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주의는 공격적인 비이성이다
(여기에는 사진을 실을 수 없어 아쉽습니다. Daum '광우의 문화읽기'(misulmun49)로 가시면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홍대앞 교수곱창 1호와 3호점이 있는 골목을 지나가다 이 개를 보았습니다.
생긴 게 독특해 가까이서 보고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헌데 또 다른 사람이 이 개를 찍고 있었습니다. 그 개가 내가 찍을 땐 포즈를 취한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찍을 땐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렸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찍을 땐 얼굴을 왼쪽으로 돌렸습니다. 고놈 참.
사람들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감동을 받습니다. 쉽게 설명되는 일임에도 경험 자체를 압도적으로 느낍니다. 예를 들면 한 반에 서른 명 정도의 학생이 있다 보면 그들 가운데 생일이 같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법이나 속임수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면서 예외적인 일을 겪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맞아떨어질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서른 명이 모이면 같은 생일의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연한 사건입니다. 헌데 우리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쉽게 일어나면 미신이 생깁니다.
셰익스피어는 거짓말을 하려면 큰 거짓말을 해야 사람들이 믿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거나 사람이 구름을 타고 온다든가 죽은 사람이 하늘로 올라갔다든가 하는 거짓말을 많은 사람들이 사실인양 믿습니다.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이야기를 사실처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신화에 많습니다. 신화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만든 이야기입니다. 사실을 수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투시력이 있다거나 벽을 통과한다거나 부활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초능력의 가장 흔한 형태인 텔레파시나 예지 능력, 투시력, 염력에 대해 신뢰할 만한 증거가 분명히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진지한 고려 대상으로 삼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이성적 논쟁의 영역에서 초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중단되어야 합니다.
더러 사람들은 과학적 이론을 ‘단지 이론’일 뿐이라고 일축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단지 이론’이라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인데, 이는 과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태도입니다. 이론으로 불리는 건 사실 상당한 칭찬입니다. 이론으로 불리는 건 테스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술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때 이 이론을 테스트하면 두 가지 결과가 일어나는데, 수집한 증거가 이론을 지원하거나 아니면 반박하는 것입니다. 『양복을 입은 원시인 Caveman Logic』(2010, 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저자 행크 데이비스Hank Davis는 이론이란 주어진 증거에 부합하거나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믿음이나 감정적 이유가 아닌 ‘증거’라고 말합니다. 데이비스는 창조론creationism, 즉 지적 설계에 의해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이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믿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을 신앙주의fideism라고 합니다. 신앙을 진리 파악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데이비스는 신앙주의를 공격적인 비이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주의자들은 믿음에 대한 자신들의 진술을 정당화하려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토론도 거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니까”라는 단어를 마치 이유인 듯 말합니다. “왜?”라고 물으면 “그냥 그렇다니까”라고 대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적 인지발달상의 이러한 비이성적 시기를 지나 성장했습니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1809-82)이 제시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진화론evolution은 과학 내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이론에 속합니다. 진화론은 그대로 생물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생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론으로 격상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경험적 증거는 물론, 테스트가 가능한 방식으로 가설이 진술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한 초능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초능력에 대한 믿음이 만연해 있으며,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지능이 모자란 것도 아닙니다. 초능력에 대한 믿음이 교육 수준과 정관계에 있다는 증거가 있긴 합니다.
초능력 논쟁은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과는 달라야 합니다. 초능력의 존재 확인은 잘 정립된 경험적, 논리적 기법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과학은 가치가 배제된 사실 수집이나 증거 평가의 기법을 제공합니다. 초능력의 증명에도 천문학이나 사회학, 분자생물학에서 다루는 사례와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걸까요? 모든 사람이 규칙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테스트의 증거가 압도적으로 초능력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증거들이 상관없고, 오히려 긍정적 증거로만 채워집니다. 때문에 초능력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며 믿음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오직 한 번, 오직 한 곳에서만 일어난다는 생각은 과학에서는 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초능력에 관한 상당한 증거들의 특징입니다. 재현 가능성은 과학적 방법이란 증표인데 초능력이 여기서 면제를 받으려 합니다. 초능력의 역사는 잘못된 방법론과 노골적인 사기의 사례로 가득합니다. 만약 초능력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우리는 인간과 우주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는 소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초능력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 존재를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절대로 증거의 기준을 낮출 영역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