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물 맥주를 버리는 글쓰기



  진주에 있는 진주문고에서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운 다음 오순도순 뒤풀이 자리를 마련했다. 책에 이름하고 글을 적어 달라는 이웃님한테 하나하나 이름하고 글을 적어 드리고 나서, 먼저 자리를 잡은 이웃님이 있는 맥주집으로 갔다. 이 맥주집에서 내놓은 ‘생맥주’를 받는데, 문득 ‘생맥주다운 냄새가 안 나네’ 하고 느꼈다. 나는 맥주, 그러니까 보리술을 마신 지 스물일곱 해밖에 안 되지만, 냄새하고 맛을 느낄 수 있다. 물을 많이 탔는지, 가루를 덜 탔는지, 사이다를 넣었는지, 설탕물을 넣었는지, 생맥주를 생맥주답게 맛있게 했는지 그때그때 느낀다. 나이가 많이 어릴 적에는 그저 많이만 마시곤 했는데, 이제 와 돌아보니 나는 어릴 적에 값싼 보리술만 마시려 했다. 값싼 보리술은 으레 밍밍하면서 맛없기 마련이라 벌컥벌컥 마셔도 보리술을 마신다는 알싸하면서 시원한 즐거움이 없었다. 그러니 값싼 보리술은 늘 엄청나게 마셔도 속이 차지 않았다. 이러다가 올해 들어 비로소 값싼 보리술은 안 마시기로 했다. 맛있는 보리술을 마시기로 했다. 맛있는 보리술을 마시니 맛있는 알싸하면서 깊은 맛이 좋아서, 깡통 보리술로 친다면 하나만 마셔도 좋아서 더 마실 일이 없곤 하다. 뭐랄까, 철없던 때에는 무턱대고 값싼 것만 찾느라 맛은 맛대로 즐겁지 않으면서 오히려 돈을 더 써 버리고 말았다면, 이제는 시나브로 제맛을 찾다 보니 맛을 맛대로 누리면서 돈을 훨씬 적게 쓴다. 내가 왜 이렇게 삶을 바꾸었느냐 하면, 사전을 짓고 아이들을 돌보기 때문이다. 사전에 아무 낱말이나 올릴 수 없고, 말풀이를 아무렇게나 붙일 수 없다. 아이들을 아무렇게나 돌볼 수 없고, 살림짓기를 엉성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맛없고 밍밍한 생맥주를 세 모금을 홀짝이다가 안 참기로 했다. 이 맛없는 맹물을 몸에 넣기 싫었다. 어젯밤, 좋은 이야기꽃 자리를 마친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고 싶어서, 이 진주에서, 보리술집 일꾼을 불렀다. 차마 속으로 넘길 수 없도록 밍밍한데다가 맛없기 때문이다. “저기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맥주 너무 맛없네요. 이 집에서 가장 맛있다고 추천할 만한 생맥주가 무엇이 있나요?” “네? 이 생맥주는 맥스인데요?” “허허. 맥스이고 아니고 그걸 묻지 않았어요. 이 생맥주 맛을 보셨나요? 물을 너무 많이 타서 맹물이에요. 제대로 맛있는 생맥주가 있느냐 말이지요?” “여기 5500원짜리하고 6000원짜리가 있어요.” “6000원짜리로 주시고요, 이 맛없는 맹물 맥주는 버려 주셔요. 도무지 못 마시겠어요.” “6000원짜리 둔켈은 흑맥주인데 괜찮으세요?” “저는 맛있는 맥주를 달라고 했지, 흑맥주니까 안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저는 둔켈 까만 맥주도 좋아합니다.” 보리술집을 지키는 분은 ‘보리술맛’이 엉망이라는 대목을 살피지 못하거나 않는다. 그냥 장사만 하는 듯하다. 그런데 장사만 하고 정작 술집지기로서 보리술맛을 모르면 이곳은 손님이 어느새 끊기리라. 손님이 끊겨서 술집을 문 닫는 일이 닥쳐도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를 못 깨달으리라. 맹물 맥주를 내놓고도 왜 맹물 맥주인가를 깨달으려 하지 않으면, 맹물스러운 글을 쓰면서 왜 맹물스러운 글인 줄 깨달으려 하지 않으면, …… 뭐가 될까? 뒷말을 적어 본다면 6000원짜리 생맥주도 참 맛없었다. 2017.11.25.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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