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편지 사십편시선 15
임덕연 지음 / 작은숲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118



조용조용 거닐며 시를 읽으면

― 남한강 편지

 임덕연 글

 작은숲 펴냄, 2014.12.10. 8000원



  임덕연 님이 빚은 시집 《남한강 편지》(작은숲,2014)를 읽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읍내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군내버스에서 읽습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읽습니다.


  버스가 덜컹거릴 적마다 아이들도 내 곁에서 이리 움직이다가 저리 쏠립니다. 아이들은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재미나게 웃습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재미있는 듯합니다. 나도 아이들하고 이리저리 덜컹거리면 마치 놀이를 하는구나 싶어서 재미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덜컹거림 때문에 멀미가 났지만 이제는 이런 덜컹거림이 대수롭지 않아요.



몰래받은 설물인양 / 넌출 걸린 비닐들을 깃발처럼 날리면서 / 웅덩이가 모래언덕이 되고 / 자갈더미가 웅덩이가 되는 사연을 (강둑 풀)


강에 가려고든 / 남한강 / 여주 바위늪구비쯤 가 봐라 // 돌이 된 사람들이 / 참 사이좋게 누워있던 걸 (돌이 된 사람)



  교사이자 시인인 임덕연 님은 냇물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냇물에 어린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냇물을 바라보다가 느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냇물을 둘러싼 시골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냇물과 냇가를 이루는 수많은 돌과 풀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문득 돌아봅니다. 이야기를 나누려면 조용해야 합니다. 시끄러운 데에서는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우리 이야기가 파묻히기 일쑤입니다. 시끄러운 소리보다 더 크게 소리를 내야 비로소 이야기를 주고받을 만해요. 서로서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되고 가벼운 눈길이 될 때에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청동기 시기 집터에는 / 강가에서 한 알 한 알 거뒀을 / 쌀알이 거의 석탄이 되어 나왔다. / 관에서 나와 말뚝을 박고 / 표지판도 세웠을 때는 / 좀 좋은 일이 있으려나 했지만 / 잡초가 자라고, 말뚝이 썩어도 / 촌살림은 별반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흔암리 선사유적지에서)



  시끄럽게 소리를 내면 새소리를 못 듣습니다. 시끄러운 곳에서는 옆에서 들려주려는 말소리를 못 듣습니다. 커다란 짐차가 우르릉거리며 지나갈 적에도, 삽차가 땅을 팔 적에도, 크고작은 자동차가 둘레를 지나갈 적에도, 이 모든 소리는 새소리나 말소리를 모두 잠재웁니다.


  그러고 보면, 냇물을 까뒤집어 시멘트를 들이붓는 삽질이 여러 해 동안 이어질 적에, 이런 일을 시키던 사람이나 이런 일을 하던 사람은 새소리도 말소리도 듣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해요. 수많은 기계가 내는 소리에 밀려서 작은 목숨이 내는 작은 소리를 듣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작은 목숨이 내는 작은 소리가 있다는 생각조차 못 할 만해요.

  


나무들이, 풀들이, 수많은 돌들이 / 터벅터벅 / 강가를 걷고 있다. // 바람들이, 구름들이, 강물에 제 얼굴을 비춰대는 하늘이 / 쉬엄쉬엄 / 강가를 걷고 있다. (강가를 걷다)



  바쁜 걸음을 살짝 멈추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바쁜 일을 살짝 그치고 눈을 들 수 있을까요. 바쁜 하루를 살짝 내려놓고 둘레를 돌아볼 수 있을까요.


  꼭 시인처럼 나무나 풀이나 돌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꼭 시인처럼 냇가를 거닐어야 하지 않습니다. 바람을 쐬고, 비를 뿌리는 구름을 보며, 우리 몸을 이루는 물줄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흐르는가를 헤아릴 수 있으면 됩니다. 내 목소리를 너한테 들려주고, 네 목소리를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으면 돼요.



강물은 / 그저 긴 꼬리를 달고 아래로만 / 미련 없이 흐르는 줄 알았는데 / 새벽녘 강가에 나와 보니 / 강물은 / 크고 작은 톱니바퀴 수천 개를 맞대어 돌리면서 / 지구를 돌리고 있었다. (이포, 강가에 서서)



  조용조용 걸으면 발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걸으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가만히 듣습니다. 참새가 처마 밑을 바지런히 드나드는 소리를 듣고, 직박구리가 매화나무에 앉아서 노는 소리를 듣습니다. 딱새가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살짝 내려앉아서 ‘딱딱’거리는 소리뿐 아니라 작은 구슬을 입안에서 굴리는 듯한 소리도 듣습니다.


  발소리를 죽이면서 아주 천천히 마당이나 뒤꼍을 거닐면, 크고작은 새들은 우듬지나 가지에 앉아서 처음에는 내 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딴 데를 봅니다. 발소리가 나거나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나도록 움직이면 새들은 이내 자리를 떠요. 나는 내 발소리도 몸짓 소리도 죽이면서 온갖 새가 우리 집 둘레를 드나드는 소리를 가만히 듣습니다. 이러는 동안 새소리에다가 바람소리도 한결 깊이 듣습니다.


  시집 《남한강 편지》를 손에 쥐고 마당하고 뒤꼍을 걸어 봅니다. 다 읽은 시집을 평상에 내려놓고 나무 앞에 조용히 섭니다. 새로 돋는 잎을 바라보고, 새잎이 돋는 나무에 살포시 찾아드는 멧새를 마주합니다. 문득 낯익은 소리가 들려 위를 올려다보니 제비 여섯 마리가 빠르게 하늘을 가릅니다. 2016.4.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