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술집>, 파리의 명물



 



 

 

마네는 10월 초에 파리로 돌아갔습니다. 육체적 고통은 여전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안정된 편이었습니다. 공기 좋은 시골이 그에게 신체적으로 낫겠지만 파리의 공기가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가야 할 곳이 있고 친구들을 만나고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아름다운 여인과 대화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활력이 되었습니다. 발목이 뒤틀리고 근육통이 있고 보행이 어려워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지만, 그는 카페에도 가고 카바레에도 갔습니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술집 The Bar at the Folies-Bergere>, 1882, 유화, 97-130cm.

마네가 살롱에 출품한 마지막 작품입니다. 웨이트레스의 뒤 거울에 술집 내부가 비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임을 알 수 있으며, 모자를 쓴 남자가 거울에 비친 웨이트레스와 마주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거울에 의해 환상적인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작품입니다. 거울에 비친 화려한 파리의 세계, 불빛 아래 서성이는 남자와 여자들의 실재감을 느끼게 하는 술병과 과일의 대비 등 마네의 회화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거울 속 웨이트레스의 뒷모습과 오른편 남자의 앞모습이 원근법으로는 일치하지 않지만, 마네는 이런 모순을 개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화적 구성을 위해 자유롭게 그렸습니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술집>의 부분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술집>의 부분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술집>의 부분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술집>의 부분



마네가 카페의 장면을 마지막으로 그린 대작 <폴리 베르제르 술집>은 그의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폴리 베르제르 술집은 카페, 카바레, 서커스 공연장이었으며, 입장하는 데 2프랑만 내면 되었습니다. 1869년에 영업을 시작하여 부르주아들의 매춘 장소 또는 불륜의 커플이 만나서 즐기는 곳으로 알려진 이곳은 상점 점원, 가수, 배우, 댄서, 한량에서 예술가, 작가, 사업가, 은행가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출입했으며, 매춘하는 창녀들의 연령도 다양했습니다. 각종 술이 진열되어 있는 내부에는 밝은 등이 켜져 있었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으며, 담배연기가 가득했습니다. 마네는 그 명소에서 몇 시간씩 앉아 스케치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마네가 웨이트레스 쉬종에게 유니폼을 입은 채 자기 화실로 와서 포즈를 취해줄 것을 청하자 그녀는 선뜻 응했습니다. 그녀는 목에서 가슴까지 사각으로 파진 기다란 드레스에 꼭 끼는 벨벳 조끼를 걸치고 마네의 화실로 왔습니다. 마네는 대리석으로 카운터를 만들고 그녀에게 카운터 뒤에 서서 포즈를 취하게 했습니다. 마네는 술집의 세 카운터 가운데 하나를 주제로 선택했습니다. 꽃과 술병들은 마네에 의해 연출되었습니다. 마네는 그녀로 하여금 웨이트레스에게 어울리는 화장을 하게 했으며, 적당한 헤어스타일, 귀거리, 목걸이를 하게 해서 중산층이나 노동자 출신으로 보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마네는 쉬종의 가슴에 작은 꽃다발을 달게 하고 관람자를 향해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쉬종의 멍한 시선과 꽃다발이 심한 대조를 이룹니다. 쉬종 앞에 두 송이 장미가 유리잔 안에 있는데, 장미는 고대에 비너스에게 헌화한 꽃이라서 술집의 웨이트레스를 현대판 비너스에 비유한 듯한 인상을 줍니다. 흰 장미는 순결을 상징하고, 핑크 장미는 신성한 사랑을 상징하며, 꽃병은 순결을 상징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모파상은 『벨 아미』에서 이 술집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분칠을 덮어쓴 한물간 여인들이 홀 주위의 카운터에 우두커니 서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바로 술과 사랑의 상인이었다.

 

올랭피아의 차세대라 할 수 있는 금발의 쉬종 뒤에 거울이 사용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림이 관람자의 인식에 혼돈을 주는 이유는 거울이 아니라 그림 오른쪽에 나타난 쉬종의 뒷모습과 모자를 쓴 남자의 모습입니다. 거울이 쉬종의 등 뒤에 가로로 길게 부착되어 있으므로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통해 관람자는 카페 내부의 장면을 볼 수 있지만, 병렬된 그녀의 뒷모습은 거울에 반사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뒷모습은 또 다른 여인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림의 구성상 뒷모습은 또 다른 여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모자를 쓴 남자 모델은 실재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거울에 반사된 모습처럼 보이며, 두 사람의 위치를 설명해줄 만한 거울이 그곳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으로는 이 그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네는 불가해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우리의 인식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회화에서는 이 같은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마네가 살던 당대 파리의 삶을 기념비적으로 그렸다는 의의를 지닙니다. 그는 이 작품에 모든 기교와 폭넓은 주제 그리고 마지막 열정을 불어넣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모자를 쓴 남자는 앙리 뒤프레이이며, 거울에 반사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마네의 친구들이 있는데, 화면 왼쪽 끝에 모자를 쓴 남자는 화가 가스통 라투세이고, 그 옆에 흰 옷을 입은 여인 메리 로랑과 잔 드 마르시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 작품이 1882년 살롱에서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도저히 인식될 수 없는 세계가 실재처럼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마네의 인생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기념비적 해석은 항상 관람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제공했습니다.



 

 

 



마네의 <고양이를 안고 있는 여인: 마네 부인 La Femme Au Chat: Madame Edouard Manet>, 1882, 유화, 92-73cm.



 

 

1882년 여름 그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복숭아, 딸기, 자두 등의 과일을 그리거나 탁자에 몸을 기대고 반쯤 누운 자세로 꽃병에 꽂힌 장미를 그렸고, 고양이 지지를 안고 있는 수잔을 스케치하기도 했습니다. 10월에는 그려 놓은 작품도 없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도 또 열정도 남아 있지 않아 1883년 살롱은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12월에 포르의 주문대로 포즈를 달리 한 그의 초상 두 점을 완성했지만, 포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구입하지 않고 다른 그림 <온실>, <로세포르의 초상>, <배를 들고 있는 레옹>, <뤼엘의 빌라> 등 네 점을 1만1천 프랑에 구입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주이야기: 평탄성 문제Flatness problem


 

앨런 구스의 이론은 우주의 평탄성 문제까지 해결했습니다. 1970년대의 과학자들은 우주공간의 밀도, 즉 Ω의 값이 거의 0.1에 가깝다고 믿었습니다. Ω는 우주의 평균밀도를 임계밀도critically density로 나눈 값입니다. 열린 우주에서 닫힌 우주로 넘어가는 밀도의 경계 값을 말하며, 임계밀도는 우주가 무한히 팽창하는 것을 막을 만큼의 중력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주가 팽창하다 멈추는 평탄한 우주가 되는 밀도를 임계밀도라고 합니다. 우주의 임계밀도는 1cm3당 수소원자 10개 정도로, 현재 알려진 우주의 밀도는 다시 우주가 수축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임계밀도보다 작습니다. 빅뱅이 일어난 후 수십억 년이 지났을 때 우주의 밀도가 임계밀도와 거의 같았던 이유는 여전히 미지로 남아있습니다.

우주가 팽창하면 Ω도 당연히 시간과 함께 변해야 합니다. 우주 탄생초기의 Ω의 값을 적절히 가정하고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풀면 현재의 Ω는 거의 0이라는 결론이 얻어집니다. 따라서 빅뱅이 일어나고 수십억 년이 지났을 때 Ω의 값이 1에 가까웠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천문학에서 말하는 미세조율문제fine-tuning problem입니다. 오늘날 Ω가 0.1에서 10 사이의 값을 가지려면 빅뱅이 일어나고 1초가 지났을 때 Ω의 값은 1.00000000000000이어야 합니다. 즉 초기의 Ω의 값은 100조분의 1단위까지 세밀하게 조율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Ω가 0.1이 되려면 초창기의 Ω는 엄청난 정확도로 조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Ω는 왜 1에 가까운 값을 갖게 되었을까?

구스에게 이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크기로 팽창된 우주를 국소적인 규모에서 바라보면 당연히 평탄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충분히 크게 팽창되었기 때문에 Ω가 1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기홀극 문제magnetic monopole problem


 

대통일이론은 우주의 초창기에 다량의 자기홀극이 존재했음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자기홀극이란 남극(S) 혹은 북극(N)만 갖고 있는 자석을 의미합니다. 모든 자석은 N극과 S극이 동시에 짝으로 존재합니다. 둘 중 하나의 극만 갖고 있는 자석이란 없습니다. 대통일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가짜진공(최저에너지를 갖지 않은 진공상태. 가짜진공은 완벽한 대칭을 가진 상태 중 하나로 빅뱅이 일어나던 순간에 우주가 이런 상태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우주가 낮은 에너지상태로 전환되면서 원래의 대칭은 붕괴되었습니다. 가짜진공은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최저에너지에 해당하는 진짜진공상태로 자연스럽게 전환됨) 상태에서 시작되었으며 세 개의 힘들(중력(만유인력)을 제외한)은 하나의 힘으로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구조가 붕괴되면서 가짜진공은 진짜진공으로 전환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하나의 힘이 세 가지로 분리되었습니다. 1917년에 네덜란드 물리학자 빌렌 드 지터Wilhelm de Sitter(1872~1934)가 예견한 바와 같이 가짜진공상태에서 우주가 지수함수exponential function적으로 점차 빠르게 팽창하며 팽창속도는 우주상수, 즉 가짜진공에 함유되어 있는 에너지에 의해 좌우됩니다.

앨런 구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우주가 가짜진공상태에서 출발했다면 초기의 팽창속도는 지수함수적으로 점차 빨라졌을 것입니다. 가짜진공상태의 우주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엄청난 비율로 팽창되기 때문에 자기홀극의 밀도도 순식간에 작아졌을 것입니다. 그동안 과학자들이 자기홀극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은 그것에 없어서가 아니라 있긴 있지만 너무 넓은 우주 속에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구스가 찾은 해답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네의 <카페의 실내>




 

 

 

 



마네의 <카페의 실내 Interior of a Cafe>, 1880년경, 리넨에 유채와 파스텔, 32-45cm.

그림의 배경이 2년 후에 그릴 걸작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상기하게 합니다.



 

 



에드가 드가의 <카페 앞에 있는 여인들 Women in Front of a Cafe>, 1877, 종이에 파스텔, 40.95-59cm.



 

<카페의 실내>는 이때 그린 그림입니다. 육체적 고통이 그로 하여금 오래 선 채 그림을 그릴 수 없게 했으므로 짧은 시간 내에 그릴 수 있는 것들만 그렸고 물감이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는 유화로 그림을 마칠 수 없을 때는 파스텔을 혼용하여 서둘러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파스텔이 두드러지게 사용된 그림으로 기법과 내용면에서 드가의 파스텔화와 비교되는 작품입니다. 드가의 파스텔 기교는 매우 뛰어나서 그 자체가 한 점의 파스텔화로 손색이 없는데 반해, 마네의 파스텔화는 서둘러 대충 마치려고 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마네의 <졸라 부인의 초상>, 1879년경, 파스텔, 55.6-46cm.

졸라 부인은 마네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 남편을 통해 부탁했습니다.



 

 



마네의 <검정 모자를 쓴 이르마 브뤼너 Irma Brunner a la Voilette>, 1882, 종이에 파스텔, 57-36.5cm.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르마는 밤의 세계에서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르마를 마네에게 소개한 사람은 이르마의 친구 메리 로랑이었습니다. 이르마는 마네의 화실을 자주 방문하면서 이 그림과 또 한 점의 파스텔 초상화를 마네로부터 받았습니다. 마네는 에로틱한 이르마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이르마도 마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화실로 와서 포즈를 취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네가 파스텔로 그린 그림 중 가장 훌륭한 것들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마네가 파스텔을 사용해서 그린 그림은 모두 89점이며, 그중 70점이 여인의 초상화로 1879년부터 1883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린 것들입니다. 1879년부터 그에게 모델이 되어준 아름다운 여인들은 졸라 부인, 프루스트의 애인 로지타 모리, 백작 부인 루이즈 발테스, 이르마 브뤼너, 기유메 부인, 에밀 앙브르,잔 드 마르시, 유명인사의 딸 쉬제트 르메르, 이자벨 르모니에 등입니다.

 

마네는 모델들에게 “말하시오, 웃으시오, 움직이시오, 당신이 자연스러울 때만 당신의 모습이 실제처럼 나타나게 됩니다”라고 주문했습니다.



 

 



마네의 <흰 리본을 맨 이자벨 르모니에>, 1879, 유화, 86.5-63.5cm.

 

마네는 특히 이자벨 르모니에의 초상화를 연속적으로 그렸고, 짧은 편지에 그녀를 묘사한 유머스러운 스케치, 복숭아, 자두, 깃발 등을 그려 넣어 장식했습니다. 그녀의 언니와 아이들은 르누아르의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네의 <이자벨 르모니에의 초상 Portrait of Isabelle Lemonnier>, 1879, 유화, 101-81cm.



 

마네와 바티뇰 그룹 화가들이 샤르팡티에의 ‘현대의 삶’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이런 와중에 샤르팡티에의 처제 르모니에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파리의 유명한 보석상의 딸로 아버지는 카르티에만큼이나 유명했습니다. 미혼인 르모니에는 마네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의 화실에 즐겨 가곤 했습니다. 마네는 1879년에만도 그녀의 초상을 여섯 점이나 그렸습니다.

 

이 시기에 마네는 갑작스러운 고통이 엄습하면서 정신을 잃고 길에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프루스트는 1879년에 마네가 건강했다고 적었지만, 마네가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마네의 <뱀장어와 붉은 숭어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Eel and Red Mullet>, 1864, 유화, 38-46cm.



 

 



마네의 <햄 The Ham>, 1880년경, 유화, 32-42cm.

흰 테이블 위 은접시에 커다란 햄 덩어리가 칼로 잘라진 면이 앞으로 보이도록 놓여 있고, 그 앞에는 은접시와 평행해서 상아 손잡이의 나이프가 있으며, 배경은 금색이 있는 식물 형태의 붉은색 벽지입니다. 마네는 평범한 오브제를 평범하게 그렸는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취한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라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모티프가 되는 것입니다.



 

마네는 이제 병마와 싸우느라고 대작을 그리는 대신 꽃이나 과일 주변에 있는 정물들을 그렸습니다. 1864년 여름 불로뉴에서 <뱀장어와 붉은 숭어가 있는 정물>을 그린 적이 있는 그는 1880년에는 햄을 주제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마네의 <수정 화병의 클레마티스 Clematis in a Crystal Vase>, 1881년경, 유화, 56-35.5cm.

 

마네는 말년에 과일이나 꽃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는 리라, 장미, 카네이션 등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병이 심해지고 통증이 그치지 않자 앉아서 그릴 수 있는 작업을 선호했으며, 정물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메리 로랑이 꽃을 가지고 마네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마네의 친구는 그의 정물화에 관해 말했습니다. “한 번 그려지면 그의 장미나 리라 꽃은 불멸의 작품이 되었다. 삽시간에 그린 것이 영원한 것으로 변했다. 이 꽃들의 선선함을 보라. 너무도 완벽하고 탐스러워 그림이 아직도 젖이 있는 듯하다.” 마네는 이 화병에 꽂힌 꽃들을 여러 점 그렸는데, 이것이 맨 처음 그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네의 <화병의 장미와 튤립 Roses and Tulips in a Vase>, 1882년경, 유화



 

 

1881년 살롱은 1등은 없고 9명의 화가에게 2등 메달을 수여했으며, 마네가 포함되었습니다. 메달 수여식에 마네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살롱에 마네는 <사자사냥꾼 페르튀제>를 소개했습니다. 그해의 심사위원은 모두 90명으로 살롱에 당선된 적이 있는 예술가들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카데미 데 보자르나 에콜 데 보자르, 정부의 영향이 완전히 배제된 가운데 예술가들의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 심사위원들이 선출된 것입니다. 이 작품이 출품되자 평론가들의 비판이 있었지만, 그는 이제 살롱의 심사를 받지 않고 출품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애가 거의 다해 가고 있었으므로 심사 없이 출품할 수 있는 기회는 1882년의 살롱뿐이었습니다. 이는 마네가 마흔아홉 살 때의 일입니다.



 

 



마네의 <사자사냥꾼 페르튀제 Portrait de Petruiset, Le Chasseur de Lions>, 1880-81, 유화, 150-170cm.

마네는 모험가이자 수렵가이며 한 대 화가였던 페르튀제의 초상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페르튀제의 포즈는 마네의 화실에서 취해진 것이며, 배경은 파리의 베드류이제의 집 정원이라서 맹수 사냥의 무대로서는 박력이 떨어집니다.



 

 



마네의 <베르사유의 예술가 정원 The Artist's Garden in Versailles>, 1881. 유화, 55.1-80.5cm.

격자모양의 높은 울타리 안에 있는 벤치에 마네가 남겨둔 노란색 옷이 있어 그의 부재를 시사하며, 그의 감성이 느껴집니다. 정원의 붉은색 장미가 여기저기 피어 있어 여름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합니다. 당시 마네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 정원은 매력적인 여름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모네를 비롯하여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정원을 그렸지만, 그들의 정원에는 인간의 혼이 내재해 있지 않은데 마네의 이 정원에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그해 마네는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 별로 효과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881년 여름 목재상 마르셀 번스타인이 베르사유에 있는 정원이 딸린 별장을 빌려줘 마네는 어머니와 수잔과 함께 6월 말에 그곳으로 가서 지냈습니다. 레옹은 일요일이면 그들을 방문했는데, 이제 그는 은행 브로커가 되어 제법 돈도 잘 벌었고 큰 사무실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네는 그곳에서 한 달 반을 지내면서 르 노트르가 루이 14세를 위해 베르사유에 만든 공원에도 가고 그림도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는 9월 23일 에바 곤잘레스에게 보낸 편지에 정물화 몇 점과 정원 몇 점을 그렸다고 적었습니다. 그가 그린 <베르사유의 예술가 정원>은 문을 열고 나오면 작은 통로 끝에 있는 것으로 그림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쉬곤 했습니다. 그는 정원을 가리켜서 자기가 그린 정원들 중 가장 추한 정원이라고 했지만, 인상주의 작품들 중 걸작으로 꼽을 만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네의 마비증세



 



 

 

마네의 마비 증세에 관해 1949년 피에르 프린스의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인용해 회고한 말이 당시의 정황을 잘 말해줍니다. 피에르 프린스는 1860년대 마네와 친분이 두터웠던 화가이자 조각가로서 <발코니>에서 베르테와 나란히 포즈를 취한 바이올리니스트 파니 클라우스의 남편입니다.

 



1878년 첫 번째 마비증세로 화실에서 쓰러진 후 마네는 병마와 싸우게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그를 괴롭힌 것은 끊임없는 정신적 고통이었다. 혼자 있을 때 그는 더욱 고통을 느꼈는데 그가 스스로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직접 그 말을 아주 많이 들었다. 그는 항상 악령에 쫓기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여자만 나타나면 그는 평정을 되찾았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불쌍한 수잔이 마네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 열여덟 살 나던 해 브라질에 갔다가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뱀에게 물려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는 잘못된 생각은 이제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시기에 운동실조가 그에게 일어났으며 원인은 익히 알려진 대로였다. … 덕담을 들으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쇠약해 가는 몸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그의 그림도 병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그림마저 말을 듣지 않다니! … 기초가 허물어진 그림 앞에서 그는 괴로워하고 두려워했다. …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변덕이 심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네 역시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마네는 구석에 ‘병든 고양이처럼’ 웅크려 앉는 법을 익혔다.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로는 그를 지치게 만드는 방문객들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았으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사교계 사람이었다.



 

 

 



마네의 <카르멘으로 분장한 에밀 앙브르의 초상>, 1879-80, 유화, 91.5-73.5cm.

한때 홀란드 왕의 애인이었던 에밀 앙브르는 마네를 초대하여 카르멘으로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마네는 1879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했는데, 치료를 받느라 오래 걸린 것입니다.

 

 



마네 부부는 에밀 앙브르의 별장에 묵었습니다. 마네의 작품을 좋아한 앙브르는 자신의 별장을 빌려주면서 그곳에 머물기를 권했습니다. 파리 근교 벨레뷔에서 마네가 에바 곤잘레스에게 보낸 편지에 “난 다시 작업을 시작했소. 이 지역의 프리 마돈나 에밀 앙브르의 초상을 그리고 있소. 우리는 10월 말까지 이곳에 묵으려고 하오”(1879. 9.)라고 적었습니다.

 

마네는 1879년 10월에 파리로 돌아온 후 다시 건강이 나빠져 계단을 걸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1880년 마네는 의사의 권유로 벨레뷔에 있는 병원과 온천장에서 다리치료를 위해 6개월 동안 수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때 레옹도 동행했는데, 스물여덟 살의 레옹은 주식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마네는 하루 세 차례 온천욕을 하면서 4, 5시간씩 마사지 치료를 받았습니다. 의사는 오래 걷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이 시기에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무료함을 토로하면서 어서 파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앙브르는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미국으로 가지고 가서 뉴욕과 보스턴의 전시회를 통해 소개했는데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마네의 <벨레뷔에서의 마네 부인 Mme. Manet at Bellevue>, 1880

이 그림을 화가 막스 리베르만이 1902년에 마네의 미망인 수잔으로부터 구입했습니다. 이베르만은 나치의 탄압을 받았는데, 그대 취리히의 미술관에 빌려주었습니다.



 

 

 



마네의 <산책 The Promenade>, 1880년경, 유화, 93-70cm.

 

 

'좋은 전망‘이란 뜻의 벨레뷔는 말 그대로 나무와 꽃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마네는 싱싱한 풀과 여인의 검정색 실루엣을 대조시켜 나무 그들의 서늘함과 여인의 향기가 한데 어우러지게 했습니다. 마네는 이 작품을 자신의 소장품으로 화실에 보관했으며, 그가 타계한 후 1884년 그의 화실에서의 경매에서 가수 장 밥티스트 포르가 1,500프랑에 구입했습니다. 이 작품은 몇 사람의 손을 거친 후 1958년 소더비 경매에서 249,200달러에 팔렸으며, 3년 후 소더비 경매에서는 익명의 응모자가 1,309만 달러에 구입했습니다.



 

 

 



르누아르의 <산책 The Promenade>, 1870, 유화, 81,3-65cm.



 

 

마네는 벨레뷔에 머물면서 몇 점 그렸는데 <벨레뷔에서의 마네 부인>은 정원에 앉아 있는 아내를 모자에 눈이 가려진 모습으로 그린 것이고, <산책>은 미망인 감비를 그린 것입니다. 여인의 뒤로는 모래가 깔린 길이 보이고, 그녀가 서 있는 푸른 잎이 무성한 길은 산책하기에 쾌적해 보입니다. 주위의 푸른색으로 여인이 두드러지게 보이지는 않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젊은 여인의 세련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모자를 라일락꽃으로 장식했으며, 최신 유행 의상을 입은 여인을 보기 좋아한 마네에게 감비의 모습은 파리의 여인과 마찬가지로 세련되어 보였습니다. 마네는 부드러운 붓놀림으로 여인의 눈에서 지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했으며, 갸름하고 돌출된 턱과 이목구비를 적절하게 묘사했습니다. 르누아르도 십 년 전에 <산책>을 그렸습니다. 동일한 주제를 그렸지만 마네는 싱그러운 자연 속에서의 여인의 생각에 잠긴 모습을 그린데 반해 르누아르는 연인들의 즐거운 한때를 그렸습니다. 마네가 바라본 인생은 늘 솔직했습니다. 르누아르는 주제를 이상화시켰는데, 즐겨 사용한 영롱한 색채로 인해 실재 인생이라기보다는 미화시킨 인생으로 보입니다.

 

그해 11월 초 다시 파리로 돌아온 마네는 도시의 활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게르부아로 가서 친구들을 만났으며, 게르부아는 그에게 많은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