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몇몇 화가들이 모델을 더이상 상류층 사람들에 한정하지 않고 하류층 사람들을 모델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술에서의 조용한 혁명이었습니다. 가난한 인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에서 종종 나타났으며, 회화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주요인물인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75)가 가난한 농부를 그린 그림들은 여러분에게 아주 낯익을 것입니다. 밀레는 시골 바르비종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1857년에는 <이삭줍는 사람들 The Gleaners>을 그려 농부들의 삶에 숭고함이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의 이러한 점은 1830년대와 40년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그림과 조각에 반영시킨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1808-79)와 더불어 20세기에 출현한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회화의 선조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misulmun49)에 있습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 The Gleaners>, 1857, 유화, 83-111cm.

밀레는 가난한 농부들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므로 빈센트 반 고흐는 그를 가리켜 ‘농부 화가’라고 불렀습니다.

밀레는 여인들의 얼굴이나 표정을 세밀하게 표현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손을 고 뭉툭한 형태로 묘사했습니다. 밀레 작품의 특징은 강인한 조각적 형태와 인물의 뚜렷한 윤곽입니다. 고된 노동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를 묘사하는 데 밀레를 추종할 화가는 없었습니다. 허리를 구부린 여인들의 자세는 너무 오랫동안 구부리고 일하느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보입니다. 여인들 뒤로 빛을 가득 품은 추수 장면은 흰색이 섞인 창백한 색조로 채색되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경이 보다 어둡고 침침한 색조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무거운 짐이 실린 수레와 커다란 건초더미 그리고 이삭을 줍는 여인들 앞에 놓인 한 줌의 낟알 사이에도 날카로운 대비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멀리 오른편 농장 건물 앞에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말에 타고 있습니다. 그는 이삭줍는 여인들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데, 이는 배경의 부유한 농장과 전경의 가난한 여인들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바르비종파란 명칭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속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유래했습니다. 바르비종파의 지도자는 테오도르 루소와 장 프랑수아 밀레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활동했지만, 가난을 이기지 못해 1846년 루소가 1849년에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했습니다. 많은 풍경화 화가와 동물화 화가들이 그들을 좇아 이 마을에 모여들었습니다. 이 마을에 모여든 화가들 대부분 파리 화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토대로 삼은 건 17세기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화가들의 풍경화와 동시대 영국 화가들의 풍경화였습니다. 그들은 섬세한 관찰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주제에 접근했습니다.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위풍당당한 자연의 풍경보다는 소박하고 평범한 자연의 풍경을 강조했습니다. 영국 화가 컨스터블이나 터너와는 달리 그들은 빛과 색의 효과나 대기의 변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국의 풍경화가 프랑스의 풍경화보다 훨씬 진보적이었습니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루소는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과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들을 그리면서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 반면, 밀레는 자연과 가까이 하고 사는 미천한 농부들의 고귀한 삶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바르비종파의 미술사적 의의는 순수하고 객관적인 풍경화를 프랑스의 정통 장르로 확립하는 데 이바지한 점입니다.

1850년을 전후하여, 쿠르베의 작품에서 보았듯이, 화가들은 자신을 고용한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주제를 그리는 대신, 일상 주제에서 가져온 다양한 장면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밀레는 가장 빈곤한 계층 사람들이 겪는 고된 노동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삭줍는 사람들>은 막바지에 접어든 추수의 현장을 묘사한 것으로, 화면의 배경 오른쪽에 보이는 농부들은 마무리 작업에 한창입니다. 농부들은 말을 탄 감독의 지휘 아래 곡식을 모두 수확했습니다. 짐수레는 일꾼들이 실어놓은 짐의 무게 때문에 버거워 보이고, 들판에는 몇 개의 건초가리가 세워져 있습니다. 화면 왼쪽의 건초더미 두 개는 비교적 선명하게 묘사되었으나 보다 멀리 놓인 나머지 건초더미들은 희미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이는 추수의 규모가 크다는 걸 암시하며, 올해는 풍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면 앞쪽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풍요로운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농장에 고용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인들은 지방 관청의 허가를 받아 추수가 끝난 후 들에 남아 있는 낟알들을 주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은 오로지 손으로 일일이 주워야 하는 고된 노동입니다. 게다가 먼저 추수한 사람들이 거의 모든 곡식을 수확한 뒤 그루터기만 남겼기 때문에 이 가난한 여인들의 현실은 우울하기만 합니다. 밀레는 여인들의 곤궁함을 성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삭줍는 사람들>은 그려진 그 해 1857년 살롱에 전시되면서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습니다. 1857년이라면 1848년의 프랑스 2월 혁명의 기억이 아직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184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루이 필립이 입헌 군주로 즉위했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 왕정이 무너지고 제2 공화정이 성립했습니다. 2월 혁명 중 치러진 보통선거에서 온건 공화파가 의회를 독점하자, 일부 과격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은 진압되었고, 마침내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손자인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정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이삭줍는 사람들>이 전시되었으므로 몇몇 비평가들이 이 작품을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기 위한 정치적 항의라고 해석했습니다., 2월 혁명에 대한 밀레의 시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삭줍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이 상당히 복합적이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밀레가 1852년과 53년에 그린 그림들에는 이삭줍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절적으로 묘사되었고, 행복한 표정의 어린아이들이 등장해 분위기가 밝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에는 선동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밀레의 의도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실주의가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전하려는 의도에서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밀레의 작품은 주제와 양식으로 인해 빗발치는 비난을 초래했는데, 정치적 혼란기에 영웅을 그리는 대형 캔버스에 농부들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양식적으로 그의 작업이 거칠고 완결되지 않다는 공격을 종종 받았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체로 과장되었으며, 색채는 따듯하고 순박하며 채색은 두텁게 표현되었습니다. 세밀한 부분들을 제거한 그의 양식은 훗날 신인상주의의 리더 조르주 쇠라와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하나인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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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주의는 공격적인 비이성이다
 

(여기에는 사진을 실을 수 없어 아쉽습니다. Daum '광우의 문화읽기'(misulmun49)로 가시면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홍대앞 교수곱창 1호와 3호점이 있는 골목을 지나가다 이 개를 보았습니다.

생긴 게 독특해 가까이서 보고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헌데 또 다른 사람이 이 개를 찍고 있었습니다. 그 개가 내가 찍을 땐 포즈를 취한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찍을 땐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렸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찍을 땐 얼굴을 왼쪽으로 돌렸습니다. 고놈 참.





사람들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감동을 받습니다. 쉽게 설명되는 일임에도 경험 자체를 압도적으로 느낍니다. 예를 들면 한 반에 서른 명 정도의 학생이 있다 보면 그들 가운데 생일이 같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법이나 속임수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면서 예외적인 일을 겪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맞아떨어질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서른 명이 모이면 같은 생일의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연한 사건입니다. 헌데 우리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쉽게 일어나면 미신이 생깁니다.

셰익스피어는 거짓말을 하려면 큰 거짓말을 해야 사람들이 믿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거나 사람이 구름을 타고 온다든가 죽은 사람이 하늘로 올라갔다든가 하는 거짓말을 많은 사람들이 사실인양 믿습니다.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이야기를 사실처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신화에 많습니다. 신화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만든 이야기입니다. 사실을 수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투시력이 있다거나 벽을 통과한다거나 부활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초능력의 가장 흔한 형태인 텔레파시나 예지 능력, 투시력, 염력에 대해 신뢰할 만한 증거가 분명히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진지한 고려 대상으로 삼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이성적 논쟁의 영역에서 초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중단되어야 합니다.

더러 사람들은 과학적 이론을 ‘단지 이론’일 뿐이라고 일축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단지 이론’이라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인데, 이는 과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태도입니다. 이론으로 불리는 건 사실 상당한 칭찬입니다. 이론으로 불리는 건 테스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술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때 이 이론을 테스트하면 두 가지 결과가 일어나는데, 수집한 증거가 이론을 지원하거나 아니면 반박하는 것입니다. 『양복을 입은 원시인 Caveman Logic』(2010, 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저자 행크 데이비스Hank Davis는 이론이란 주어진 증거에 부합하거나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믿음이나 감정적 이유가 아닌 ‘증거’라고 말합니다. 데이비스는 창조론creationism, 즉 지적 설계에 의해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이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믿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을 신앙주의fideism라고 합니다. 신앙을 진리 파악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데이비스는 신앙주의를 공격적인 비이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주의자들은 믿음에 대한 자신들의 진술을 정당화하려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토론도 거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니까”라는 단어를 마치 이유인 듯 말합니다. “왜?”라고 물으면 “그냥 그렇다니까”라고 대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적 인지발달상의 이러한 비이성적 시기를 지나 성장했습니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1809-82)이 제시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진화론evolution은 과학 내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이론에 속합니다. 진화론은 그대로 생물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생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론으로 격상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경험적 증거는 물론, 테스트가 가능한 방식으로 가설이 진술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한 초능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초능력에 대한 믿음이 만연해 있으며,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지능이 모자란 것도 아닙니다. 초능력에 대한 믿음이 교육 수준과 정관계에 있다는 증거가 있긴 합니다.

초능력 논쟁은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과는 달라야 합니다. 초능력의 존재 확인은 잘 정립된 경험적, 논리적 기법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과학은 가치가 배제된 사실 수집이나 증거 평가의 기법을 제공합니다. 초능력의 증명에도 천문학이나 사회학, 분자생물학에서 다루는 사례와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걸까요? 모든 사람이 규칙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테스트의 증거가 압도적으로 초능력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증거들이 상관없고, 오히려 긍정적 증거로만 채워집니다. 때문에 초능력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며 믿음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오직 한 번, 오직 한 곳에서만 일어난다는 생각은 과학에서는 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초능력에 관한 상당한 증거들의 특징입니다. 재현 가능성은 과학적 방법이란 증표인데 초능력이 여기서 면제를 받으려 합니다. 초능력의 역사는 잘못된 방법론과 노골적인 사기의 사례로 가득합니다. 만약 초능력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우리는 인간과 우주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는 소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초능력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 존재를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절대로 증거의 기준을 낮출 영역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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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의 아버지 귀스타브 쿠르베



프랑스 화단은 황제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샤를 루이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eon Bonaparte 1808-73)에 의해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최초의 프랑스 대통령이자 두 번째 프랑스 황제입니다. 프랑스 혁명을 이끈 그 유명한 나폴레옹의 조카입니다. 나폴레옹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보나파르트이므로 나폴레옹에겐 조카이자 외손자가 되기도 합니다. 나폴레옹 3세는 큰아버지의 호전적 기질을 이어받아 전쟁 일으키기를 좋아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에 대한 우리와의 인연은 그가 천주교인들의 박해를 핑계로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침범한 것입니다. 丙寅洋擾(병인양요)(1866)를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그는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1870-71)을 일으켜 전쟁에서 지고 실각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의 프랑스 영향력에 마침표를 찍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을 성립하게 만들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호전적 기질 때문에 프랑스 국민은 전쟁 비용을 혹독하게 독일에 지불해야 했지요.

전쟁으로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전 1855년, 나폴레옹 3세는 파리를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만들 계획으로 그 해에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유럽을 한 가족으로 만드는 진정한 계기”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28개국이 참여한 이 축제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참관했으며, 런던뉴스는 만국박람회 현장을 연신 삽화로 보도했습니다. 박람회장을 방문한 사람의 수가 거의 백만(935,601명)에 달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자국의 근래 화가들이 라파엘로전파Pre-Raphaelites의 양식으로 그린 그림들을 출품했는데 그러한 그림들이 파리 시민에게 소개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라파엘로전파란 말 그대로 라파엘로 이전의 회화양식을 찬양하는 화가들의 그룹을 말합니다. 그들은 르네상스 이후 회화가 퇴보했다면서 중세의 회화양식을 회복하려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중세의 회화는 대부분 낭만적이고 순진한 것이 특징입니다.


(라파엘로전파에 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바로 옆방에 같은 이름으로 방이 따로 있으니 가서 이용하세요.)


프랑스 정부는 만국박람회에 살롱 입선작들도 전시했습니다. 박람회에 출품을 신청한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 8천 점 가운데 1,872점만 심사를 거쳐 받아들여졌답니다. 그 그림 모두를 전시하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빽빽하게 진열했기 때문에 벽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요. 전시장에 들어서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걸었습니다.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는 프랑스 화단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라서 앵그르의 작품 41점, 들라크루아의 작품 35점이 살롱에서 받아들여졌지만, 귀스타브 쿠르베Gustav Courbet(1819-77)의 작품은 11점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답니다. 쿠르베는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사립 미술학원에서 회화를 배운 적이 있는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려고 파리로 갔다가 법학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하여 렘브란트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고, 베네치아 화파와 에스파냐 대가들의 양식을 연구하다가 1850년 전후에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쿠르베는 자신이 심사위원들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만만하게 출품한 <화가의 화실 The Painter's Studio>이 낙선하자 몹시 분노했습니다. 그는 이를 “프랑스 미술의 재앙”이라고까지 주장하면서 박람회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비로 별관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그가 별관에서 소개한 작품들은 <화가의 화실>을 포함하여 대부분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을 스냅사진을 찍듯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린 것들이었습니다.


017

귀스타브 쿠르베의 <화가의 화실 The Painter's Studio>, 1855, 유화, 361-597cm.

세로 3.6미터에 가로가 거의 6미터인 걸로 봐서 그가 야심을 갖고 그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 화가의 화실 내부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삶의 일상적인 장면들을 묘사한 쿠르베의 회화를 통해 화가의 화실이 대중에게 공개된 것입니다. 이건 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한꺼번에 그의 화실을 방문한 걸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따로따로 방문한 것인데, 쿠르베가 그들을 한데 모은 것입니다. 왼편을 보면 쿠르베의 고향사람들로 노동자 계급의 평범한 사람들이 있고, 오른편에는 그가 파리에 와서 알게 된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중앙에는 화가 자신 쿠르베가 있어 관람자들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쿠르베가 선호하던 모델이 누드의 모습으로 중앙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삽입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 그려서 캔버스에 삽입한 것입니다. 아직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이라서 실재의 장면을 한 번에 재현할 수가 없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고야, 드가 등의 그림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다비드의 예식을 거행하는 장면, 고야의 황제가족, 드가의 한 가족의 모습 등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은 화가가 한 번에 그린 것이 아니라 한 사람씩 따로 화실에서 그린 후 하나의 캔버스에 삽입하여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 작품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화면 오른쪽 끝에 한 남자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요. 그림의 성격상 생뚱맞지 않아요? 그가 유명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1821-67)입니다. 46세에 실어증으로 세상을 떠난 보들레르는 미술평론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미술평론가들 대부분이 시인들이었답니다. 폴 세잔의 고향친구 에밀 졸라Emile Edouard Charles Antoine Zola(1840-1903) 같은 소설가들도 있었지만. 보들레르가 어느 날 쿠르베의 화실을 방문했을 수도 있고 쿠르베가 보들레르를 방문하여 그의 모습을 그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쿠르베는 그의 모습을 여기에 삽입한 것입니다.


쿠르베는 개인전을 위한 카탈로그 서문에서 회화가 사실을 전달하는 매체임을 선언했습니다. 일종의 사실주의 선언문Realism Manifesto인 셈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더이상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 … 생동감 있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이런 내용의 글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정신의 선언이란 중요한 의미를 미술사에 남겼는데 모더니즘이 이미 도래했음을 알리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아방가르드를 ‘전위예술’이란 뜻으로 사용하는데, ‘전위’란 군대용어로 첩보병, 혹은 돌진하는 부대를 말합니다. 맨 앞에서 전투를 하는 용맹한 사람들이지요.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을 창작하겠다는 쿠르베의 선언은 매우 용맹스러워 아방가르드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방가르드 정신은 곧 순수미술,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진보주의 예술가들의 정신을 말하게 됩니다. ‘아방가르드 작품’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진보적인 그림이란 뜻입니다.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과거에서 벗어나는 과격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실주의는 화가의 의도를 배제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물을 사진을 찍듯이 그리는 것도 사실주의라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주의와는 다릅니다. 쿠르베 이전의 사실주의 그림에는 화가의 의도가 깊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석양에 말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나그네를 그린 장면의 경우, 나그네의 외로움을 석양이라는 자연의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분위기와 조화시켜 관람자가 낭만적 장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화가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쿠르베의 작품에는 그런 의도가 보이지 않고, 오로지 그러한 모습이 실제생활에 있을 뿐이라는 점만 부각됩니다. 애처로우면 애처로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삶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쿠르베의 사실주의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카메라의 눈으로 본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진을 찍듯이 그리더라도 작가의 의도가 포함되지 않을 수가 없답니다. 사진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보이려고 했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그 정도의 화가의 의도는 있게 마련입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모더니즘Modernism의 발판을 마련한 건 앵그르가 아니라 들라크루아였으며, 인상주의 회화는 들라크루아의 양식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여기에 사실주의 운동의 리더 쿠르베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보여준 돌출행동은 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 정신의 구현이라는 의미 있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회화의 목적이 더이상 이야기를 전하거나 성경의 내용, 혹은 역사적 사건들을 교육적 목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일시적 환경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임을 주장한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나 전설에서 찾을 필요가 없고,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 가운데 있는 것이며, 머릿속에서 관념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전개되는 대상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사실주의는 쿠르베에게 ‘인도주의 미술Humanitarian Art’이었으며,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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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식사를 할까?


어제, 2010년 11월 28일 일요일

카메라를 들고 홍대 앞으로 갔습니다. 제집에서 큰 길을 건너면 홍대 앞입니다. 우리집 앞마당이지요. 이곳에 산 지 10년도 더 되지만, 사진을 찍은 건 어제가 처음이었습니다. 영하 5도, 거리엔 보통 때보다 사람이 적었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식빵과 바게트를 사러 나간 것입니다.

어디서 식사를 할까? 홍대 앞에 나갈 때마다 망설여집니다. 많은 데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어느 집의 어느 음식이 어떤지 잘 압니다. 그래서 더 선택하기가 힘듭니다. 대개의 경우 즉석에서 닥치는 대로 정합니다. ‘호타루’가 눈에 띕니다. 전에 누들을 맛있게 먹은 생각이 떠올라 그곳에서 돈부리 규동, 쇠고기덮밥을 먹었습니다. 포만감이 5% 부족한 것 같아 5개가 나오는 야끼만두를 따로 주문했습니다.


8745, 8770, 8824, 8825, 8830


사진에 보이는 그 길을 죽 따라 내려가서 큰 길을 건넜습니다. 늘 가던 집, 리치몬트가 근래에 내부를 새로이 단장했습니다. 몇 안 되는 체인 중 여기가 본점입니다. 식빵은 이곳만한 데가 없어 먼 곳에 사는 지인이 오면 권하기도 하고 사주기도 합니다. 리치몬트 맞은편 코너에 여성 속옷을 파는 집이 있습니다. 마네킹에 속옷을 입혀 전시하는데 화려해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마네킹 뒤로 반사되는 건물이 오버랩되는 것이 재미있어 찰칵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리곤 리치몬트에 가서 빵을 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려면 큰 길을 건너야 합니다. 사진에서 보는 대로 화살표 방향으로 직진하여 귀가했습니다.

손이 시린 걸 보니 간만에 느끼는 추운 날씨였습니다.

이상 현장 리포트입니다.


요즘 과학 관련 책을 읽고 있는데, 책을 통해 논리적, 비판적 사고를 하게 됩니다. 이런 사고는 인문학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결국 논리적, 비판적 사고를 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과학자가 과학에 대해 많은 걸 배웠기 때문에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 대부분 회의주의자들입니다. 의심이 아주 많은 사람들입니다. 사소한 것에도 의심을 하기 때문에 제대로 알려고 무척 노력합니다. 입증될 때까지 의심을 멈추지 않습니다. 고등교육, 특히 과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믿는 것은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이 최고다”라는 신조를 갖고 있습니다. Negative mind를 갖고 있으면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코미디언 빌 메이허는 “계속 질문을 던져라. 그러지 않으면 종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많은 종교인들은 순진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담임 목사의 말을 계시처럼 떠받듭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 건 순진한 것이라기보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교육 수준이 낮은 문화에서는 의심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불신의 신호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종교 조직은 대개 신도들에게 의심을 하라고 장려하지 않습니다. 다루기 쉬운 대로 저들이 어리석기를 바랍니다.

과학 관련 책을 읽는 것은 건전한 지적 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자신이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공부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는 행위입니다. 교육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들도 잠정적 지식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전 지식이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적엔 지식이 오래가는 귀한 것인 줄 알았는데, 공부를 해보니 지식의 수명이 매우 짧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이론이 아주 빠르게 제기됩니다. 그래서 지식은 정보란 걸 알았습니다. 특히 과학적 지식은 상당히 짧게 존속하는 정보입니다. 호킹을 예로 들면 그는 블랙홀에 관해 언급하면서 빛도 그곳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헌데 얼마 후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여 빛이 천천히 가까스로 블랙홀을 빠져나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수정한 이론을 모르고 앞서 제기한 이론만을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통해 많은 과학 지식에 유통 만기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는 옳은 것, 타당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지식이 늘면 현재 ‘사실들’의 종합에 의문을 갖고 재평가하게 됩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코넬 대학의 심리학 교수 토머스 길로비치Thomas Gilovich(1954-)는 결정론적 과학과 확률적 과학을 구분했습니다. 화학, 물리학, 천문학 같은 과학은 전형적으로 물리적 세상의 여러 관계에 대해 진술합니다. 중력은 스무 번 가운데 열아홉 번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실험관에 과망간산칼륨과 글리세린을 넣었을 때 화합물이 격렬하게 반응할 확률은 95%가 아니라 ‘언제나’입니다. 이것이 결정론적 과학의 세계입니다.

대신 심리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확률적 관점을 보여줍니다. 심리학은 매우 복잡하고 다변량multivariate한, 즉 각 개체에 대한 관측값이 여러 개의 값으로 나오는 세상을 다룹니다. 『양복을 입은 원시인 Caveman Logic』(2010, 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저자이며 심리학 교수 행크 데이비스Hank Davis는 이러한 다양한 사실들을 전부 다룰 방법이 없으므로 심리학에서는 통계적 확률을 이해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합니다. 정확성을 원하면 지질학이나 화학을 공부하라는 다소 방어적인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심리학자는 가능한 한 많은 요인들을 통제하고 최선의 결과를 내려고 노력합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스키너 상자의 쥐 한 마리도 설명을 하려면 끔찍해집니다. 최선을 다해 도출해낸 결과가 스무 번 가운데 열아홉 번 정도 반복되면 성공입니다. 물리학이나 화학과는 거리가 멀지만 심리학자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연구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심리학자들의 이점으로 드러났습니다. 길로비치의 주장에 따르면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전통 자연과학은 직접적이고 결정론적인 세상을 다루기 때문에 비일상적이고 추측에 근거한 믿음 체계를 다룰 때 유용한 과학적 방법을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심리학은 비논리적인 믿음 체계를 펴가하는 적절한 논리적 틀을 제공합니다. 심리학의 세계는 흑백세계가 아닙니다.

심리학은 평균으로의 회귀, 무작위 표본 추출, 통계적 확신 구간, 우연의 역할 등을 핵심적으로 다루는데, 이는 심리학의 어수선한 본질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논쟁적 주장에 직면했을 때에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행크 데이비스는 이러한 기법을 배운다고 해서 그것을 진실로 적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과학적 방법에 근거한 세밀한 교육이라 해도 비이성적 믿음에 완벽한 면역을 제공하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과학교육은 도움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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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단에 영향을 끼친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과 윌리엄 터너


마네는 스물세 살 때인 1855년에 뤽상부르 뮤지엄에 걸려 있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배>를 모사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화실에 가기 전 친구가 마네에게 들라크루아는 차가운 분이니까 조심하라고 일러주었지만, 노트르담 드 로레트에 위치한 화실로 찾아 갔을 때 들라크루아는 예상과 달리 마네를 환대해주었습니다. 마네는 방문을 마치고 화실 문을 나서며 친구에게 “들라크루아가 차가운 게 아니라 그분의 원칙이 차가운 것 같군”이라고 말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마네가 다녀간 후 그의 회화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마네가 1859년 살롱의 심사위원들로부터 처음 모욕적 평가를 받았을 때 마네를 옹호한 유일한 사람이 들라크루아였습니다. 들라크루아는 1831년에 왕으로부터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857년에는 아카데미 멤버로 선출되었습니다. 마네의 동시대 젊은 화가들이 가장 좋아한 화가가 바로 들라크루아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젊은 화가들은 영국의 존 컨스터블과 윌리엄 터너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009, 010, 011

존 컨스터블의 <건초마차 The Haywain>, 1821, 유화, 130.5-185.5cm.

이 작품은 컨스터블의 대표작 중 하나로 1821년 로열 아카데미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그때 이 작품의 제목은 <풍경화: 정오>였습니다. 정오의 빛을 나타내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빛의 운동과 맑게 개인 하늘의 뜬구름을 극적으로 묘사하여 상황에 대한 화가의 순간적 느낌을 즉석에서 표현했습니다. 그가 야외에서 직접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직접적인 자연의 묘사가 프랑스 화가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824년 파리의 살롱에서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프랑스의 젊은 화가들에게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했습니다. 컨스터블은 건물, 나무, 물, 마차 등을 홀랜드 대가들의 양식으로 그렸지만, 생동감 있는 색의 사용만큼은 그의 독특한 방법이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그의 회화에서 감명을 받아 “컨스터블은 우리 미술의 아버지다”라고 극찬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회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색조는 컨스터블의 회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

존 컨스터블은 1776년 6월 11일 영국 서포크의 이스트 버골트애서 태어났습니다. 주로 풍경화를 그린 그는 색을 토막내는 기법으로 빛의 역할을 묘사하여 프랑스 화가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컨스터블은 “회화는 과학이고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했으며, “빛과 그늘은 정지하는 법이 없다”면서 빛과 그늘이 상황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반사와 굴절이 모든 색을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달라지게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 화가들은 <건초마차 The Haywain>를 보면서 빛이 사물에 닿아 일으키는 작용에 대한 관찰이 그의 그림을 활기 있고 신선하게 만든다는 걸 알았습니다. 빛에 반짝이는 순수 색들의 질감을 프랑스 화가들은 ‘컨스터블의 눈Constable;s Snow’이라고 불렀습니다. 컨스터블은 곧 출현할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에 앞서 빛과 그늘에 대한 조직적인 질을 색으로 적절하게 나타내지는 못했더라도 그러한 관심을 이미 구름의 깊이, 태양의 섬광, 물의 잔물결과 반사, 그리고 나뭇잎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나타냈습니다.


016, 013

윌리엄 터너의 <불타는 국회의사당 The Burning of the Houses of Parliament>, 1834-35, 유화, 92.7-123.2cm.

윌리엄 터너의 <눈보라 속의 기선 Steamboat in a Snowstorm>, 1842, 유화, 91-122cm.

이 작품은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면 눈보라 속의 기선을 그린 것이라고 단번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상화되었습니다. 추상이란 대상을 단순하게 상징적으로 묘사한다는 뜻입니다.

터너는 회화에 이야기나 에피소드를 삽입하지 않았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과 강을 주제로 그리면서 배 위에서 그림을 완성했고, 화실에서 색상을 더 보태지 않았습니다. 터너를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근래의 정황으로 보면 표현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타당할 것이며, 그의 회화에서는 추상의 의지가 발견됩니다.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

윌리엄 터너는 1775년 4월 23일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서른세 살에 아카데미의 교수가 된 그는 작품이 잘 팔려 경제적으로 성공했으며, 여행을 자주 하고 나이가 들면서부터 회화가 달라졌습니다.

터너는 배와 바다, 연기를 내며 달리는 기차, 다리와 산을 여러 점 그렸고, 특히 폭설, 폭우, 폭풍 혹은 화염을 시적인 색을 사용하여 개인적인 느낌으로 표현하면서 자연에 의해 발생하는 인간의 재난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불타는 국회의사당 The Burning of the Houses of Parliament>은 런던의 국회의사당이 화재로 전소되는 장면을 보고 그린 것으로 실제장면을 긴급하게 묘사하게 위해 붓보다는 나이프를 사용했으며, 강 건너에서 화염에 싸인 건물을 실감나게 캔버스에 재현했습니다. <눈보라 속의 기선 Steamboat in a Snowstorm>도 마찬가지로 실제장면을 직접 바라보며 그린 것으로 터너는 뱃사람에게 부탁하여 네 시간 동안 바다 위에서 눈보라를 관망했고, “나는 폭풍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생존하게 된다면 그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다”고 훗날 회상했습니다.

<빛과 색(괴테의 이론>(1843)에서 터너는 괴테의 색 이론을 적용하여 빛이 사물에 일으키는 색을 캔버스에 나타냈는데, 그의 그림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뉴욕에서 출현할 추상표현주의 회화처럼 나타났습니다. 그가 타계했을 때 화실에는 1만9천 점의 드로잉이 있어 회화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말해주었습니다.


19세기 중반, 회화에 있어서 빛의 역할, 즉 빛의 효과를 얼마나 회화적으로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진보적인 영국 화가와 프랑스 화가들의 화두였습니다. 햇빛은 사물에 닿으면 산산이 부서집니다.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하기 어려울뿐더러 색을 아주 잘게 토막 내어 사용하지 않으면 빛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색들을 혼합해서 사용하게 되고 톡톡 끊어서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후에 출현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감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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