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쓴 글을 좀 손질해서 새로 써 보았다. 예전 글을 고칠까 하다가, 그 예전 글은 그대로 두고, 손질한 글을 모아서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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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그림



  ‘수채화’가 언제부터 수채화였을까 궁금합니다. 물감을 물에 풀어서 그리는 그림을 두고 언제부터 누가 왜 ‘수채화’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합니다. 어른들은 그냥 ‘수채화’라고 말하니까 어린이는 어른들 말을 고스란히 따라서 ‘수채화’라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다시 한 번 가만히 헤아리면서 새로운 말을 써 보고 싶습니다. 아니, 물감을 물에 풀어서 즐기는 그림이 무엇인가를 새삼스레 바라보면서 가장 곱게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 보고 싶습니다. 하얀 종이를 바닥에 펼치고 물감판을 옆에 두고는 물감을 짭니다. 물을 받은 그릇도 한쪽에 놓지요. 이렇게 마룻바닥에 판을 벌인 뒤에 붓을 듭니다. 붓에 물감을 묻히고 물을 알맞게 섞어서 종이에 처음으로 척 갖다 댑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스으으윽, 슥슥, 삭삭, 사사삭 신나게 손을 놀립니다. 내 손놀림에 따라 물감 빛깔이 종이에 스며듭니다. 물을 탄 물감 빛깔은 새로운 숨결로 거듭납니다. 아하, 그렇구나. 수채화란 ‘물감 빛깔 그림’이로구나, 그러니까 ‘물빛그림’이네. 붓놀림에 따라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는 물빛그림에는 물결이 흐르고 물노래가 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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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삯



  시외버스를 탑니다. 고흥부터 서울까지 달리는 시외버스에 네 식구가 타니, 네 사람 몫 표를 끊습니다. 어른 두 장을 끊고 어린이 두 장을 끊습니다. 버스에 손님이 거의 없으면 버스 일꾼은 “아이 표는 안 끊어도 되는데.”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버스에 손님이 있을는지 없을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습니다. 네 식구가 움직이면 표를 넉 장 끊으니 버스삯을 만만하지 않게 쓴다고 할 만하기에 버스 일꾼이 걱정해 주는구나 싶은데, 그러면 우리가 끊은 차표를 돌려주거나 물려주면 될 테지요. 아무튼 우리 네 식구가 기차를 타면 기찻삯을 냅니다. 배를 탄다면 뱃삯을 치르고, 비행기를 탄다면 비행기삯을 뭅니다. 택시를 타면 택시삯을 내요. 여러 가지 탈거리에 몸을 실으면서 찻‘삯’을 치릅니다. 함께 나들이를 다니면서 바깥에서 밥을 사서 먹으면 밥‘값’을 치르지요. 자가용을 모는 분이라면 다른 사람이 모는 차를 얻어타지 않으니 삯을 치르지는 않되, 자가용에 기름을 넣어야 할 테니 기름‘값’을 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를 말로 삼아서 타고 놀기를 즐기는데, ‘아버지 말’을 타는 아이들은 웃음이랑 노래를 ‘아버지 말삯’으로 재미나게 치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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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마늘을 넣어 밥을 지으면 마늘밥이 됩니다. 고구마를 넣어 밥을 지으면 고구마밥이 됩니다. 쑥을 넣으면 쑥밥이요, 팥을 넣으면 팥밭이며, 콩을 넣으면 콩밥입니다. 보리로 지으면 보리밥이고, 쌀로 지으면 쌀밥이에요. 이리하여, 마늘을 써서 빵을 구으면 마늘빵이 될 테지요. 한국사람도 오늘날에는 빵을 널리 먹으니, 마늘로 얼마든지 빵을 구울 만합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마늘’이 아닌 ‘갈릭’이라는 낱말을 쓸 테니 ‘갈릭 브레드’라 해요. 한국말에서는 ‘빵’이지만 영어에서는 ‘브레드’이기도 해요. 그러고 보니 ‘바게트’ 같은 서양말도 한국에서는 그냥저냥 쓰기 일쑤입니다. 한국말로 손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막대빵’이라 해도 될 텐데 말이지요. 마늘을 써서 구운 빵이기에 ‘마늘빵’이라 하면 누구나 쉽게 알아볼 만하고, 막대기처럼 길게 구운 빵이기에 ‘막대빵’이라 하면 참말 누구나 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요. 팥빵도 한국말로 ‘팥빵’이라 해야 알아듣기에 좋아요. 일본말로 ‘앙꼬빵’이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본말로 쓰는 ‘소보로빵(소보루빵)’도 ‘곰보빵’이나 ‘오돌빵’이나 ‘못난이빵’ 같은 한국말로 고쳐서 쓰면 한결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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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길



  네 식구가 서울마실을 하며 전철을 탈 적입니다. 우리 집 큰아이가 전철 길그림을 읽습니다. “저기는 노란 줄로 셋이라고 적혔네. 셋길이야, 셋길! 어, 저기는 다섯이라고 적혔네. 다섯길이야!” 나는 큰아이한테 ‘삼호선’이나 ‘오호선’이라는 말로 바로잡아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한 말 그대로 “그래, 셋길이네. 저기는 다섯길이네.” 하고 이야기합니다. 전철을 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인천이든 큰도시에 놓은 전철이나 지하철에는 모두 ‘일호선·이호선’처럼 이름을 붙입니다. 나이 어린 아이가 문득 떠오르는 대로 말하듯이 ‘한길·두길·셋길·네길·다섯길’처럼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면 어떠할까 하는 생각조차 어른들은 못 했으리라 싶습니다. 이런 이름을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런 이름을 즐겁게 널리 쓰자는 데까지 생각을 뻗지 못했으리라 싶습니다. 그렇다고 지하철 이름을 ‘삼호선’이나 ‘오호선’이라 하지 말고 ‘셋길’이나 ‘다섯길’로 고치자는 얘기는 아니에요. “한길 지하철·셋길 지하철·다섯길 지하철”이라든지 “하나 지하철·셋 지하철·다섯 지하철”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붙일 수도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6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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