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의 자유 <풀밭에서의 오찬>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 Le Dejeuner sur l'herbe (Le Bain)>, 1863, 유화, 208-264.5cm.
마네는 이 작품의 제목을 <일광욕 Le Bain>이라고 하려 했는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꾀했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의 지오르지오네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서도 와토, 부셰, 코로 등에게 친근해진 고전적 주제를 마네는 현대화하여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 쏟아질 비난을 마네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누드뿐만 아니라 앞의 세 사람 구성, 옆으로 쓰러진 바구니, 정물 등 부분들의 묘사가 뛰어납니다. 마네는 이 작품을 88-116cm의 크기로 그렸다가 그로서는 처음으로 커다란 캔버스에 다시 그렸습니다. 이전의 화가들이 그린 누드화를 보면 모델이 벌거벗었더라도 관람자에게 자신의 누드를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워 몸을 비트는 것이 보통인데, 이 작품에서는 모델은 전혀 부끄럼을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부끄러워하는 건 모델이 아니라 관람자가 되었습니다. 누드를 보다 들킨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강기슭 근처 숲속 빈터입니다. 뒤로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고, 강가에는 보트 한 척이 놓여 있습니다. 마네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파리 외곽 아르장퇴유의 센 강에서 목욕하던 여자들을 본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마네는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전원음악회 Le Concert Champetre>라는 작품을 떠올렸는데, 그 그림은 학창시절 마네가 루브르 뮤지엄에서 여러 번 습작했던 작품입니다. 그는 그 작품을 새롭게 해석한 작품을 제작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등장인물들에 현대적인 의상을 입히고 보다 밝은 색의 물감으로 채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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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 (일광욕) Le Dejeuner sur l'herbe (Le Bain)>, 1863, 유화, 88-116cm.
이것이 처음 그린 것입니다. 마네는 다시 두 배가 훨씬 넘는 큰 캔버스에 다시 그렸는데, 그가 야심을 갖고 그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화가가 큰 캔버스에 그릴 때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려는 야심을 갖게 됩니다.
마네는 1862-63년에 훗날 악명으로 유명해질 누드 <풀밭에서의 오찬 Le Dejeuner sur l'herbe>과 <올랭피아 Olympia>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들을 그리기 얼마 전 프루스트와 함께 센 강가에서 일광욕하는 여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네가 “나도 누드를 그려야 할 것 같아. 음, 내가 저들에게 누드를 보여주겠어!”라고 말했습니다.
<풀밭에서의 오찬>은 스페인 의상을 입은 두 중년 신사와 누드의 여인이 준비해온 점심식사를 풀밭 위에 펼쳐놓고 피크닉에 온 사람들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주말이면 중산층 사람들이 센 강가로 피크닉을 가서 오찬을 즐기는 건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처럼 여인이 누드로 남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피크닉 장소에 여인이 누드로 앉아 있다는 건 매우 과격한 회화적 시도였으며, 그런 장면을 보는 관람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은 부끄럼을 타는 고전적인 누드가 아니라 벌거벗은 당당한 모습으로 평론가들은 마네가 고전적 주제의 누드를 평범한 여인에게 적용한 데 놀랐습니다.
누드 여인은 마네가 아끼던 모델 빅토린 뫼랑입니다. 마네의 작품에 뫼랑은 많이 등장합니다. 마네는 화실에서 누드를 그린 후 피크닉 장소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습니다. 두 남자는 마네의 동생과 여동생의 미래의 남편 페르디낭 렌호프입니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이 작품을 보고 “뻔뻔스러운 그림”이라고 비난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문제의 그림을 보려고 주말이면 전시장 밖에 줄을 섰습니다. 평론가 아메르통은 황제의 말에 동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철면피 같은 프랑스 화가 마네의 그림은 지오르지오네의 작품을 프랑스의 사실주의로 해석한 것이다. 비록 여인이 벌거벗었더라도 지오르지오네의 작품은 아름다운 색상으로 인해 용서받을 만했다. 그러나 마네의 작품에는 사내들의 복장이 아주 해괴망측하고, 다른 여인은 스미즈차림으로 내에서 나오고 있으며, 두 사내는 바보 같은 눈짓을 한다.”
그러나 <풀밭에서의 오찬>은 에밀 졸라가 호평한 후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졸라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이런, 이 무슨 외설이란 말인가! 장성한 두 남자 사이에 옷을 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라니! … 사람들은 화가가 뚜렷한 화면공간의 배분과 가파른 대비의 효과를 위해 인물의 구성에서 외설적이고 음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말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풀밭에서의 오찬이 아니라, 강렬하고도 세련되게 표현한 전반적인 풍경이다. 전경은 대담하면서도 견고하며 배경은 부드럽고 경쾌하다. 커다란 빛을 듬뿍 받고 있는 것 같은 살색의 이미지. 여기에 표현된 모든 것은 단순하면서도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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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앙투안느의 <파리스의 심판 Le Jugement de Paris>
<풀밭에서의 오찬>은 마르크 앙투안느의 라파엘로풍의 <파리스의 심판 Le Jugement de Paris>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마네는 그림에서 모델로 하여금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게 했습니다. 과거에 누드를 그린 화가들은 모델이 다른 곳을 응시하게 하여 관람자가 누드를 제삼자를 바라보듯이 거리낌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했지만, 마네는 모델을 이인칭으로 그려서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게 했습니다. 이는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관람자와 그림이 더욱 친숙하게 되었으며, 또한 관람자가 주제를 자신들의 시대적 감각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것으로 작품 감상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이는 과거에는 누릴 수 없던 모더니즘의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동료 화가 에드가 드가는 마네에게 새로운 시도가 없다고 평가 절하했습니다. 드가는 말했습니다.
“마네는 아무데서라도 영감을 구하며,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그리고 내게서조차 구한다. 마네는 붓을 놀라울 만하게 사용하지만 그는 자신이 받은 영감을 새롭게 해석하지는 못한다! 그에게는 시도하는 요소란 없고 … 벨라스케스와 프란스 할스의 회화방법이 아니면 어떤 그림도 그리지 못한다. 난 마네에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아주 섬세하게 그림을 그리는 지성인으로 만족하라고 말해주었다.”
마네는 유럽의 고전주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지오르지오네와 티치아노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회화방법을 연구하며 그들 이전의 유럽 회화는 야만인들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고전주의 회화에 대한 마네의 관심과 그러한 방법의 응용이 드가에게는 마네가 그러한 방법에 의존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풀밭에서의 오찬>은 1863년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자 낙선전Salon des Refuses을 통해 파리 시민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이때 낙선전에 참여한 화가들 중에 카미유 피사로, 아르망 기요맹, 앙리 팡탱-라투르, 제임스 휘슬러, 폴 세잔이 포함되었습니다. 훗날 미술사에 획을 그을 젊은 화가들이 살롱에서 배척받았던 것입니다.
당시 살롱에는 세 점까지 응모할 수 있었고, 3월 20일에서 4월 1일 사이에 출품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마네는 <풀밭에서의 오찬>과 다른 두 점을 출품했습니다. 그는 살롱에 출품하면서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를 방문하여 심사위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들라크루아는 너무 늙은 데다 병중이었으므로 심사위원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그해에 타계했습니다. 그해 살롱에 출품한 화가는 약 3천 명, 작품은 5천 점 가량이었으며 그 가운데 2천 점이 받아들여졌지만, 마네의 작품 세 점 모두 낙선했습니다. 심사위원들 가운데는 마네의 스승 토마 쿠튀르가 있었는데, 스승조차 제자의 작품을 배척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도덕성에 비난의 초점이 맞추었지만 그것 말고도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했던 다른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무릎 위에 올린 여인의 팔꿈치는 시각적으로 너무 불안해보이며 다리도 어색하게 꼬여 있습니다. 이런 자세는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불편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중간 거리쯤에 독특한 자세로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이 너무 크게 그려진 것입니다. 여인이 너무 크게 그려져 옆에 놓인 보트가 작게 보일 정도입니다. 여인이 배경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초점이 아니라 매우 선명한 초점으로 묘사되어 거리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이는 멀리 있는 물체가 흐릿해 보이는 대기원근법의 공식에 어긋난 경우입니다. 더욱이 이 여인은 전체 구도상 인물들 간의 피라미드 구조 꼭대기에 배치됨으로써 여인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전체 화면의 공간성보다는 평면성을 강조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 기묘하고 재미있는 몇몇 요소들이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 화면 중앙 꼭대기에 있는 붉은 색의 새와 화면 아래 왼편 구석에 있는 개구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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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의 <살롱이 열리기 며칠 전 어느 화실의 장면>, 1855, 삽화, 『르 샤리바리』에 소개되었음. 도미에는 시사만화의 선조가 되는 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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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의 <영향력 있는 평론가가 예술가들 사이를 걸어간다>, 1865년 6월 24일, 삽화, 『르 샤리바리』에 소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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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킨트의 <살롱에 배달되는 작품들>, 1874, 연필, 23.8-42.5cm.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살롱이 예술가들에게 유일한 등용문이었으며, 살롱 심사위원들 대부분 아카데미즘을 추구하던 예술가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통을 보존하려는 보수주의의 성향이 농후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품과 인도주의적이고 객관적이며 우주적인 내용을 암시하는 작품을 선호했습니다. 그들은 작품이 후세의 교육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진보주의 예술가들은 살롱의 심사기준에 늘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1850년대부터는 아예 살롱에 출품하지 않는 예술가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술가들의 불만은 해가 갈수록 더해갔고 마침내 황제에게 탄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그들의 불만을 받아들여 살롱에서 낙선한 예술가들이 자기들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도록 낙선전을 개최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는 1863년의 일로 낙선전은 살롱을 통하지 않고서도 파리의 미술계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예술가들의 등용문이 되었습니다.
낙선전은 살롱 개막 두 주 후인 5월 15일에 개최되었습니다. 입장료는 1프랑이었는데 무려 7천 명이 낙선전을 관람했습니다. 사람들은 살롱에서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곳을 찾았습니다. 낙선전은 매우 큰 규모로 개최되었는데, 12개의 화랑에 무려 1천 2백 점이 소개되었습니다. 어떤 관람자 말했습니다.
“낙선전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나쁜 회화가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보고 만지고 확인했다.”
마네를 잘 이해한 평론가 자차리 아스트뤽은 ‘1863년 살롱’이라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마네! 이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 나는 그가 이번 살롱에서 월계관을 받지 못했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 마네는 총명하고, 영감을 가졌으며, 힘찬 그림을 그리고, 놀라운 주제를 사용한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요소가 있다.”
마네는 낙선전의 스타로 부상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유명해졌습니다. <풀밭에서의 오찬>은 젊은 세잔의 마음을 뒤흔들었는데, 세잔은 1871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피크닉 장면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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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풀밭에서의 오찬 Le Dejeuner sur l'herbe>, 1870-71, 유화, 60-80cm.
젊은 세잔은 이 시기에 매우 과격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느낌을 강렬하게 나타냈습니다. 이 작품에서 나무 위로 곧게 솟은 것과 그 아래 세로로 같은 선상에 있는 세워진 포도주병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합니다.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과 달리 세잔은 환상의 누드 속에서 성적 욕구를 느끼는 남자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