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m(121~80)는 선량한 황제 안토니무스 피우스Antonimus Pius의 의붓자식으로 황제는 그의 아저씨이면서 장인이었고, 그는 161년에 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명상록Meditations을 출간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었는데 명상록에는 시민들을 위한 황제의 짐스러운 의무들이 잔뜩 기록되어 있다.
그의 외아들 콤모두스Commodus는 나중에 못된 황제들 가운데 가장 못된 황제가 되어 아비와 비교가 되었으며, 스토익주의의 간판스타 아우렐리우스는 자식을 교화시키지 못한 과오를 남기고 말았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인들을 처벌했는데 그들이 국교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으며, 그는 정치적으로 국교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고, 종교를 이용하면 군인들을 다스리기가 아주 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는 지하세계에서 빠르게 교세를 넓혀나갔으며 교세가 날로 번창하자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누이가 세례를 받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아울레리우스는 조용한 시골로 은퇴하고 싶어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의 명상록 일부는 근무 중에 쓰여진 것인데 지나친 업무가 그의 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에픽테투스는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땅에 속하는 육체를 가진 죄수들이라고 주장했으며 아울레리우스는 "너는 육체를 가진 작은 혼이다"고 했다.
그는 제우스 신도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없겠지만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신성 일부를 주었다면서 신은 인간의 아버지이고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기 때문에 "나는 아테네의 시민이다"라고 말하든가, "나는 로마의 시민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나는 우주의 시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제우스 신이 통치하는 우주 정부의 시민임을 자각하라고 가르쳤다.
에픽테투스는 "군인들은 시저Caesar 위로 누구도 있을 수 없다고 맹세하면서 그에게 충성을 표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먼저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적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정론을 펴면서 우리는 인생이란 드라마에서 배역을 맡은 배우처럼 신으로부터 각각 배역을 부여받았으며 배역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각자의 배역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마치 연극 연출가가 배우들에게 하는 상투적인 말처럼 들린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자신은 디오게네투스Diogenetus로부터 마술사들한테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고 배웠으며, 루스티쿠스Rusticus로부터는 시를 써서는 안된다고 배웠고, 섹스투스Sextus로부터는 꾸밈이 없는 엄숙함을 배웠으며, 문법을 가르친 알렉산더로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문법을 교정하는 것을 배웠고, 플라톤을 지지한 알렉산더로부터 언론에 응답하는 것을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으며, 그리고 의붓아버지로부터는 소년들과 동성애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혼이 불멸하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인들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순간 네가 죽을 수 있는 것이니 너는 너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피도록 하라."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인생을 아울레리우스는 선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조화는 신의 뜻에 우리가 복종할 때 가능하다고 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City of God>에 나타난 내용의 일부를 그가 주장한 것이다.
그는 신이 사람에게 특별한 마귀를 보내 사람들로 하여금 마귀를 따르도록 했다고 했는데 이런 주장은 기독교에서 사람을 인도하는 천사로 나타났으며 예수가 사망한 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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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

 
네오-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창설자 플로티누스Plotinus(204~270)는 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는 아주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부터 로마 군인들의 힘이 하늘 옾은 줄 모르고 쑥쑥 자라더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황제를 선출했으며 나중에는 황제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를 많은 권리금을 받고 팔았다.
중이 고기맛을 안 것처럼 군인들이 돈벌이에 전념했으니 자연히 국경을 지키는 일이 허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틈을 노린 독일군이 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가해왔으며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공격을 감행하면서 잃어버린 그들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고 했다.
전쟁과 흑사병이 이탈리아 인구를 삼분의 일로 줄어들게 했으며 정부는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세금을 올렸으므로 과중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달아났고 군인들은 시민들이 달아나지 않도록 감시하기에 바빴다.
이런 어지러운 시기에 위대한 철학자 플로티누스가 태어난 것이다.

플로티누스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디오클레티안Diocletian과 콘스탄티누스가 왕국을 재정비하면서 질서를 회복했는데 이런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지만 플로티투스의 글에는 시대에 관한 암울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선과 아름다움이 있는 영원한 세계를 사유했는데 아마 대단한 낙천주의자였거나 초현실주의자였던 것 같았다.
낙천주의자답게 그는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인들을 차별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잘 어울렸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가망 없다고 판단했으므로 희망이 있는 정신세계에만 머무르려고 했다.

그가 추구한 정신세계란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망한 후에야 즐길 수 있는 하늘나라였지만 그에게는 환상과도 같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반대되는 관념의 이데아 세계였다.
딘 인제Dean Inge는 플로티누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플라톤주의는 부분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발기지 않고서는 플라톤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했다.
플로티누스 안에서 플라톤은 부활을 맞았다.

플로티누스는 중세 기독교 신학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가톨릭 신학에서 중요한 인물으로 인정받고 있다.
플로티누스가 설명한 이데아 세계는 아주 아름다운데 단테Dante가 낙원을 찬양한 것에 해당한다.
플로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가장 정련된 환상으로는 순수하게 응집된 거침없는 노래가 사파이어 색들로 아롱지는 왕좌에 앉아 있는 그분 앞에서 불려진다."

사파이어 광채가 아롱지는 왕좌 앞에서 노래하는 플로티누스에게 당시 군국주의의 부패 따위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럿셀은 플로티누스에 고나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주가 반사하는 것에 의해 수반되는 기쁨과 비탄만이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산출하며, 사람은 즐거워하는 절망주의자이거나 비애스러운 희망주의자인데 플로티누스는 후자에 속한다."

비애스러운 희망주의자 플로티누스는 유물론을 배척했으며 플라톤의 이론을 아주 선명하도록 재현했고 영혼과 몸에 관한 그의 이원론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욱 더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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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전래


연경사신 이광정이 1603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 坤輿萬國全圖』(1602)를 들여오자 사람들은 천지의 중심이 중화中華가 아니라 지중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630년에는 정두원이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紅夷砲, 천리경千里鏡, 자명종自鳴鐘 등 서양 기계와 함께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한역된 『천문서 天文書』, 『직방외기 職方外紀』 등 서학 서적을 들여왔다.
『직방외기』는 한민족 외에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 민족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편술된 책이었다.

서양에 있어 민족, 즉 nation이란 현대어는 러틴어의 natio에서 유래하며 ‘태어나다 nascor’에서 파생했다.
Natio는 출생 조건이 비슷한 사람들의 집단이란 뜻이다.
보통 외국인 집단을 지칭했다.
로마인이라고 할 때 그들은 populus Romanus라고 칭했다.
그리스의 폴리스는 자유민으로 구성되고 비자유인은 ethnos라고 하여 이반 민족과 노예를 포함한 일반 민중을 가리켰다.
따라서 그리스어 ethnos와 라틴어 natio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제국에서 정복된 민족이나 국가는 처음부터 로마인이 되지 못했고 시민의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시민civitas으로 칭했다.
오늘 날의 의미로서의 민족국가가 태어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프랑스 혁명은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국가 구성원에게 불러 일으켰다.
루소는 국가가 독재 군주나 지배계급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국가는 국민과 일치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의 기본 이념을 제공했다.
루소 이전에는 군주 사이의 분규가 곧 국가의 전쟁이었고 일반 시민은 전쟁 당사자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서양 과학과 사상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 학자들은 종래와는 다른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정제두는 “오늘날에 와서 주자를 말하는 이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자에 가탁假託한 것이요, 주자에 가탁한 것이 아니라 주자에 부회附會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理보다는 기氣를 높이고 실천성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앞세웠다.
성리학은 성즉리性卽理, 곧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치라고 분 데 반해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 곧 마음이 바로 이치라는 입장이다.
이는 객관적 사물이 아니라 주관적 심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정제두는 『하곡집 霞谷集』에 적었다.

이른바 진지眞至의 의리, 천리天理의 정正이 과연 말, 소, 닭, 개에 있다고 하여 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천지만물은 인사人事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 개개의 사물에 따라 하나하나를 결정하고, 그때그때에 사물을 처리하는 것이 내 마음에 있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을 위시하여 북학파라고 불리우는 학자들은 양명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양명학은 실생활과 유리된 공리 공론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존중하는 실학에 영향을 미쳤다.
이익과 정약용은 양지良知 양능良能, 즉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간의 사유 능력과 실천 능력이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조요한의 말로 하나의 높은 님을 존경하게 된다고 보았다.
류승국은 『철학사상의 제문제 II - 한국 철학의 근원탐구』(1984)에서 정하상의 『상재상서 上宰相書』도 이 양지 양능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 도입된 서학과 전통 유학의 관계를 양명학이 매개한 것으로 보았다.
당시 서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권에서 배제된 기호畿湖 남인南人 학자들이었다.
이 시기는 권력의 독점과 부패 그리고 신분 차별의 심화와 대중의 궁핍으로 민심이 집권층을 떠난 때였으므로 현실 개혁을 의도한 선비들에게 서양의 평등사상이 개혁의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서학이 도입되면서 성호 이익과 그의 학풍을 이은 성호학파와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로 이어지는 북학파의 활동 속에서 서학연구가 정착되었다.
담헌 홍대용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개명을 괴한 청나라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연암 박지원은 담헌을 이어 지전설地轉設을 주장하며 오행에 대한 상생상극의 이론을 부정하고 그에 따르는 갖가지 미신적 사고에 젖어 있던 당시의 우주관과 인생관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생활방식을 지향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젊어서 『양반전』을 비롯한 9편의 소설을 통해 사회의 불합리한 측면을 풍자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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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정신의 재창조


18세기 후반 로코코는 신고전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고전주의의 이상은 명확한 윤곽선과 단순한 표현, 그리고 우아함보다는 간결하고 솔직함에 있었다.
사람들은 실내를 장식하는 달콤한 감상과 에로티시즘에 싫증을 느꼈다.
고대로의 복귀는 처음에 로마적인 것보다는 그리스적인 것을 지향했다.
그것은 남부 이탈리아 및 폼페이에서의 고고학적 발견과 독일의 미술사학자이자 고고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이론과 그의 동료 콜렉터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빙켈만은 고전적 이상을 그리스 천재가 만들어낸 것으로 보았으며 그리스 미술과 로마에서의 모작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최초의 역사가가 되었다.
그의 저서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하여>는 로마로 떠나기 바로 직전인 1755년 5월에 드레스덴에서 출판되었다.
“이상적 예술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고대의 모방”이라고 주장한 이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유럽인의 애독서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이론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빙켈만은 이 책을 출간한 후 이탈리아로 가서 1759~64년에 걸쳐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비안코니 서한>(사후 간행),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브륄 서한>(1762년 간행), <최근의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퓌슬리 보고>(1764년 간행) 등 세 편의 보고서를 집필했다.
헤르쿨라네움(현재 이탈리아 명칭으로 에르콜라노)은 나폴리 동남쪽 베수비우스 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로서 기원전 79년 8월 24일 베수비우스 산 분화 때 폼페이와 함께 매몰되었지만 폼페이와 달리 용암이 응회암으로 변했으므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빙켈만은 <라오콘>을 고대의 걸작으로 꼽았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왕자이자 제사장으로, 그리스군 목마의 비밀을 트로이인에게 알려준 죄로 신으로부터 벌을 받고 두 아들과 함께 큰 뱀에 감겨 죽었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그리스군의 목마를 라오콘이 제단에 공물로 바치려 하는 순간 아폴로가 보낸 두 마리의 큰 뱀이 라오콘과 두 아이를 습격했다.
아버지와 작은 아들은 이미 뱀에 물려 숨이 끓어질 지경이고, 큰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뱀의 공격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빙켈만은 <라오콘>을 찬양해마지 않았다.

“그리스 걸작들의 일반적이며 탁월한 특징은 결국 자세와 표현에서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이다.
바다의 수면이 사납게 날뛰어도 그 심해는 늘 평온한 것처럼 그리스 조상들은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위대한 영혼을 나타냈다.
이 영혼은 격렬한 고통 속에 있는 <라오콘> 군상의 얼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고통은 얼굴뿐 아니라 육체의 모든 근육과 힘줄에도 나타나 있어서, 우리는 얼굴이나 육체의 다른 부분을 보지 않고 고통으로 움츠러든 하복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얼굴이나 전체 자세에서는 전혀 고통에 찬 격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의 고통은 우리의 영혼에까지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위대한 이처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고대를 모방하라고 권한 빙켈만은 자신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생명력 없는 모방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정신의 재창조를 원했으며, 종종 인용되는 그리스 미술의 특징에 관해 그가 언급한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는 미적 요소와 더불어 윤리적 요소에도 적용되었다.
빙켈만은 1768년 트리에스테에서 살해되었는데, 여인숙에 같이 묵은 손님에게 금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인 듯하다.

빙켈만이 그리스 정신의 재창조를 역설하기 250년 전에 미켈란젤로는 이미 <다윗>을 통해 시위했다.
현재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는 그리스 정신이 좀더 강조된 작품들이다.
일반적으로 고대에 대한 관심이 15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그에 대한 관심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14세기 중반 피렌체의 유명한 시인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는 고대의 문헌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보통 사람들도 고대에 대한 동경과 고대 문물에 대한 존경으로 값비싼 골동품을 구입하고 싶어 했다.
고대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신분계급을 표시하는 메달을 가자로 만들어 고대 유물이라고 파는 상인이 생길 정도였고 작은 고대 조각품과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수집하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고대 조각품들이 발굴되고 알려지면서부터 고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고 미켈란젤로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현재 바티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로>가 이 시기에 발굴되었고 얼마 후 1506년 1월 <라오콘>이 에스퀼리누스의 티투스 우물가에서 발견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라오콘>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의 줄리아노와 로렌초의 무덤을 장식할 때 <라오콘>의 트로이 제사장의 얼굴을 상기하면서 벽에 그 얼굴을 드로잉했다.
그는 벽에 많은 드로잉을 남겼고 이는 그가 작품을 제작할 때 고전의 요소를 규범으로 삼았음을 알게 해준다.

<라오콘>은 엘 그레코에게도 영감을 주어 그로하여금 1610년경에 <라오콘>을 그리게 했다.
엘 그레코는 뱀에 감겨 죽어가는 라오콘과 두 아들을 묘사하면서 오른편에 세 인물을 삽입했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상징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짐작컨대 세 사람의 운명을 상징하거나 아니면 그리스에 호의를 베풀어 트로이가 파괴될 수 있도록 도운 세 여신인 것 같다.
하늘에 일기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세 여신의 전능한 힘에 의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등장인물들은 엘 그레코 특유의 가늘고 기다란 모습이다.

에스파냐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로 주로 톨레도에서 활동한 그는 그리스인을 뜻하는 엘 그레코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이다.
그는 작품에 서명할 때 늘 그리스 문자로 표기했고, 종종 크레타인을 뜻하는 크레스Kres를 덧붙이가도 했다.
티치아노의 제자였던 그는 틴토렌토와 바사노 등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그의 양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지만 신화적 주제를 다룬 <라오콘>은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또 다른 이례적 작품으로 만년에 그린 <톨레도 풍경>이 있는데, 이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순수 풍경화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화가로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많은 대가들이 따뜻한 적색과 갈색 계통의 색채를 선호하던 당시에 차갑고 푸른 색채와 은회색조를 선택한 데 있다.
차가운 색조, 거친 광선 효과, 자유분방한 붓질, 전통 규범에 대한 경시와 고통을 겪는 인물상의 정신성을 작품 속에 나타낸 엘 그레코의 천재성은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엘 그레코의 회화에 대한 관심이 부활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그의 극도로 반자연주의적인 양식은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매너리즘적인 비례 관계의 불균형화(가늘고 길게 늘인 인체, 형태의 데포르메)는 화가가 의도적으로 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스스로 물려받은 다양한 예술적 전통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정신적 표현에 더할 나위 없는 효과적 도구가 되는, 자신만의 개인적 미학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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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 I Wahrheit und Methode』(1960)에서 칸트가 미에 대하여, 경험적이 아니라 경험 독립적으로 갖게 되는 관심에 관하여 묻는 것이라면, 이 물음은 감성적 쾌감의 무관심성Interesselosigkeit에 관한 근본적인 규정에 비하여 새로운 물음일 것이며, 취미의 입장으로부터 천재의 입장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동일한 이론이 취미와 천재 두 현상의 연관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본 가다머는 이 이론의 토대를 확고히 다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취미의 비평’을 감각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칸트가 감성적으로 판단된 것의 현존 방식에 관한 물음(가다머의 말로, 또한 그와 더불어서 자연미와 예술미의 관계에 관한 모든 문제 영역)을 아직 제기하지 않고 있음을 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
가다머는 “이러한 물음의 차원은 우리가 취미의 입장에 종지부를 찍게 될 때,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초월해서 생각하게 될 때 필연적으로 열리게 된다.
관심이 깃들인 미의 의미는 칸트 미학이 원래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이다.
관심이 깃들인 미의 의미는 자연과 예술에 대해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자연미와 예술미의 비교는 바로 미학의 문제들을 전개시키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43-1)라고 했다.
칸트의 시스템은 한 이율배반이 비판 철학의 원리들에서 용해되는 것과 더불어 하나의 취미의 변증법이 있음을 요한다.
이것은 취미판단 안에서 개념들의 그 역할에 관한 역설로서 판단이 개념들에 연류되었다면 그것은 이성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아닌 이성들에 의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판단이 개념들에 연류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것인 불일치의 주제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해결책은 그런 판단들에 어떤 결정적인 개념도 연류되지 않고 오직 초감각적인 것의 그 비결정적인 개념이나 그 판단하는 주체와 마찬가지로 그 대상에 잠재하는 자체로서의 것이 연류되는 것이다.
고상한 것에 대한 칸트의 분석은 전혀 다른 근거로 진행된다.
본질적으로 그는 이런 만족의 종들을 이성 자체의 장려함의 느낌으로 설명하며 인간의 도덕적 운명에 비했는데 이는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났다.
첫째, 우리가 자연에서 대단히 거대한 것(수학적인 고상한)을 직면했을 때 우리의 상상은 그것을 이해하는 과제 안에서 주춤거리며, 우리는 영원한 완전성을 향해 이르는 개념들의 이성의 우월을 알게 된다.
둘째, 우리가 압도적으로 강력한 것(동력적인 고상한)에 직면했을 때 경험적 우리 자신들의 연약함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가치를 대조에 의해서 다시금 도덕적 존재들로 알게 해준다.
이런 분석에서 그리고 자연에서의 미에 관한 그의 최종 비평에서 칸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가 다른 수준에서 영역들의 자율을 위해 투쟁해온 그 영역들 사이의 연결인 한 수준을 향해 재정립하려고 했다.
그는 일찍이 선험적 이해의 개념들과 도덕성의 영역으로 한 것과 같이 여기서도 그 자체 발아래 있는 미적 기본들, 욕망의 독립과 지식 혹은 도덕성의 관심을 보여주기를 시도했다.
미에 대한 경험이 아직은 자연의 오브제들을 우리에게 그것들이 우주적 이성의 인공물들인 양 알 수 있는 것들로 보이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리고 고상한 것에 대한 경험이 자연적 무형성과 두려움의 용도를 이성 그 자체로 찬양하게 만들기 때문에 마지막 분석에서 이런 미적 가치들이 하나의 도덕적 목적과 도덕적 요구, 인간 정신을 높이고 고상하게 하는 것을 만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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