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주의Constructivism

구성주의는 많은 현대 미술 용어와 마찬가지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용어의 사용도 일원화되어 있지 않다.
구성주의와 구성주의적Constructive이라는 용어는 1900년대와 1910년대에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이지 않으며 치밀하게 구성된 미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성주의로 분류된 작품이 모두 현재에 구성주의로 일컬어지는 범주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에는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며,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났다.
현재는 후자를 국제적 구성주의 또는 유럽 구성주의라고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한다.

러시아 구성주의가 매우 구체적인 명칭인 반면 유럽 구성주의는 의미가 모호하며 점차 비재현적, 또는 비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광범위한 화파와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동일한 명칭 때문에 두 운동은 근본적으로 하나인 이론의 두 가지 갈래인 것처럼 논의되었으며 이로 인해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티븐 맨은 1974년 구성주의 관련 자료 모음집인 『구성주의 전통 The Tradition of Constructivism』에서 러시아 화가, 조각가, 그래픽 디자이너 엘 리시츠키El Lissitzky(1890~1941)가 구성주의와 ‘새로운 인간 New Man’을 동일시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적었다.
“구성주의에 대해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은 구성주의가 인간의 감정과 외부 세계 사이의 수동적으로 부여된 조화를 배격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구성주의는 인간을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세계 속에서 스스로 질서를 창조하는 자로 보며, 예술가는 이런 질서의 유형을 결정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주요 유럽 구성주의 화파 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을 수용한 화파는 전혀 없다.
오히려 유럽 구성주의의 목적과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선언문을 통해 ‘순수 미술’이라고 비판한 종류의 것이었다.

유럽 구성주의는 전통 미술의 근본적 토대를 무분별하게 공격한 다다이즘, 그리고 무의식적인 창조와 자동주의라는 초현실주의 강령에서 지침을 찾은 충동적이고 직관적인 구성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다.
구성주의는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와는 달리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미적 원리와 일치하는 의식적이고 신중한 구성을 지지했다.
유럽 구성주의 예술가 단체의 최초의 공식 선언은 1922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국제 진보예술가대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1883~1931), 리시츠키와 한스 리히터Hans Richter(1888~1976)는 국제 구성주의 분파의 이름으로 연합 시위를 벌였다.
1920년대에는 공식적인 조직은 형성되지 않았지만 구성주의 원리를 문학, 건축, 영화에 확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많은 구성주의 예술가들이 2차세계대전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에 정착했다.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나움 가보Naum Gabo(1890~1977), 나움 가보의 형 러시아계 프랑스 조각가 앙투안 페브스네르Antoine Pevsner(1886~1962), 항가리계 미국 화가이며 조각가 라슬로 모흘리-나기Laszlo Moholy-Nagy(1895~1946), 독일 건축가로 바우하우스의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 네덜란드 화가 피트 몬드리안 등이 영국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데임 바바라 헵워스Dame Barbara Hepworth(1903~75), 벤 니컬슨Ben Nicholson(1894~1982), 헨리 무어Henry Moore(1898~1986), 비평가 허버트 리드Sir Herbert Read(1893~1968)와 교류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1950년대까지 영국에서는 독자적인 구성주의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7년 가보는 벤 니컬슨, 젊은 건축가 J. L. 마틴과 공동으로 ‘구성주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은 자료 모음집인 『서클』을 편집했다.
가보는 여기에 ‘미술에 있어서의 구성주의적 이념’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가보는 ‘구성주의적 이념’을 확장시켜 이를 과학, 예술 또는 기타 영역에서의 ‘뛰어난 창의력’과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입체주의가 자연주의적 미술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입체주의 이후 미술계에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자연주의적 미술을 복원시킬 토대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적었다.
“대상 세계의 외관을 재현하지 않는 미술이라는 것은 예전에는 결코 생각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입체주의 이후 미술의 회생은 매우 힘들었다.
구성주의 이념은 선, 색채, 형태와 같은 시각예술 요소는 외부 세계와 무관한 독자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한다.
즉 이러한 요소들의 생명과 활동은 이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조절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이는 단어와 숫자처럼 공리적인 이유 때문에 관습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즉각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법칙이 드러나면서 미술의 영역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그 동안 간과되었던 인간의 충동과 감정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요소들은 문학이나 시 등으로도 가능한 이미지의 연상을 위해 잘못 사용되어 왔다.”

가보의 주장은 구성주의의 의미를 확대시켜 표현적 추상을 비롯한 모든 비재현적인 추상 미술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는 칸딘스키의 생각과 유사하며 일반적으로 정서적 표현이 배제된 것으로 여겨지는 구성주의보다는 표현적 추상에 적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고대 이탈리아의 사실주의
 

고대 이탈리아 조각들은 좀더 사실주의로 달라졌는데 기원전 1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라린가토레 L'Arringatore>를 보면 에트루리아인의 솜씨로 로마 고위공무원을 묘사한 작품으로 보인다.
청동으로 제작한 작품의 모델은 아우루스 메텔루스Aulus Metellus로서 그는 오른손을 들어 군중에게 답례하는 제스추어를 취하고 있는데 정치가들의 상투적인 모습이다.
특기할 점은 이 조각에서 로마인의 고유한 제작방법이 나타난 점이고, 조각가들은 사람을 진지하고 개성적인 모습으로 제작하면서 모델의 나이와 인품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정교하게 했으며 조각을 실제 사람의 크기로 제작했으므로 이런 느낌은 더욱 더 힘있게 나타났다.

로마인의 흉상이라고 단정해 말할 수 있는 작품을 하나 더 소개한다면 기원전 80년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로마인의 흉상 Portrait of a Roman>이다.
이 조각은 로마인의 고유한 건축이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인의 진전된 조각과 비교할 만했으며 조각가는 심리적인 요소까지도 얼굴에 섬세하게 묘사할 줄 알았다.
로마인은 사람의 얼굴을 진지하고 엄숙하며 개성있게 제작할 줄 알았다.
이런 인간의 신체에 대한 그들의 세심한 관찰은 르네상스 대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르네상스 주역들은 해부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실주의의 정상에서 운동에 의한 근육의 형상까지도 묘사할 줄 알았는데 미켈란젤로의 경우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했다.

조각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놀라울 만한 진전이 있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로마의 에스퀼리네Esquiline의 집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소위 말하는 오디세이 풍경화들Odyssey Landscapes로서 8쪽으로 나눠진 그림에는 율리시즈Ulysses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묘사되었으며, 바다와 공간의 엷은 색은 입체감을 주고 관람자로 하여금 따사로운 지중해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 자신 놀라움을 금치 못한 작품은 50년경에 그려진 정물화 <복숭아와 유리항아리 Peacjes and Glass Jar>이다.
유리항아리에 반쯤 들어있는 물을 작자미상의 화가는 실제처럼 묘사하면서 가지에 달린 복숭아를 주제로 사용했다.
그림이 낡아 보수한 정물화에서 색들의 적절한 대비를 볼 수 있는데 마치 오늘날의 화가가 그린 것처럼 느껴진다.
화가의 명암에 대한 부적당한 묘사가 그림에 나타나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2천 년 전에 그려진 것을 감안한다면 주제와 채색의 뛰어남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초현실주의Surrealism


분석-입체주의에 의한 작품은 각양각색으로 나타났으며, 이탈리아 미래주의 예술가들 움베르토 보초니Umberto Boccioni(1882~1916), 카를로 카르라Carlo Carra(1881~1966), 안토니오 상데리아Antonio Sant’Elia 등은 이를 동시성과 조형적 다이나미즘으로 발전시켰다.
입체주의의 영향은 재현으로서의 형체의 가치를 일체 부정하고 예술의 가치를 순수 창조행위에 귀속시킨 것으로 이런 점에서 입체주의자들은 여러 예술 장르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초현실주의는 입체주의의 제 전제의 필연적 발전이었다.
초현실주의가 입체주의의 이론가 아폴리네르에 의해서 발견된 것은 이런 의미에서 당연했다.
초현실주의란 말은 아폴리네르가 1917년에 쓴 희극 『티레시아의 유방 Les Mammelles de Tiresias』의 부제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는 부제에서 ‘초현실극drams surrealiste’이란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다.

초현실주의는 미술, 문학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자 철학적 견해의 표현이었다.
몇몇 비평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은 초현실주의를 양차 대전 사이에 일어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정신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초현실주의의 핵심은 현실이란 논리적인 사고에 의해 이해 가능한 사건들의 질서 잡힌 체계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우연’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은 무의식에 대한 비논리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이런 통찰은 특정한 비논리적인 자동주의sutomatism 방법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동주의란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손의 움직임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회화나 드로잉 또는 저술이나 그 외 여러 작품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여러 가지 선례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8세기 영국 수채화가 알렉산더 코즌스의 ‘얼룩 드로잉’이다.
코즌스는 풍경의 형상을 암시하기 위해 종이 위에 우연히 생긴 얼룩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은 1924년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초현실주의를 정의했다.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순수한 심리적 자동주의로 이를 통해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사고의 진정한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은 이성의 통제가 없는 곳에서 그리고 모든 미학적 혹은 도덕적 선입견의 박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백과사전: 철학 용어. 초현실주의는 이제까지 소흘히 해왔던 연상 작용과 관련된 최상의 사고 작용을 믿는다.
그것은 모든 다른 정신적인 메커니즘을 없애고, 그 대신에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 그 자체를 해결방법으로 제시하려 한다.”

초현실주의는 브르통을 비롯하여 루이 아라공Louis Aragon(1897~), 폴 엘뤼아르Paul Eluard(1895~1952), 장 콕토Jean Cocteau,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등에 의해 이론으로 무장되었고 시인 브르통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져 그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원리를 비합리주의의 이론인 베르그송, 프로이트 및 실존주의로부터 끌어왔다.
브르통은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를 “구두로, 기술로, 혹은 기타 수단으로 사고의 실제 과정을 표현하려고 의도하는 순수한 심적 자동주의Automatisme”로 규정했다.
그는 “사고를 직접 받아 쓴 것dictee이므로 이성의 작용을 일체 받지 않고 심미적이거나 도덕적인 배려도 일체 떠나 있다”고 했다.
현실과 상상의 두 극을 연결시키는 밀접한 관계를 실제로 보여줌으로써 브르통이 기대한 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별을 재정의하고 너무 오랫동안 접속되어 있지 않았던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 외부적 현실세계와 내부적 현실세계, 이성세계와 광기의 세계, 인식의 고요한 세계와 사랑의 세계, 생활의 세계와 혁명의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 어떤 고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벤투리는 이를 구상 미술 최후의 위기로 보고 자신 속에서 일체의 인습에 대항할 적극적인 이유를 찾아내는 것은 총괄적인 혁명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비평은 더 이상 재현에 관한 비평이 아니라면서 예술의 가치가, 재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인 표시된 사물을 뛰어넘어 살아 있는 표징sign의 존속성을 보증하는 능동적인 원리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대신 비평은 물상이 파괴된 후에도 오래 존속되는 표징의 이런 존속성의 인식, 즉 그 표징의 영원한 활동성과 현재성의 인식에서야말로 존재하게 된다고 했다.

브르통은 순수 이론적·논쟁적 논술로부터 예술작품의 직접성이라든가 내적·혁명적 힘 가운데서 예술작품의 타당성을 확인하는 것에 전념하는 비평문을 썼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데 키리코De Chirico(1888~1973)의 작품은 진정 초현실주의적이었으며, 샤갈의 기여가 평가받지 못한 사실은 시와 조형미술의 융합의 실현을 지향하는 제 운동 다다주의와 초현실주의에서의 중대한 과실이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에 관해 말했다.
“초현실주의의 본질적인 발견은 미리 생각해 둔 의도가 없이 펜이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연필이 자동적으로 묘사하면서 극히 귀중한 본체substance를 조직해 낸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 본체 모두가 정곡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최소한 시인이나 화가가 자신의 감동에서 도출한 광휘를 발산하는 듯하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자가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정신물리학적 영역 전체에 도달하려고 애썼을 때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이 심층이 모순의 부재, 억압에 의한 감정 전도의 유동성, 영겁성 및 쾌락의 원리에 의해서만 다스려지는 심리적 현실의 외적 현실로의 치환 등에 의해 지배된다고 했다.
자동주의는 이 영역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가 이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한 방법은 현혹될 정도로 정확하게 꿈의 이미지를 기록하는 것으로 이는 그들에게 약점이지만, 그것은 경험을 확신하는 데는 훨씬 덜 확실한 방법이며 함정투성이다.
따라서 브르통은 이브 탕기Yves Tanguy의 작품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달리의 작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는 탕기의 작품에서는 시적 원리를 간파하려고 했지만 달리의 표현 기법이 메소니에Meissonier로 돌아간 것을 후퇴로 보면서 그의 양식을 아카데믹으로 간주하면서 부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콜라주 기법을 충분히 이용하던 피카소는


1912년경 피카소와 브라크는 콜라주collage와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s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콜라주는 풀로 붙인다는 뜻이며 파피에 콜레는 종이를 풀로 붙여 장식적이 되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 기법은 1913년 브라크가 이비뇽의 한 상점에서 본 나뭇결무늬의 벽지 조각을 정물화 속에 붙여 최초로 사용했다.
존 골딩은 브라크의 <기타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Guitar>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작품에 사용된 파피에 콜레 조각들은 세 가지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평면적으로 채색된 회화적 형태이다. 둘째, 회화 속에서 색채나 질감의 유사성을 통해, 또는 실마리나 암시를 덧붙여 어떤 대상을 묘사하거나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종이조각 그 자체로 존재하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다른 입체주의 콜라주와 연결된다. 다시 말해 그림 속에 통합되고 견고하고 촉각적인 외계 물질로 인식되며 물질적 현존성이 강조된다.”

피카소는 즉시 이 기법을 채택했으며 현대 미술의 여러 진보적 화파들도 이를 사용했다.

콜라주와 파피에 콜레 기법은 브라크와 피카소 그림의 기본이 되는 현실주의를 강조함과 동시에 회화 기법에서 유래한 환영적 요소나 감각적 매력을 극단적으로 배제하려는 것이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콜라주 기법은 이를 계승한 일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활용되었으며 거기에서 제기된 새로운 미학적 문제와 가능성은 그 후 몇 년 동안 계속 탐구되었다.
파피에 콜레는 장식적 목적이 아닌 구성상의 본질적 요소로서 사용되었다.
그 사용법은 현실주의적인 것으로, 그것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화면 속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평면으로 존재했다.

피카소와 같은 나라 화가 후앙 그리스Juan Jose Vittoriano Gonzalez Gris(1887~1927)는 피카소와 브라크보다도 계통적·논리적 입체주의에 몰두했다.
그는 화면의 분석·이동의 기법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좀 더 합리적으로 설계한 기본 계획에 따라 구축해 나갔다.
종합적 입체주의로 알려진 입체주의의 두 번째 단계는 거의 그리스에 의존하고 있다.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의 그리스는 하나의 대상이 갖는 다양한 시각적 인상을 모두 일정한 기하적 면의 도형으로 환원시켜 결합했다.
그러나 종합적 입체주의 단계에서는 그리려는 대상을 나타내는 어떤 상징을 이용하여 그것을 재창조했다.
이런 상징은 이전의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험의 세부 사항이 그대로 그림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화가의 시각적 기억 속에서 결합·융해되어 실제 보이는 사물과는 다른 변형된 상태로 표현된다.
결국 그림은 자연과 평행을 이루며 그 상징적 요소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의 작품에는 왜곡의 요소가 없다.
그의 그림 형태는 실제 사물의 형태와 유사하지만 결코 그것을 베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콜라주 기법을 충분히 이용하던 피카소는 1913년 고부조적인 구성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의 회화와 밀접하게 결합되었으며 입체주의 회화의 삼차원 단계로 불리운다.
이런 시도는 앙리 로랑스Henri Laurens(1885~1954)와 자크 립시츠Jacques Lipcjtz(1891~1973)에게 이어졌으며 또 많은 입체주의 조각의 기초가 되었다.
뒤샹 비용Pierre-Maurice-Raymond Duchamp-Villon(1876~1918), 알렉산더 아키펭코Alexander Archipenko(1887~1964) 등이 입체주의와 관련된 조각을 제작했고 브랑쿠시도 어느 한도 내에서는 이에 포함된다.

한편 야수주의 예술가들과 입체주의 예술가들이 서로 대립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폴리네르는 1906~08년의 야수주의 작품이 입체주의의 서막을 장식한 것으로 보는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예술가들 모두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감각주의를 밀어내려고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더 진실 되고 심원하게 실재에 다가간다는 자신들의 뜻을 선언하면서 자연의 외관으로부터 생긴 감정의 의존하기를 거부했다.
이런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 문명에 대한 거부와 역사상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깊은 불신이었다.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는 『미술 비평사 History of Art Criticism』에서 폴 고갱의 타히티 체류와 랭보Rimbaud의 아프리카 탐험으로 예증된 선례를 따라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예술가들은 비역사적인 문명으로 회귀함으로써 역사를 회피하려고 했으며, 그 결과 시각적 표현에 있어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모두 저통 투시법과 조소적 형체를 거부하고 대신 색면으로 이루어지는 회화, 즉 색채가 지닌 절대적인 가치와 표현의 직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기술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야수주의Fauvism

야수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 처음으로 등장한 예술 혁신 운동으로 이념을 갖고 출발한 유파라기보다는 인상파와 신인상파에 반기를 든 작가들의 만남에서 형성되었다.
회화에 있어서는 순수한 색채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수법을 처음 선보인 것은 1899년 앙리 마티스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나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늘 그룹의 중심인물로 자리했다.
야수파란 명칭은 비평가 루이 보셀이 붙인 것으로 1905년 살롱 도톤에 출품되었던 마르케의 청동 조각이 마티스 등의 그림 사이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야수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라고 외친 것으로 전해진다.
야수파는 세 그룹의 집합이다. 첫 번째 그룹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1826~98)의 제자인 마티스, 피에르 알베르 마르케Pierre-Albert Marquet(1875~1947),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 앙리 샤를 망갱Henri Charles Manguin(1874~1943)과 샤를 카무앵Charles Camoin(1879~1965), 장 Jean Puy(1876~1960퓌)이며, 두 번째 그룹은 샤토 출신인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1876~1958)와 앙드레 드랭Andre Derain(1880~1954)이고, 세 번째 그룹은 뒤늦게 참여한 르 아브르 출신의 화가 프리에스, 브라크, 뒤피가 그들이다.

야수파는 반 고흐, 고갱, 신인상주의, 세잔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극도로 강렬한 색채에 있다.
이들은 화려한 원색들을 도발적이고도 직접적인 수법으로 사용했고, 때로는 세잔이 그랬듯이 공간 형성에도 사용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야수파는 과도기적인 습작 단계였을 뿐, 공동의 계획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 운동이 정점에 달한 것은 1905년 살롱 도톤전과 1906년 앙데팡당전에서였으며, 1908년경부터는 각자 다양한 양식을 전개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