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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은 19세기 말까지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은 19세기 말까지 정치와 사회를 연구하고 그것을 합리적인 조직으로, 따라서 심지어는 만들어낼 수 있는 조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 분야의 가장 창조적인 정신 가운데 하나인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의 저작은, 비록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 같은 다른 문화들을 유럽이 설정한 근대성의 기준에 의해 연구하고 은연중에 평가하기는 했지만, 사회적·문화적 과정들에 대한 통찰에 있어 아직도 기념비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47)
사회사적 자료의 경험적 근거를 마련하고, 당대 사회의 문제들을 설명하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했다는 점에서, ‘사회공학’에 관한 역사상 가장 이론적인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이 세계를 현재의 곤경과 결함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즉 사회주의적 정치가들과 사회민주주의 사상가들은 물론이고 다분히 전체주의적 성향의 인사들에게도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효과적인 관료 제도를 가진 근대국가는 합법적인 폭력 ― 사법과 처벌, 군대의 사용 ― 을 행사할 권리를 수중에 장악함으로써 사적 폭력을 대부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민주주의 시대에 무슨 정책이든 시행하기 위한 고도의 정밀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었다.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과 패전국들 모두의 이기주의는 만족할 만한 균형, 즉 불만과 전쟁의 불씨가 제거된 국제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대다수 국가에서는 다양한 집단의 얄팍한 이해관계 때문에 유권자들이 사회 전반, 특히 약자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었고, 때로는 실제로 그런 상황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제 유럽의 대중은 아주 사소한 계기만 있어도, 비효율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전통적인 가치들과 결별하고, 보다 거창한 가치를 약속하는 다른 이념에 의지하는 데 ― 이것도 유럽적 전통의 일부였다 ― 열중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와 관용이 사라진 자리에 독재와 탄압이 들어섰다.
대체로 이러한 일은, 전통적으로 보다 위계적인 예전의 농촌사회를 얇은 베니어판처럼 덮고 있는 산업화와 교육과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뒤늦게 이루어진 나라들에서 보다 쉽게 일어났다.48)


지금도 그 작품들이 유럽 문화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숱한 음악가와 화가, 과학자와 작가들을 배출함으로써 19세기 말까지 여러 면에서 유럽의 가장 문명화된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던 독일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전제조건들을 동시에 구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독일에서 사상 가장 잔혹하고 효율적인 전체주의 체제인 ‘제3제국’과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불리는 유태인 말살정책이 탄생한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49)
이른바 홀로코스트 ― 이 말은 원래 유대교에서 신에게 동물을 통째로 구워 희생물로 바치는 제사를 뜻하므로, 엄청난 규모의 대량학살에는 맞지 않는다 ― 로 유럽 전역의 유태인뿐만 아니라 흑인과 집시, 동성애자, 정신질환자 등 수백만 명이 죽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체제가 획일성과 절대 복종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도살되었으며, ‘타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희생자로 선택된 것이었다.
어떤 점에서 나치 독일의 지도자들은 1천여 년 동안 유럽 문화의 일부였던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을 이용했지만50), 20세기에 그들은 이를 시행하기 위해 그들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사이비 과학적 전문용어를 갖다 붙이는 동시에 선진 기술과 근대국가의 관료기구 같은 근대성의 도구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51)


그렇지만 이에 필적하는 전체주의적인 견해들이 다른 곳에서도 대두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사상인 인본주의와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에서는 1920년대 초부터 파시스트 독재가 20여 년 간 지배했고, 무솔리니 시대의 막판에 가서이긴 하지만 인종주의 정책의 매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분명한 전체주의적 경향에 뒤이어 희생양 이데올로기들이 나타났고, 때로는 프랑스와 다른 중유럽 국가들에서 보듯이 반유대주의의 모습으로 표면화되기도 했다.
벨기에와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서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중유럽과 동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원칙들을 거의 무시하거나 완전히 무시하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옹호하는 집단들이 있었다.


요컨대, 유럽 전역에서 선·악의 가능성을 모두 가진 ‘근대성’의 복합 문화가 등장했고,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민주주의에서 독재가 탄생하고, 객관적으로 보면 역사상 가장 잘 교육받고 번영을 구가한 사회에서 전쟁과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열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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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창설자 플로티누스Plotinus(204~270)는 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는 아주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부터 로마 군인들의 힘이 하늘 옾은 줄 모르고 쑥쑥 자라더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황제를 선출했으며 나중에는 황제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를 많은 권리금을 받고 팔았다.
중이 고기맛을 안 것처럼 군인들이 돈벌이에 전념했으니 자연히 국경을 지키는 일이 허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틈을 노린 독일군이 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가해왔으며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공격을 감행하면서 잃어버린 그들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고 했다.
전쟁과 흑사병이 이탈리아 인구를 삼분의 일로 줄어들게 했으며 정부는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세금을 올렸으므로 과중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달아났고 군인들은 시민들이 달아나지 않도록 감시하기에 바빴다.
이런 어지러운 시기에 위대한 철학자 플로티누스가 태어난 것이다.

플로티누스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디오클레티안Diocletian과 콘스탄티누스가 왕국을 재정비하면서 질서를 회복했는데 이런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지만 플로티투스의 글에는 시대에 관한 암울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선과 아름다움이 있는 영원한 세계를 사유했는데 아마 대단한 낙천주의자였거나 초현실주의자였던 것 같았다.
낙천주의자답게 그는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인들을 차별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잘 어울렸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가망 없다고 판단했으므로 희망이 있는 정신세계에만 머무르려고 했다.

그가 추구한 정신세계란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망한 후에야 즐길 수 있는 하늘나라였지만 그에게는 환상과도 같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반대되는 관념의 이데아 세계였다.
딘 인제Dean Inge는 플로티누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플라톤주의는 부분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발기지 않고서는 플라톤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했다.
플로티누스 안에서 플라톤은 부활을 맞았다.

플로티누스는 중세 기독교 신학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가톨릭 신학에서 중요한 인물으로 인정받고 있다.
플로티누스가 설명한 이데아 세계는 아주 아름다운데 단테Dante가 낙원을 찬양한 것에 해당한다.
플로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가장 정련된 환상으로는 순수하게 응집된 거침없는 노래가 사파이어 색들로 아롱지는 왕좌에 앉아 있는 그분 앞에서 불려진다."

사파이어 광채가 아롱지는 왕좌 앞에서 노래하는 플로티누스에게 당시 군국주의의 부패 따위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럿셀은 플로티누스에 고나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주가 반사하는 것에 의해 수반되는 기쁨과 비탄만이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산출하며, 사람은 즐거워하는 절망주의자이거나 비애스러운 희망주의자인데 플로티누스는 후자에 속한다."

비애스러운 희망주의자 플로티누스는 유물론을 배척했으며 플라톤의 이론을 아주 선명하도록 재현했고 영혼과 몸에 관한 그의 이원론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욱 더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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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전래


연경사신 이광정이 1603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 坤輿萬國全圖』(1602)를 들여오자 사람들은 천지의 중심이 중화中華가 아니라 지중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630년에는 정두원이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紅夷砲, 천리경千里鏡, 자명종自鳴鐘 등 서양 기계와 함께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한역된 『천문서 天文書』, 『직방외기 職方外紀』 등 서학 서적을 들여왔다.
『직방외기』는 한민족 외에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 민족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편술된 책이었다.


서양에 있어 민족, 즉 nation이란 현대어는 러틴어의 natio에서 유래하며 ‘태어나다 nascor’에서 파생했다.
Natio는 출생 조건이 비슷한 사람들의 집단이란 뜻이다.
보통 외국인 집단을 지칭했다.
로마인이라고 할 때 그들은 populus Romanus라고 칭했다.
그리스의 폴리스는 자유민으로 구성되고 비자유인은 ethnos라고 하여 이반 민족과 노예를 포함한 일반 민중을 가리켰다.
따라서 그리스어 ethnos와 라틴어 natio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제국에서 정복된 민족이나 국가는 처음부터 로마인이 되지 못했고 시민의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시민civitas으로 칭했다.
오늘 날의 의미로서의 민족국가가 태어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프랑스 혁명은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국가 구성원에게 불러 일으켰다.
루소는 국가가 독재 군주나 지배계급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국가는 국민과 일치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의 기본 이념을 제공했다.
루소 이전에는 군주 사이의 분규가 곧 국가의 전쟁이었고 일반 시민은 전쟁 당사자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서양 과학과 사상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 학자들은 종래와는 다른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정제두는 “오늘날에 와서 주자를 말하는 이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자에 가탁假託한 것이요, 주자에 가탁한 것이 아니라 주자에 부회附會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理보다는 기氣를 높이고 실천성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앞세웠다.
성리학은 성즉리性卽理, 곧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치라고 분 데 반해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 곧 마음이 바로 이치라는 입장이다.
이는 객관적 사물이 아니라 주관적 심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정제두는 『하곡집 霞谷集』에 적었다.

이른바 진지眞至의 의리, 천리天理의 정正이 과연 말, 소, 닭, 개에 있다고 하여 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천지만물은 인사人事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 개개의 사물에 따라 하나하나를 결정하고, 그때그때에 사물을 처리하는 것이 내 마음에 있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을 위시하여 북학파라고 불리우는 학자들은 양명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양명학은 실생활과 유리된 공리 공론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존중하는 실학에 영향을 미쳤다.
이익과 정약용은 양지良知 양능良能, 즉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간의 사유 능력과 실천 능력이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조요한의 말로 하나의 높은 님을 존경하게 된다고 보았다.
류승국은 『철학사상의 제문제 II - 한국 철학의 근원탐구』(1984)에서 정하상의 『상재상서 上宰相書』도 이 양지 양능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 도입된 서학과 전통 유학의 관계를 양명학이 매개한 것으로 보았다.
당시 서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권에서 배제된 기호畿湖 남인南人 학자들이었다.
이 시기는 권력의 독점과 부패 그리고 신분 차별의 심화와 대중의 궁핍으로 민심이 집권층을 떠난 때였으므로 현실 개혁을 의도한 선비들에게 서양의 평등사상이 개혁의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서학이 도입되면서 성호 이익과 그의 학풍을 이은 성호학파와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로 이어지는 북학파의 활동 속에서 서학연구가 정착되었다.
담헌 홍대용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개명을 괴한 청나라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연암 박지원은 담헌을 이어 지전설地轉設을 주장하며 오행에 대한 상생상극의 이론을 부정하고 그에 따르는 갖가지 미신적 사고에 젖어 있던 당시의 우주관과 인생관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생활방식을 지향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젊어서 『양반전』을 비롯한 9편의 소설을 통해 사회의 불합리한 측면을 풍자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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