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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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70



아프다고 썼다가 지우니 사과꽃 핍니다

― 사월 바다

 도종환 글

 창비 펴냄, 2016.10.21. 8000원



  교사와 교수와 국회의원이라는 길을 걷는 동안 시인이라는 길을 놓지 않는 도종환 님이 《사월 바다》(창비,2016)라는 시집을 내놓습니다. 시집 《사월 바다》에는 이 나라에 태어나서 살아오는 동안 내내 아프고 고단한 나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적바림한 이야기가 흐릅니다. 너무 일찍 이 땅을 떠나고 만 형하고 누나를 그리는 이야기가 시 한 줄로 흐르고, 사월에 바다에 깊이 빠져 다시 살아나오지 못한 아이들 넋을 달래고 싶은 이야기가 시 두 줄로 흐릅니다.


  시를 쓴 도종환 님은 아픈 이웃을 바라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마음이 아프다 보니 몸까지 덩달아 아픕니다. 몸이 덩달아 아프니 마음은 새삼스레 더 아프고, 이 아픈 마음으로 자꾸 몸이 아프고 또 아프면서 ‘아픈 이야기’를 시로 털어놓으려 합니다.



아프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 사과꽃 피었습니다 / 보고 싶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 사과꽃 하얗게 피었습니다 / 하얀 사과꽃 속에 숨은 분홍은 /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 /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사과꽃)


남쪽에선 태풍이 올라오는데 / 상사화 꽃대 하나가 쑥 올라왔다 / 자줏빛 꽃봉오리 두 개도 따라 올라왔다 / 겁도 없다 (상사화)



  왜 이렇게 아픈가 하고 생각하며 한숨을 짓는데, 아픈 이웃만 보이던 시인 눈에 ‘새로 돋는 꽃’이 하나둘 나타납니다. 추위에도 비바람에도 지지 않는 꽃을 하나둘 봅니다. 두려움도 무서움도 없이 씩씩하게 피어나는 꽃송이를 자꾸자꾸 만납니다. 이러면서 아픔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돌아봅니다.


  철 따라 피는 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잘린 가지에서도 새 잎하고 꽃이 돋을 뿐 아니라, 모진 비바람이 찾아와도 아랑곳하지 않도 새로운 잎하고 꽃이 돋는 풀하고 나무를 찬찬히 바라봅니다.



둘째 형은 총에 맞아 사슴처럼 쓰러졌고 / 누나는 아이를 낳은 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 허약하여 늘 뒤처지던 나를 살려낸 건 누구일까 / 누나는 털실로 스웨터를 짜는 일을 잘했는데 그래서 / 방 여기저기 색색의 털실 뭉치들이 굴러다녔는데 / 그 실보다 가늘고 긴 세월 동안 / 눈물의 끈으로 나를 묶어 끌고 다닌 이는 누구일까 (슬픔의 현)



  사월에 바닷물에 잠긴 아이들을 떠올리는 시인은 가슴이 촉촉히 젖습니다. 이렇게 가슴이 젖어드는 사람은 시인 한 사람뿐이 아닐 테지요. 수많은 사람들은 가슴이 촉촉히 젖어들었을 테며, 그저 눈물짓지만 않으려고 주먹을 불끈 쥡니다.


  물결은 찰랑찰랑 가볍게 일다가 어느새 너을처럼 크게 일어 ‘십일월 바다’를 이루어요. 푸른지붕을 이은 집이 있는 작은 마을을 둘러싼 작은 촛불이 우렁찬 너울이 되어 한목소리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를 외칩니다.



내게서 나간 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 날은 / 돌아와 빗자루로 방을 쓴다 / 떨어져나가고 흩어진 것들을 천천히 쓰레받기에 담는다 / 요란한 행사장에서 명함을 잔뜩 받아온 날은 /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다시 아침)


교황님과 독대할 순 없어도 / 하느님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건 고요 덕이다 / 수입의 십분의 일을 꼬박꼬박 바치지는 못하지만 / 대신 내 생의 십일조를 바치고 싶다 (십일조)



  바람 한 줄기가 되려는 마음을 모아 시를 쓴다고 합니다. 햇볕 한 줌이 되려는 숨결을 모아 시를 쓴다고 해요. 비 한 방울이 되려는 뜻을 모아 시를 쓴다고 하며, “교황을 만날” 수는 없어도 “하느님을 만날” 수는 있구나 하고 날마다 느끼면서 시를 쓴다고 해요.


  시집 《사월 바다》를 읽는 사람도 바람 한 줄기를 함께 느낍니다. 햇볕 한 줌도, 비 한 방울도,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깃든 고요하고 아름다운 넋을 함께 느낍니다. 눈물이 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웃음을 새로 짓고 싶은 꿈을 키우면서 시 한 줄을 읽습니다.



시외버스터미널 나무 의자에 / 군복을 입은 파르스름한 아들과 / 중년의 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꽂고 / 함께 음악을 듣고 있다 / 버스가 오고 /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고 차에 오르고 나면 (귀대)



  시인 도종환 님은 “내게서 나간 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 날”은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빗자루로 방을 쓴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행사장에서 명함을 잔뜩 받아온 날”은 집으로 돌아와 고요히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고 해요.


  나도 이 시집을 읽다가 “내 말소리”와 “둘레에서 벌어지는 시끌벅적한 모습”을 가만히 그리면서 아침에 비질을 해 봅니다. 오늘은 고구마를 잘 씻고 손질해서 감자랑 달걀을 함께 큰 냄비에 담아 삶아 봅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비질을 하고, 아이들하고 함께 고구마를 손질하며, 아이들하고 함께 냄비에 불을 올립니다. 곧 고구마도 감자도 달걀도 다 익을 테지요. 곧 아이들은 호호 불면서 뜨거운 김을 쐬며 고구마랑 감자를 누릴 테고요.


  번쩍거리는 겉치레가 아닌 수수한 삶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되기에 비로소 시를 한 줄 쓸 수 있다는 도종환 님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시인이 들려주는 말처럼 노래는 늘 우리 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부를 노래와 슬픔을 달래는 노래 모두 우리가 스스로 짓는다고 느낍니다.


  군대에서 휴가를 마치고 다시 군대로 돌아가야 하는 “파르스름한 아들”은 머잖아 그 군대를 마치고 어머니 품으로 따사로이 돌아가겠지요. 아들하고 어머니가 조용하면서 애틋하게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꽂고” 느긋하면서 아름답게 하루를 누릴 기쁜 모습을 살며시 그려 봅니다. 2016.11.13.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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