠튀르 선생이 들어왔다. 선생은 남루한 옷을 걸친 모델 앞에 서서 벌컥 화를 냈다. ‘이게 누구 짓이냐?’ ‘접니다’ 하고 마네가 대답했다. '자낸가? 자넨 결국 도미에밖에는 안 되는 일문이구만’ 하고 말했다.”
쿠튀르는 마네를 풍자 삽화를 그리는 풍자만화가, 화가, 조각가 도미에Honore-Victorin Daumier(1808-79)에 비유해서 사실주의 그림이나 그리는 저급한 화가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도미에는 당대에 살던 프랑스인의 생활을 단순하고 생생한 이미지로 포착하여 기록한 시대의 증언자였습니다. 사실 쿠튀르에게 비난 받을 만큼 저급한 화가 아니라 쿠튀르보다 더 위대한 화가로 미술사에 기록된 화가입니다. 아카데미풍을 배척했다지만, 쿠튀르의 그림을 보면 고대의 역사적 장면을 재현한 것으로 구성이 새롭고 과격적이었지만 낭만주의 회화의 범주를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도미에처럼 있는 그대로의 장면, 또는 과거 화가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의 장면을 그린 건 매우 진보적인 화가의 태도였습니다. 도미의 정치풍자만화는 오늘날 시사만화의 효시입니다. 그는 정치풍자로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쿠튀르는 두 주에 한 번 화실에 와서 제자들과 대화하며 기교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드로잉을 회화의 본질로 여겼습니다. 이는 당시 파리 화단의 거물 외젠 들라크루아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들라크루아는 5층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모습을 스케치할 만한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하면 결코 기념비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쿠튀르는 “대상을 3분 동안 바라본 후에는 그것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고대 조각상을 바라보든 대가의 그림을 바라보든 대상의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 채색에서 색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가능한 한 색을 덜 섞어 사용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마네가 스승으로부터 배운 건 이것들 외에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네는 낮에는 쿠튀르의 화실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쉬스 아카데미Academie Suisse에서 모델을 그리면서 스케치를 익혔습니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문을 연 쉬스 아카데미는 모델로 활동하던 쉬스라는 사람이 문을 연 곳으로 기교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약간의 돈을 받고 모델을 그릴 수 있게 하던 곳이었습니다. 훗날 마네와 더불어 파리 화단의 주역이 될 클로드 모네가 1859년부터 이 아카데미에 왔으며, 미국 남쪽 세인트 토마스에서 파리로 이주해온 유대인 화가 카미유 피사로와 폴 세잔이 이곳에서 모델을 그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한편 마네는 두 살 연상의 피아노 선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피아노 선생 수잔의 어머니 그루테 커크는 홀랜드 남쪽 잘트봄멜 동네에 있는 커다란 고딕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수잔이 어째서 열아홉 살의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파리로 와서 혼자 살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슈만의 곡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수잔의 아파트는 쿠튀르의 화실에서 걸어갈 만한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마네는 시간이 나면 그녀의 아파트로 갔습니다. 파리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수잔이 피아노 교습을 받는 제자와 사랑에 바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수잔은 1852년 1월 29일에 마네의 아들을 낳고 이름을 레옹 에두아르 레엔호프라고 했습니다. 막 스무 살, 정확히는 스무 살하고 엿새 된 마네가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당시 미혼모가 자식을 낳는 건 예사였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구청에 출생신고를 하는 것 또한 보통이었는데, 법으로도 생부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마네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 가족과 함께 지내야 했기 때문에 수잔과 아들에 관해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사실을 안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 뻔했습니다. 수잔은 혼자 힘으로 아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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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세대들 간의 문화적 차이를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



매일 주기적으로 정신적 자극을 주는 것이 기억력과 뇌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 덕분에, 중년층과 노년층이 뇌 자극과 뉴런 보호를 위해 낱말 맞추기나 간단한 오락거리들을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동과 청소년들이 하는 인터랙티브 온라인 게임들은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갖고 있으며, 이제 동물 실험과 인간 실험을 통해 도출된 긍정적 결과를 바탕으로 베이비붐 세대와 실버 세대를 위한 게임 장르가 개발되고 있다. 이 연구는 두뇌 발달을 위한 퍼즐이나 게임의 수행이 뉴런을 강화시키고, 알츠하이머 같은 나이와 관련된 질병도 막아준다고 밝히고 있다.

뇌와 게임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게임과 퍼즐, 훈련을 통해 뇌를 자극하면 인지능력뿐 아니라 이를 통제하는 신경회로의 기능도 향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테크놀로지 기술도 신경회로의 자극에 도움을 준다. 가장 중요한 건 뇌신경망을 강화하기 위해 자극을 바꾸어주는 것이다.

유래 없는 급격한 뇌 진화라는 중요한 시점에서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들이 발전과 번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면, 서로의 지식과 체험들을 공유해야 한다. 대면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연습하고 테크놀로지 매뉴얼을 익히는 건 뇌 격차를 줄이는 중요한 방법이다. 뇌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와 실버 세대의 가치관, 기대치, 야망, 그리고 개인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기술적 지식과 사회적 지식의 수준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서 디지털 원주민이 두 개의 하위 그룹인 X세대와 밀레니엄 세대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디지털 이주민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두 개의 하위 그룹인 베이비붐 세대와 실버 세대로 구성되어 있음도 알아야 한다.

밀레니엄 세대는 1981년에서 2000년대 사이에 태어나 지금은 십대와 이십대가 되었는데, 이들은 테크놀로지 면에서 가장 뛰어난 세대이다. 밀레니엄 세대는 재정적 성공뿐만 아니라 일과 놀이의 균형을 중시한다. 1965년과 1980년대 사이에 태어난 X세대는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중반이 되었는데, 자립적이며 과감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어떤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낡은 기술을 버리듯이 과감하게 버린다. 1946년에서 1964년 사이에 태어나 현재 사십대 후반에서 육십대 중반인 베이비붐 세대는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가운데 성장했지만, 1960년대의 격변기를 겪어서 권위에 매우 도전적이다. 이들은 개인주의를 높이 평가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걸 성취하기 위해 더 오래 근무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1946년 이전에 태어난 오늘날의 실버 세대는 가장 전통적인 그룹으로 동일 직종에 오랫동안 근무하는 성향이 있다. 이들은 권위를 존중하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미숙하다.

저널리스트 캐롤 하이모위츠Carol Hymowitz는 비즈니스를 통해 다양한 세대들이 갖고 있는 문화적 차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저술했다. 그에 의하면 각 문화의 하위 그룹이 갖고 있는 가치와 기대에 따라서 경영을 다양화함으로써 다양한 세대들 간의 문화적 차이를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X세대는 웹 형식으로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는 데 익숙한 반면, 베이비붐 세대는 전통적인 교실에서 진행되는 강의 형식을 더 선호한다. X세대 중간관리자는 나이 든 동료를 존경과 예의를 갖춰 대하며, 베이비붐 세대의 동료들에 대해서는 책임감 있는 작업을 칭찬함으로써 모두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 기술에 익숙한 밀레니엄 세대와 집단적 상식에 익숙한 베이비붐 세대와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밀레니엄 세대는 대인적인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베이비붐 세대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이 같은 혁신적인 방식은 직장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용하다. 가정은 다양한 세대들의 독특한 행동양식을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는 장소이다. 디지털 원주민인 밀레니엄 세대는 조부모에게 컴퓨터나 휴대폰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사회성 기술을 지도하는 학습의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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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요가, 자기최면 등 휴식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방법들



비디오게임이나 컴퓨터 작업은 공감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뇌 영상 연구에 의하면 공감은 특별한 뇌 회로에 의해 통제된다. 이 회로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오프라인 훈련을 통해 공감과 연관된 신경회로를 강화하고 공감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다.

공감적인 역할 모델을 갖고 고통을 경험하는 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하이테크 혁명은 이런 능력을 빼앗아가고 있다.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공감적 감정을 담고 있더라도 직접 만나서 표현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명상이나 휴식은 테크놀로지와 거리를 두고 현재의 환경, 느낌, 내면적 사고와 신체적 상태에 집중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경청과 의사소통에도 도움이 되어 인간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다.

명상은 정신적 휴식을 위한 대중적 방법이다. 뇌파전위기록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들은 명상을 하는 동안과 명상이 끝난 후에 상당히 의미가 있는 뇌파의 변화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위스콘신 대학의 리처드 데이빗슨Richard Davidson 박사와 그 팀은 달라이 라마의 자문을 받아 1천 시간 이상의 명상 경험이 있는 스님들을 초청했다. 이들과 최소한의 명상 경험이 있는 학생들로 구성된 통제집단을 비교했다. 신경과학자들은 fMRI를 사용해 피실험자들이 명상을 하고 있는 동안 뇌의 활성화 패턴을 조사했다. 연구 결과가 보여준 것은 스님들의 경우 공감과 모성적 감정을 통제하는 영역인 전두엽과 편도체 사이의 신경 연결 부분이 눈에 띄게 활성화되었다. 스님의 명상 경험이 많을수록 활성화의 패턴도 더 강했다. 그 원인은 오랜 시간 동안의 명상이 이성과 감정 사이, 즉 전두엽과 편도체의 연결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명상, 요가, 자기최면 등 휴식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방법들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심장박동수와 호흡 횟수를 낮추고, 혈압을 낮추며, 근육을 이완시키고, 면역 기능을 강화하는 등 생리적인 면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방법으로 기도문과 반복적인 주문들이 사용되는데, 이는 일종의 최면 리듬과 같은 작용을 한다. 명상가들은 습관적 사념들을 관찰하고 이들을 다스리는 것을 훈련하며 신체적 감각들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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