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로 먹었나 - 우리가 먹는 고기에 대한 체험적 성찰
우치자와 쥰코 지음, 정보희 옮김 / 달팽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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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91



손수 길러서 잡는 돼지가 가장 맛있다

― 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로 먹었나

 우치자와 쥰코 글

 정보희 옮김

 달팽이출판 펴냄, 2015.11.5. 14000원



  우리는 누구나 밥을 먹습니다. 더러 밥을 안 먹고 바람만 마시면서 목숨을 잇는 분이 있습니다만, 이 지구별에서 나고 죽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습니다. 밥을 먹어야 목숨을 이을 만하며, 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누구나 손수 흙을 가꾸어서 밥을 얻었습니다. 손수 흙을 가꾸지 않고도 밥을 얻은 이는 권력자하고 부자뿐이었고, 몇몇 지식인도 손에 흙을 안 묻히고 밥을 얻었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손에 흙을 묻히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권력자나 부자나 몇몇 지식인이 아니어도 손에 흙을 안 묻히면서 밥을 얻습니다. 오늘날에는 돈이 있으면 손에 흙을 안 묻히고도 밥을 얻습니다.



돼지는 생후 약 6개월, 소는 생후 약 2년 반 만에 도축장으로 출하되어 고기가 된다. 번식용 가축은 식용가축보다 오래 살기는 하지만 정자를 계속 채취당하고 지속적으로 출산만 하는 처지를, 백 번 양보하더라도 ‘타고난, 자연스러운 환경’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15쪽)


원래는 잔반과 밭에서 못 쓰게 된 채소를 처리하는 가축으로 쉽게 기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삼엄하게 격리된 공간에서 남모르게 키워지는 동물이 되어 살아 있는 돼지를 만지기는커녕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18쪽)



  우치자와 쥰코 님이 빚은 《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로 먹었나》(달팽이출판,2015)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쓴 일본사람 우치자와 쥰코 님은 ‘고기 먹기를 즐깁’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글을 쓰고 자료를 살피고 취재를 다니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왜 일본사람은 스스로 돼지나 소나 닭을 길러서 스스로 잡아서 먹지 않는가?’ 하고.


  시골에 살지 않기 때문에 손에 흙을 안 묻힌다고 할 만할까요? 시골에 살지 않으니 집짐승을 키울 까닭이 없다고 여길 만할까요? 귀염둥이로 삼는 짐승은 기르면서, 왜 ‘잡아서 먹을 고기’기 될 짐승은 안 기를까요? 집을 비울 적에는 귀염둥이 짐승을 이웃집이나 동물병원 같은 곳에 며칠씩 맡기듯이, ‘고기로 먹을 짐승’도 며칠쯤 이웃집이나 다른 곳에 맡길 수 있지 않을까요?



교배할 때 드는 수고를 생각하면 인공수정이 훨씬 효율적이다.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어디부터가 가엾고 어디까지가 괜찮은 건지, 그 경계는 대체 누가 정하는 건지 모호해진다. (50쪽)


태어난 지 여러 시간이 지난 녀석들부터 태어난 마릿수와 성별 등을 기록하고 약을 주사했다. 목에 한 대, 허벅지 안쪽에 한 대. 그리고 먹이는 액체약이 있었는데 지사제와 빈혈방지 철분제였다. (67쪽)



  《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로 먹었나》를 쓴 분은 소를 키워 보고 싶었으나, 차마 소를 혼자 키우기는 어렵다고 여깁니다. 돼지라면 키울 만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고, 새끼 돼지 세 마리를 받아서 키우기로 합니다. 다만, 새끼 돼지 세 마리를 키우되, 여느 ‘돼지우리(돼지 농장)’처럼 여섯 달만 키워서 잡기로 합니다. 일본에서는 꼭 여섯 달만 피둥피둥 살을 찌워서 고기로 잡는다고 해요.


  그러고 보면, 서양에서도 집돼지를 잡는 때는 얼추 비슷하지 싶습니다. 《샬롯의 거미줄》에 나오는 새끼 돼지는 겨울을 날 수 없다고 나오지요. 왜냐하면 겨울에 있는 성탄절에 고기로 잡혀서 ‘살코기와 소시지’로 바뀌어야 하니까요. 고기로 잡혀야 하는 돼지는 ‘겨울을 모르는 채’ 산다고 할 만합니다. 고기로 잡히는 돼지는 눈이 올 무렵 죽음길로 가야 한다고 할 만하지요.



“저, 돼지가 흙을 굉장히 많이 먹고 있는데, 괜찮을까요? 배탈 안 나요?” “괜찮아요. 돼지는 원래 흙을 먹는 동물이에요!” (81쪽)


돼지는 3킬로그램을 먹으면 1킬로그램이 찐다. 예컨대 도축 전 체중이 115킬로그램인 돼지라면 먹이를 345킬로그램 먹었고, 도축 후 70킬로그램의 고기를 얻었다면 분뇨를 980킬로그램 배출했다는 의미다. (90쪽)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는 도시에서도 집에서 닭을 치거나 토끼를 키웠습니다. 사람이 먹는 밥하고 똑같은 먹이를 받은 집짐승입니다. 밥찌꺼기도 받아서 먹은 집짐승이에요. 밥을 지을 적에 쓰지 못하는 푸성귀를 받아서 먹은 집짐승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밥찌꺼기(음식물 쓰레기)가 넘치지만, 지난날에는 밥찌꺼기가 남을 겨를이 없습니다. ‘고기로 먹을 짐승’한테 밥찌꺼기를 모조리 주었으니까요.


  이렇게 따지고 보면, 도시마다 밥찌꺼기가 크게 넘칠 뿐 아니라 골칫거리가 되는 까닭 가운데 하나도 ‘밥찌꺼기를 집집마다 치울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만합니다. 함께 살며 밥을 나누던 집짐승이 사라졌기에, 이 밥찌꺼기는 그만 ‘쓰레기(음식물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 집짐승한테 먹이로 주지 않더라도 거름으로 삼거나 흙한테 돌려주면 될 테지만, 도시에서 텃밭을 일구는 사람은 매우 적어요. 높다란 아파트에서는 툇마루 한쪽에 ‘상자 텃밭’을 할 수 있을 테지만, 상자 텃밭만으로는 여느 도시 살림집에서 나오는 밥찌꺼기를 다 삭히기 어려울 만합니다.



웅크린 자세로 (돼지) 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응시한 순간, 신의 표정이 달라졌다. 갑자기 표정이 풍부해졌고,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다가왔다. 역시 너희들은 내가 서서 내려다보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140∼142쪽)


많은 사람들이 엄연히 다르다고 믿는 애완동물과 가축의 경계를 나는 감히 무너트리고 싶었다. 이름을 불러 주고 그들의 본성을 파악하며 충분히 마음을 나눈 뒤에 잡아먹어 보고 싶었다. 수십 년 전 서양의 소규모 농가에서도 그랬고 지금의 변두리 지역 농가에서도 매우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148쪽)



  사람이 ‘고기로 먹는’ 짐승은 살점입니다. 이른바 단백질이라고 하는 살점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집짐승 살점’은 ‘사람이 먹는 밥’하고 같았습니다. 단백질이기는 하되 ‘사람이 먹는 밥하고 같은 먹이를 받아서 자란 단백질’입니다. 풀을 먹고 자란 고기를 사람이 먹는다고 할까요. 여기에다가 풀벌레나 애벌레나 굼벵이를 곁들여 먹는데, 풀벌레나 애벌레나 굼벵이도 으레 풀을 먹어요. 닭이나 돼지나 소가 먹는 ‘움직이는 것’도 가만히 따지면 모두 풀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풀을 먹고 자란 고기를 먹는 사람은 ‘한쪽에서는 날풀’을 먹고, ‘다른 한쪽에서는 풀로 살점을 이룬 고기’를 먹는 셈이기에 언제나 풀을 먹는다고 할 만합니다.


  풀만 먹든 풀하고 고기를 함께 먹든, 또는 고기만 실컷 먹든, 사람이 사람다운 몸을 지키면서 살자면 무엇보다도 ‘싱그러운 풀’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농약이나 풀약 묻은 풀을 먹으면 사람 몸이 망가지겠지요. 이는 짐승한테도 똑같아요. 짐승이 먹을 풀을 함부로 주지 않지요. 농약이나 풀약이 묻은 풀을 짐승한테 주면 어떻게 될까요? 짐승도 배앓이를 하다가 죽지요.


  집짐승이 예부터 먹은 풀이란 모두 깨끗하며 싱그러운 풀입니다. 집짐승도 사람도 언제나 깨끗하며 싱그러운 풀을 먹을 만한 터전에서 삶을 짓습니다. 풀밭이나 들판이 있어야 사람도 짐승도 삽니다. 풀밭과 들판, 그리고 이 모두를 어우르는 숲은 이 지구별에 있는 목숨이 목숨다이 삶을 누리도록 이끄는 바탕입니다.



많은 ‘동물애호가’ 학생들이 생각하는 동물은 자연보호지역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야생동물이거나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이다. (197쪽)


한 마리 돼지에서 고기 그 자체로 소비자에게 팔리는 건 (돼지 한 마리 110킬로그램 가운데) 고작 23킬로그램에 불과하다. 너무나 적은 양이다. 밭에서 수확하면 거의 통째로 소비자에게 팔리는 채소와는 이 점이 많이 다르다. (258쪽)



  돼지 세 마리를 키우려고 한 분은 돼지를 키우기 앞서 집부터 마련합니다. 돼지는 여섯 달 만에 백 킬로그램 남짓으로 살이 찐다고 하니까, 돼지우리가 함께 딸린 집부터 제대로 갖추어야겠지요. 돼지는 그동안 먹은 먹이 무게보다 세 곱에 이르는 똥오줌을 눈다고 해요. 그러니, 돼지가 누는 똥오줌을 건사할 자리도 마련해야지요. 돼지우리를 짓고, 돼지가 지낼 바닥도 꾸미며, 돼지한테 어떤 밥을 줄는지도 헤아려야 합니다.


  자, 손수 무엇을 키워서 먹는다고 하면 무엇을 먹일까요? ‘곧 내 입으로 들어올 밥’이 되는 남새나 짐승이라면, 우리는 남새밭에 무엇을 치고 집짐승한테 무엇을 먹일까요? 아무것이나 함부로 안 뿌리고 안 먹일 테지요. 제대로 된 것을 뿌리거나 먹일 테지요.


  다시 말하자면, 손수 씨앗을 심어서 남새를 키우는 사람은 가장 맛난 남새(풀)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손수 새끼를 받아서 집짐승을 키우는 사람은 가장 맛난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스스로 가장 낫고 좋으며 깨끗한 것으로 남새하고 집짐승을 돌볼 테니까, 이러한 손길을 받은 남새나 고기는 아주 맛나면서 아름답기 마련입니다.



그럼 수익을 가장 많이 얻는 건 대형마트라는 말인가? 고기는 작게 잘라 팔수록 확실히 비싸진다. 부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돼지의 시장가격이 킬로그램당 400엔이라는 말은, 단순계산을 하면 100그램에 40엔. 대형 마트인 ‘우에노 요시이케’의 전단지를 보면 국산돼지의 등심은 100그램에 158엔. (277쪽)


오늘도 돼지들은 전기와 석유, 물, 사료를 쉬지 않고 소비하면서 자라고 출하되고 도축되어 소매점에 고기로 진열된다. 그리고 나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변함없이 맛있는 고기가 먹고 싶어진다. (313쪽)



  오늘날 도시에서 집집마다 집짐승을 키우기는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그러나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시골 한쪽에 마치 감옥처럼 꽁꽁 가로막은 곳에서 숨기듯이 공장 얼거리로 소나 돼지나 닭을 키워서 고기로 잡아서 먹을 때에 맛이 있을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손길로 돌보는 집짐승을 적에 맛이 있을까요. 오늘날 돼지우리(돼지 농장)는 더 적은 돈을 들여서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 하는 얼거리로만 흐르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도 ‘맛있는 고기’가 아니라 ‘값싼 고기’만 바라는 탓에 ‘공장 같은 돼지우리’에다가, ‘공장 + 감옥 같은 얼거리’인 닭우리와 소우리에서 닭이나 소도 똑같이 고단하고 괴롭게 살점만 찌우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값이 싸기에 나쁘지 않으며, 값싸게 얻는 고기라서 나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 함께 생각할 대목이 있습니다. 고기 한 점을 값싸게 만들어 내어서 값싸게 장만할 수 있도록 하는 얼거리에서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짓도록 이끄는 ‘밥’ 한 그릇은 무엇이 될까요? 우리는 영양소만 먹으면 되는 목숨일까요, 아니면 즐거운 삶을 노래할 줄 아는 숨결일까요? 4348.12.3.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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