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마당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엘리바스의 1차 충고 │ 4장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찌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자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면, 자네는 귀찮게 여기겠지.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일세)

3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여보게, 자네는 많은 사람을 지도하였고 손에 맥이 풀린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었네)

4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6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자신만만하던 자네의 경건은 어찌 되었고 자네의 희망이던 그 흠없는 생활은 어찌 되었는가?)

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게. 죄없이 망한 이가 어디 있으며 마음을 바로 쓰고 비명에 죽은 이가 어디 있는가)

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12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러울 때에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져 밤의 환상으로 가슴을 설렐 때)

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몸서리치는 두려움이 나를 덮쳐 뼈마디가 온통 떨리고 있는데)

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삣하였었느니라
(그의 입김이 나의 얼굴을 스치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네)

16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나의 눈앞에 누가 우뚝 서는데 그의 모습은 알아 볼 수 없고 만물이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17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이보다 성결하겠느냐

18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20 조석 사이에 멸한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티끌이 되어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리라)

21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 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그 천막들의 줄을 거두면 모두들 하릴없이 죽어 가리라)


좲 해설 좳

세 친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엘리바스는 욥의 탄식을 듣다못해 자신의 경험과(4:8) 신비적 영상(4:12-21)을 근거로 욥의 고난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을 것이라면서 네 가지 신학적 이론을 제기하였다.


1. 죄 없이 망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4:7).

2. 죽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를 수 있겠느냐(4:17).

3.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불러내는 것이다(5:7).

4. 하나님의 매를 맞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5:17).


엘리바스의 첫째 논리는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지만 불의한 사람은 반대로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 신학이다.
이는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에 속한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호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비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 찌니라 (신명기 7:9-11)


하나님의 인과응보 신학은 신명기 7:12-16과 11:13-17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신명기의 계명을 욥에게 적용하면 욥의 고난은 필히 그의 의롭지 못한 행위에 대한 응보이다.
엘리바스의 둘째와 세째의 논리는 피조물의 불완전함을 지적한 것이고 마지막 논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바른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먼저 욥의 과거가 정직하고 지혜로웠던 점을 들어서 욥 자신 불우한 사람들에게 권고로서 도움을 주고서는 이제 자신이 고난에 처하자 기가 꺾인 채 허둥거리니 욥답지 못하다고 책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악인의 최후가 욥의 처지와 같았다고 주장했는데(7절) 이는 의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적이 없음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했다.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시편 7:14-1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 하였도다 (시편 37:25)


그는 욥에게 숨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해야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한다고 권유하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시 신앙의 근본이자 지혜였다. 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내세워서 새로운 국면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의도를 나타냈다.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4:7-8)라는 말로 인과응보의 타당성을 주장하였다.


엘리바스의 말에는 아이러니가 있었는데 그는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창세기 2:7) 창조설을 예로 들고 죽음을 불어 넣어 주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4:9).
그는 자연계에서 이루어지는 이치를 예로 들어 자신의 이론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사자’는(10절) 불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잠언 28장 15절과 시편 7장 2절 그리고 10장 9절).
그는 욥에게 닥친 고난은 욥이 지은 죄의 결과라고 단정했다.
인과응보는 당시 보편적 사상으로 동양의 현자들도 권선징악을 강조하기 위해 “선한 자는 하늘이 복으로 갚고 선을 행치 않는 자는 하늘이 화로 갚는다(爲善者는 天而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而報之以禍니라)”라고 했다.


12절 이하는 유명한 유령담인데 엘리바스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유령처럼 나타나서 들려주신 이야기라고 했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햄릿과 맥베드에서 이 유령담을 모방하였다.
엘리바스는 세 친구들 중 경험이 풍부한 노장으로 욥을 꾸짖다가는 달래고 달래다가는 꾸짖는 노련한 말솜씨를 시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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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1차 충고 계속 │ 5장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자, 부르짖어 보게, 그 누가 대답하는가? 하늘에 있는 거룩한 이들 가운데 누구에게 자네는 자네의 얼굴을 돌리려는가?)

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투덜거리다가 망하고 철없는 자는 화를 내다가 죽는다네)

3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나도 어리석은 자가 뿌리를 뻗어 가는 것을 보기는 했네만 그의 집은 삽시간에 망하고 말았네)

4 그 자식들은 평안한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의 아들들이 도움 받을 속이 없어 성문에서 몰매를 맞아도 살려 줄 사람조차 없었네)

5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6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같으니라

8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9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느니라

12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교활한 자의 꾀를 부수시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게 하시는 이)

13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
(그가 슬기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계교로 잡아 그 간교한 꾀를 깨뜨리시면)

14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15 하나님은 곤비한 자를 그들의 입의 칼에서, 강한 자의 손에서 면하게 하시나니

16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

17 볼 찌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 찌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할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22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23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27 볼 찌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 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 찌니라
(여보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찾아낸 것 아닌가! 아무렴, 그러니 자네도 이 말을 귀담아 들어 두고 아무쪼록 마음에 새겨 두게나)


좲 해설 좳

‘거룩한 자들(saints)’(1절)이란 말로 복수를 시사했는데 ‘하늘에 있는 거룩한 이들’ 즉 천사들(angels)을 의미한다.


‘성문(gate)’은 재판정을 뜻한다(4절). 당시 재판이 성문 앞에서 행해졌으므로 성문이란 말이 재판정대신 사용되었다.


엘리바스는 욥이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음을 책망하였다.
그는 욥의 어리석음을 나무라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당한 참변들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설명한 후 그들에게는 변론해 줄 사람조차 없다고 말했다.
욥은 나중에 자신을 변론해 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였다(10:7).


엘리바스는 욥으로 하여금 스스로 죄상을 고백하기를 종용하며 만일 뉘우친다면 하나님의 공정하심을 깨달을 수 있다고 갈파하였다.
선지자 아모스(Amos)도 살고 싶거든 하나님을 찾으라고 했다(아모스 5:6-9).
엘리바스는 자신이 욥의 처지에 있다면 하나님께 매달릴 것이라고 했다(8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편 30:11)


개역성경에는 엘리바스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라고 하여 고난을 인간의 타고난 운명으로 기록했다(7절).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매맞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면서 사람을 교훈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으로 이해했는데 후에 등장할 엘리후의 신학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인류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비를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내려 주시듯 이 같은 자연의 섭리처럼 하나님께서 정의도 섭리한다는 논리를 폈다.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의 지혜로서도 알 수 있다면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슬기로운 사람들의 계교를 잡아 간교한 꾀를 깨뜨리시므로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신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는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이지만 불의한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든다는 예를 들어서 욥으로 하여금 깨닫기를 촉구하였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받게 되면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고 했는데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신학을 엿볼 수 있다.
신명기와 호세아서에서 이 같은 신학을 발견한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신명기 32:39)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 6:1-2)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한 분만 신으로 존재했으므로 정의 신 외에 악의 신이 따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모든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다고 믿었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께 따지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저자는 시편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구원을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믿었다.


욥은 죽음도 실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인생은 죽음으로 계속 사는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자신을 구원하실 분이 계시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7은 완전수이지만 6은 아직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는 수이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19절).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교훈을 물리치지 말라고 욥에게 충고했는데(17절) 이사야의 말을 상기하게 한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엘리바스는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자신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비로소 욥이 갈망하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섭리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이치로도 능히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앞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다고(9절) 한 말과 모순이 된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
고난은 여러 가지인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도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른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고난도 있고, 천재지변으로 많은 사람이 당하는 고난도 있다.
이런 미스터리 한 고난들을 우리의 지혜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숨은 뜻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위대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결코 이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고난 받으려고 왔다. 그는 고난만을 승리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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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응답 │ 6장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3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의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8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10 그러할 찌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

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14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15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16 어름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 찌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
(상인의 무리가 길을 버리고 물을 찾아 광야로 나섰다가는 흔적도 없어져)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데마의 상인들이 찾아 헤매고 세바에서 온 길손들이 애를 태우지만)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 낙심하느니라
(바라고 갔던 일이 어긋나 찾아 간 것이 도리어 어이없듯이)

21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 함이뇨

26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28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 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돌아 와 주게. 너무 억울하게 대하지 말게나. 어서들 돌아 와 주게)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내 혀에 거짓이라도 묻어 있다는 말인가? 내 입은 이미 쓴 맛도 모르게 되었단 말인가?)


좲 해설 좳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조목조목 따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였다.
그는 자신의 원통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원망하였다.
친구에게 더 이상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주장하지 말라면서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밝히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욥에게 있어 하나님은 이제 절망에 빠진 사람의 희망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냥꾼에 비유하면서 자신을 사냥꾼에게 쫓기다 독화살을 맞고 신음하면서 울부짖는 한 마리 동물로 묘사했다.
그의 통곡은 희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뜯을 풀이 있는데 나귀가 울겠는가?”라는 말에서 그의 절망을 짐작할 수 있다.


욥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방관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차라리 죽음으로 인도하여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그는 자살이 죄인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는 “손을 들어 나를 죽여 주신다면”라고 했는데 절망이 극에 다달았음을 본다.
그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잔인한 하나님이었다.


욥은 진정한 친구라면 비록 벗이 신앙을 잃었을 때라도 우정이 변함없어야 한다면서 친구는 사람의 편에 서서 함께 공존하려는 태도로 어떤 재난에 처했을 때도 늘 함께 해야 한다는 인간적인 우정론을 전개했다.
그는 이런 친구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는 세 친구를 쓸 없는 강에 비유하면서 여름에 상인들이 여행 도중에 물을 마시고자 해서 찾지만 물이 마른 강가에서 혀를 차고 만다고 했다.
그는 친구들이 자신이 아쉬울 때 도움이 되지 못함을 탄식했는데 친구들에게 사랑이 부족함을 탄식한 것이다.


세상 친구들은 믿을 수 없다는 그의 탄식(14-30절)은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표현이며 서양 문학에서 종종 인용되는 말이다.
프랑스 작가 모리약의 소설 『사랑의 사막』은 사랑을 갈구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애독되고 있다.
모리약은 “인생은 사막”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욥의 탄식에서 인용한 것이다.


욥에게 친구들은 사막의 골짜기에 해당했고 위급한 나그네가 물을 얻으려 할 때 실망을 제공하는 자들이었다.
친구들에 대한 그의 실망이 컸음을 본다. 욥은 친구들을 향해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 즉 겁내는구나”(21절)라고 하며 그들을 조롱하였다.
그는 친구들이 정직하지 못하다면서 자신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으며 자신에게 대하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친구들의 사랑이 절실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너희는 고아를 제비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27절)라고 격앙된 어조로 비난하였다.
그는 친구들이 정통신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벗을 인신매매라도 감행할 차겁기 짝이 없는 종교인들이라고 공격하였다.


욥의 고난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죄가 부르는 고난으로 친구들이 주장한 인과응보 신학이다.

2,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으로 엘리바스가 이 점을 강조하였다.

3, 신앙을 시험하려는 고난이다.


신앙을 시험하려는 고난(3)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으로 하나님과 사단만이 아는 고난이다.
욥이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는 고난은 제3의 고난에 속한다.
세 친구는 제2의 고난 즉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욥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다.
19세기 덴마크의 역사학자 브란데스(Brandes, 1842-1927)는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고난으로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인격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고난의 의미는 고난을 체험하는 사람의 인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은 실족할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결코 깊은 신앙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고난의 의미가 인격의 문제임을 지적한 것이다.


욥은 자신의 말이 거친 이유를 원통함이 모래보다도 무겁기 때문이라고 했다 (3절).
잠언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분노를 모래에 비하여 그것보다도 무겁다고 했다.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잠언 27:3)


욥은 사냥꾼과도 같은 하나님의 화살이 자신의 몸에 박혔다고 했는데(4절) 이 같은 표현을 시편에서도 발견한다.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
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시편 38:2-3)


욥은 죽기를 바라는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간청하였다(8절).
이런 절망의 상태를 열왕기상에서 발견한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열왕기상 19:4)


욥은 친구와 형제가 자신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비난하였다(14-15절).
잠언에는 친구의 사랑에 관한 구절이 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잠언 17:17)


욥은 친구들의 방문이 마른 시내와 같아서 갈증 난 자신에게 물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나무랐다(17-21절).
이런 절박한 표현을 예레미야에서 발견한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예레미야 15:18)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대해 주기를 간청했는데(28-30절) 과거에도 이런 모진 상황이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시편 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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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응답 계속 │ 7장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2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몸은 구더기와 때로 뒤덮이고 나의 살갗은 굳어졌다가 터지곤 하네)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7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 하리이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할 찌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 하리이다

11 그런즉 내가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12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내가 바다입니까? 바다의 괴물입니까?
어찌하여 파수꾼을 세워 이 몸을 지키십니까?)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침상에라도 누우면 편안하고 잠자리에라도 들면 고통을 잊을까 했더니)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무서운 꿈과 몸서리쳐지는 환상으로 나의 단잠을 깨우십니까?)

15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견딜 수 없는 이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숨통이라도 막혔으면 좋겠습니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17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 찌라도 내가 있지 아니 하리이다


좲 해설 좳

욥은 7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분노에 찬 불평을 한다. 욥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
엘리바스는 욥의 우울한 자연관과 인간에 대한 숙명론을 들어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요구하지만 욥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노예부리는 자에 비유하여 자신이 끊임없는 노역을 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노역으로도 부족해서 자신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무서운 환상으로 괴로움을 주어 한시도 휴식을 취할 수 없도록 하는 잔인한 분이라고 했다.


욥은 하나님께서 시련과 시험 가운데 사람을 보호하시려고 하더라도 시험은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결과라고 투덜거리면서 죽음이 주는 휴식으로 자신이 평안함을 얻게 되면, 이는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결과가 되므로 하나님은 더 이상 자신을 찾을 수 없게 된다는 논리로 하나님의 무정하심을 한탄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한탄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리고 있음을 본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욥은 노예(slave)와 노예부리는 자(slave master)로 비유했다(1-2절).
그는 사람의 존재 이유를 노역으로 보고 노역은 죽음이 주는 자유를 획득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지속된다고 생각했다.
신을 노예 부리는 자로 묘사한 인간 창조설을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발견한다.
욥은 자신을 침상에 누우면 언제 밤이 새려나 하고 기다려지는 숙명적인 노예라고 생각했다(4절).
이 같은 내용을 신명기에서 발견한다.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신명기 28:67)


욥은 자신의 몸이 구더기에 덮힌 것처럼 처참함을 토로하였는데(5절) 이 같은 묘사를 이사야에서 본다.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이사야 14:11)


욥은 자신의 처지가 한낱 입김이라고 여겨졌으며 풀과도 같은 처지라고 생각되었다(7절).


시편에서도 사람을 풀에 비유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시편 90:6)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라 (시편 102:11)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으므로 이제 죽음만 바라 볼 뿐이라고 탄식하였다.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겼고
내가 내 생명을 말기를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하였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나의 명이 조석간에 마치리이다 (이사야 38:12)


욥은 곧 죽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으셔도 찾지 못하실 것이라고 한 말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다(8절).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사무엘하 12:23)


욥은 이제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궁극적인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죽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음부라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 관념이었다.
욥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노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피신처였다.
그는 자신을 가나안 지방 신화에 등장하는 혼돈시대의 한 괴물에 비유하여 음부를 다스리는 바알에 의해 정복당하고, 바알에게 순종하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는 상태로 묘사하였다.


자신을 노예로 비유했듯이 잠자리에서나마 휴식을 취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꿈에서까지 자신을 괴롭히시므로 그럴 바엔 차라리 영원한 휴식인 죽음을 염원하게 되었다.
그에게서 죽음이 영원한 휴식 또는 잠이라는 관념을 발견한다.
욥은 시편을 인용하였다(17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4-5, 144:3)


시편의 저자가 인생을 찬양한 데 반해 욥은 비탄조로 읊조렸다.
그는 하나님의 채찍이 너무 아파서 그분의 눈을 피하려는 노예였다.
무엇 때문에 이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괴롭히느냐는 항의였다.
창조주로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귀하게 여기기보다는 새디스틱하게 자신을 대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차라리 죽기를 바랐는데 이는 하나님께 대한 은근한 반항이었다.
그는 시편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른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시편 6:5)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과녁으로 삼아 활을 쏜다고 생각했는데(20절) 이 같은 표현을 시편에서 발견한다.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시편 21:12)


이제 욥은 더 이상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는다.
여태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그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과 같이 숨이 막 넘어가려는 고난의 절정에 있는 자신을 용서해 주셔야지 자신이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신다손 치더라도 때가 늦는다고 항변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할 점은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의지하려는 태도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차라리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하나님을 부정하면 인생은 그야말로 무미건조해지고 다른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가운데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 비록 고난이 있더라도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밀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늘 사람 앞에서 옳음을 증거 하신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런 신앙의 태도가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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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의 1차 충고 │ 8장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느냐

3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 청컨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 찌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하겠느냐

11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12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찌기 마르느니라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14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 즉

15 그 집을 의지할 찌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뻗어가며

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 갔을 찌라도

18 그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 하신즉

21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좲 해설 좳

빌닷은 젊은 신학자였다. 그도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 정통신학을 고수한 보수주의자였으며 인과응보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이론은 신학자답게 간결한 문장에 논리가 정연하다.
그의 말투는 고난을 당한 친구에게 주는 위로가 아니라 무서운 범죄 사실을 고발하는 검사의 준엄한 논고처럼 들린다.
그는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공정하심을 들어 욥으로 하여금 회개하기를 독려하였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라고 충언하면서 욥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욥을 괴롭히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순되게 하는 것으로 이치에 맞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실제에 있어서 우리들의 관념과는 달리 온전하시거나 공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빌닷은 자신이 경험한 유대인의 전통적 정의와 공정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정은 우주 만상의 질서를 보장한다고 장담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3절)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불공정하게 우주를 섭리하시는 분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그의 말은 창세기의 말씀을 상기하게 한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세기 18:25)


빌닷은 하나님의 세계는 정의와 공정의 토대 위에 건립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신학을 시편과 신명기에서 본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시편 89:1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신명기 32:4)


빌닷은 “자네 아들들이 그에게 죄를 지었으므로 그가 죄 값을 물으신 것이 분명하네”(4절)라는 말로 친구를 위로하기는커녕 정죄하려고 했다.
그는 학문이 앞선 학자일는지는 몰라도 친구에 대해서는 우정과 사랑은 없는 각박한 사람이었다.
친구가 전 재산을 잃고 앓아누웠으며 자식들은 모두 죽었는데 자식들이 죽은 것이 죄 값이라는 말은 욥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 그는 욥의 가장 아픈 부위를 사정없이 찌른 것이다.
빌닷은 병 주고 약 주는 돌팔이의사의 처방을 친구에게 내린 것이다.
빌닷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는 욥이 기대했던 사랑이 없었다.


빌닷은 과연 욥을 이해하지 못한 친구였다.
그는 욥에게 죄가 없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 그분께서 욥이 살 만한 곳을 장만해 주실 것이라고 했는데 그는 욥이 잃어버린 집을 다시 찾게 되면 만족해 할 것으로 오해하였다.
친구의 마음을 젊은 그는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욥은 잃어버린 집을 다시 찾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고난의 이유를 그분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이다.
빌닷은 현인들의 말을 빌어서 자신의 말에 권위를 세우려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진리란 옛적부터 대대로 전해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본래의 진리에 더욱 가까워진다고 믿었으며, 오래 전에 산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보다 바른 지혜의 정수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신명기 32:7)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시편 44:1)


그는 과거 현인들의 말을 경청하라고 욥에게 충고했다(10절).


네가 있기 전에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신명기 4:32)


진리의 원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도 적용된다.
신학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빌닷과는 달리 욥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다.
빌닷은 왕골이나 갈대가 물 없이는 자랄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예로 들어 욥으로 하여금 허황되게 전통신학을 무시하는 가운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하려고 했다.
그는 자연의 이치를 인용하였다.


1, 왕골이 진 펄이 아니면 날 수 없으며 갈대가 물이 없으면 자랄 수 없다고 했다.
이 두 식물은 가뭄이면 가장 먼저 마른다.

2, 거미가 거미줄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명예, 재산, 지위에 의지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 식물이 햇빛을 받아 푸르게 되고 뿌리가 돌 틈에 뻗어갈지라도 한 번 뽑히게 되면 그뿐이다.
하루 밤새 자랐다가 시들고 마는 요나의 박 넝쿨의 비유와 흡사한 이치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번영과 영화는 일장춘몽이다.


빌닷의 말은 시편의 말씀을 상기하게 한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복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편 37:2)


저희는 지붕의 풀과 같을 찌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시편 129:6)


빌닷은 다시 자연의 이치를 예로 들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허망한 인생을 마칠 뿐만 아니라 그런 자들이 흙으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그 흙으로 다른 인간을 빚어내어 아예 그런 자들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드신다고 했다. 아담과 이브의 창조설처럼 흙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는 재료이며, 죽음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똑같은 죄인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신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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