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다시피 고쳐쓰고 손질한 '말놀이' 이야기 네 가지를 새로 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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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닦는천



  얼굴이나 몸이나 발을 씻은 뒤에는 물기를 천이나 헝겊으로 닦습니다. 그런데 천이나 헝겊을 써서 물기를 없애는 일은 따로 ‘훔치다’라는 낱말로 가리켜요. 걸레를 써서 방바닥을 닦을 적에도 “방바닥을 훔친다” 하고 가리키지요. 그러니까 몸을 씻고 나서 천으로 물기를 ‘훔칠’ 적에는 ‘잘 마른 천’을 씁니다. 젖은 천으로는 물기를 못 훔칠 테니까요. ‘마른 천’ 가운데에는 부엌에서 개수대 둘레에 놓으면서 쓰는 행주가 있고, 얼굴이나 손을 훔칠 적에 쓰는 천이나 헝겊이 있으며, 발을 닦는 천이나 헝겊이 있어요. 뒷주머니나 앞주머니에 넣으며 늘 들고 다니는 천이나 헝겊도 있지요. 자, 그러면 얼굴이나 손을 훔치는 천을 무엇이라 하나요? 발을 닦는 천은 무엇이라 하지요? 주머니에 넣어서 들고 다니는 천은 무엇이라 할까요? 어른들은 으레 ‘수건’이라는 낱말을 써요. ‘수건’은 한자말이고 ‘手巾’처럼 적어요. ‘手’는 “손”을 뜻하고, ‘巾’은 “천”을 뜻해요. 곧 ‘수건 = 손천’인 셈이에요. 우리가 ‘발수건’이라 말하면 ‘발 + 손천’이 되고, ‘손수건’이라 말하면 ‘손 + 손천’이 돼요. 뭔가 말이 엉뚱하지요? 어른들이 처음부터 ‘수건’ 아닌 ‘손천·발천·얼굴천·주머니천’ 같은 말을 썼다면 어떠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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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저고리



  예부터 한국사람이 입은 옷은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입니다. 바지와 치마는 아랫도리이고, 저고리는 웃도리예요. 사내가 걸치는 바지랑 저고리를 아울러 ‘바지저고리’라 가리키고, 가시내가 걸치는 치마랑 저고리를 묶어서 ‘치마저고리’라 가리켜요. 한겨레 옛 옷을 흔히 ‘한복’이라고도 하지만, 한겨레는 예부터 우리 옷을 놓고 ‘바지저고리·치마저고리’라고만 가리켰어요.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은 한국사람이 입은 ‘바지저고리’를 업신여겼고,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에는 도시 문화가 크게 퍼지면서 시골살이를 깔보았어요. 이 두 가지 슬프고 아픈 발자취는 오늘날 한국말사전 뜻풀이에까지 고스란히 남습니다. 솜을 두어 겨울에 따스하게 입는 옷을 가리키는 ‘핫바지’를 놓고도 일제강점기부터 잘못 퍼진 슬프고 아픈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서 어수룩한 사람이나 시골내기를 놀리는 말로 ‘핫바지’를 얄궂게 쓰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이런 말결이나 말씨를 살뜰히 가다듬지 못하는데, 우리 어린이들은 새로운 말결이나 말씨로 한국사람 옷차림을 가리키는 수수한 이름을 곱게 되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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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별



  어린이는 해를 바라보면서 ‘해’라 말합니다. 해가 비출 적에는 ‘햇빛’이라 말하고, 해가 풀과 나무를 살찌울 적에는 ‘햇볕’이라 말합니다. 해가 빛줄기를 곱게 퍼뜨릴 적에는 ‘햇살’이 눈부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꽤 많은 어른은 해를 바라보며 ‘해’라 말하지 않고 ‘태양’이라는 한자말을 쓰려 합니다. 해가 베푸는 빛과 볕과 살을 맞아들여 이 기운을 쓸 적에는 ‘태양에너지’라 하기도 해요. 왜 해는 해가 되지 못하고 ‘태양’이 되어야 할까요? 햇빛을 살리는 힘이라면 ‘햇빛힘’이 될 테고, 햇볕을 살리는 힘이라면 ‘햇볕힘’이 될 테며, 햇빛이랑 햇볕을 함께 살리는 힘이라면 ‘해힘’이나 ‘해님힘’이 될 텐데요. 더 헤아리면, 지구별이 있는 우주는 ‘해누리’입니다. ‘태양계’가 바로 ‘해누리’예요. 밤하늘에 눈부시도록 빛나는 별은 저마다 다른 ‘별누리’에 깃들어요. 그러니까 ‘은하’가 바로 ‘별누리’입니다. 그러면 너른 ‘우주’는 어떤 곳일까요? 바로 ‘온누리’랍니다. 모든 누리를 아우르기에 ‘온누리’이거든요. 모든 별을 아우른다고 하는 ‘천체’는 ‘온별누리’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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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찬바람을 일으키는 기계를 ‘선풍기’라고 합니다. 더운바람을 일으키는 기계를 ‘온풍기’라고 해요. 우리 집 큰아이가 ‘온풍기’를 처음 보던 날 “저것 선풍기야?” 하고 묻기에 “응? 아니야. 선풍기 아니야.” 하고 말하니, “그러면 뭐야?” 하고 묻고, 나는 “더운바람이 나오는 아이야.” 하고 말해 줍니다. 아이는 문득 “‘더운바람이’겠네?” 하고 말합니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보았습니다. 아이 말대로라면 ‘찬바람’이 나오는 선풍기란 바로 ‘찬바람이’입니다. 온풍기가 ‘더운바람이’라고 한다면, 참말 선풍기는 찬바람이 나오니 ‘찬바람이’가 되지요. 그렇다면 에어컨은? 에어컨도 찬바람이일 텐데, 선풍기하고 같은 이름이 될 테군요. 선풍기는 날개가 돌아가니까 ‘날개바람이’나 ‘날개찬바람이’라 하고, 에어컨은 그냥 ‘찬바람이’라고 하면 될까요? 선풍기도 온풍기도 에어컨도 이 이름대로 써도 되지만, 퍽 재미있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서 선물처럼 붙여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6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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