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90 밥끊기, 단식



  때가 되어 밥을 끊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밥을 넣어 주어야 몸에 기운이 새롭게 돈다고 하지만, 애써 밥을 몸에 넣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자말로는 ‘단식(斷食)’을 한다고 합니다. 이 한자말은 “일정 기간 동안 의식적으로 음식을 먹지 아니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밥끊기’ 또는 ‘단식’은 왜 할까요? 몸에 밥을 더 넣지 않으면서, 몸을 가볍게 바꾸고, 몸에 따라 마음도 가볍게 다시 태어나도록 하려는 뜻입니다. 몸과 마음이 밥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고, 몸에 쌓였을 찌꺼기를 찬찬히 내보내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몸은 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 줄 느끼려는 뜻입니다.


  밥을 끊는 사람은 밥을 안 먹습니다. 이때에 물을 마실 수 있고, 국을 마실 수 있으며, 어떤 단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밥끊기란 밥을 끊는 일입니다.


  밥끊기는 하루를 할 수 있고, 이레를 할 수 있습니다. 보름이라든지 달포 동안 밥을 끊을 수 있고, 때로는 온날(백일)을 끊거나 몇 해 동안 밥을 끊어도 됩니다. 사람은 밥을 끊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물을 마셔도 죽지 않으며, 밥이 아닌 풀만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국만 끓여서 먹어도 죽지 않아요.


  밥을 한동안 끊으려 하는 사람은, 내 삶에서 내가 대수롭게 여기면서 바라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바라보려는 마음이 됩니다. 그동안 나 스스로 내 삶에서 무엇이 대수로운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고 여겨서 밥을 끊습니다. 밥을 먹어야 몸이 산다고 하는 생각을 끊고, 밥이 아니면 몸에 기운이 돌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을 끊으려 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도 똑같은데, 목숨 있는 것은 밥을 먹어야 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풀과 꽃과 나무도 밥(양분)을 먹어야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뭇목숨은 ‘숨을 살리’려면 무엇을 먹을까요?


  바로 ‘바람’을 먹습니다. 밥끊기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먹으려는 삶”으로 나아가려는 몸짓입니다. 늘 마시지만 늘 마시는 줄 제대로 못 느낀 탓에 제대로 못 보고 제대로 모르던 ‘바람’을 제대로 알아내려고 밥을 끊습니다.


  밥은 온날이나 여러 해를 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밥은 얼마든지 끊을 만합니다. 그런데, 밥을 오랫동안 끊으면 ‘몸 많이 쓰는 일’은 하기 어렵습니다. 왜 못 할까요? 스스로 즐겁게 삶을 짓는 일이라면, ‘밥을 안 먹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시키는 일을 종(노예)이 되어서 해야 한다면 ‘밥을 많이 먹어야 남이 시키는 일을 할’ 수 있어요. 이리하여, 사회의식에서는 사람들이 밥끊기를 못 하게 막으려 합니다. 사회의식에서는 사람들한테 도시락조차 못 먹이게 하려 듭니다. 왜냐하면, 도시락은 ‘내 몸을 생각해서 스스로 지은 밥’이거든요. 학교나 회사나 감옥이나 군대에서 왜 ‘도시락’을 못 먹게 하고 집단급식만 시키려 하는가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집단급식은 사람을 살리지 않습니다. 집단급식은 사람을 죽입니다.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몸을 죽여서 마음도 몸을 따라서 죽도록 길들입니다. 사회의식에서는 집단급식을 사람들이 먹도록 내몹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밥을 먹으면서 똑같은 몸이 되고 똑같은 생각만 물려받으면서 똑같은 일을 하는 톱니바퀴(부속품)가 되도록 내몹니다.


  밥끊기는 바로 이 같은 사회의식을 끊는 몸짓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왜 남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바로 내 삶을 짓는 내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내 삶을 바라보면서 내 길을 걸어야 합니다.


  밥을 끊을 줄 아는 사람은, 바람을 맛봅니다. 바람맛을 처음으로 보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기릅니다. 이리하여, 밥을 끊은 뒤 다시 밥을 마주하는 사람은, 이제부터 ‘밥한테 휘둘리지 않’고, ‘밥을 내가 다스리는’ 손길을 익힐 수 있어요. 그러니까, 밥끊기를 제대로 해서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깨달은 사람은, 사회의식에서 집단급식을 시켜도, 이 집단급식을 ‘새롭게 바꾸’는 기운이 생깁니다.


  밥은 많이 먹거나 적게 먹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밥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으면 됩니다.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는 밥일 때에는 언제나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스스로 짓지 않고 스스로 먹지 않는 밥이라면 언제나 괴롭고 고단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바람이 없’으면 바로 죽습니다. 바람이 없는 지구별은 아무런 목숨(생명)이 없는 죽음터입니다. 그래서, 사회의식에서는 자꾸 공장을 지으려 하고, 자꾸 지하자원을 캐내어 바람을 더럽히려 합니다. 아무리 ‘무공해 에너지’가 있고 ‘무한동력 장치’가 있더라도 사회의식은 이를 안 받아들입니다. 돈을 벌려는 권력자가 있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사회의식이 시키는 짓대로 따르기를 바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사회 제도’에 길들면서 ‘새로운 것을 꿈꾸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도록 내몰려 하기 때문입니다.


  밥을 끊으려 하는 사람은 밥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몸을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것은 다 잊고, 오직 바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밥을 끊는 까닭은, 오직 바람을 나한테 제대로 맞아들이려 하는 몸짓인 만큼, 나를 둘러싼 바람이 어떠한 결인가 하고 느껴야 합니다. 내가 들이마시는 바람을 어떤 숨결로 녹여서 내 몸으로 태우려는가 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람결이 나한테 깃들면서 숨결이 되고, 이 숨결은 살결로 나타납니다. 바람결은 ‘너’이고, 숨결은 ‘나’입니다. 숨결은 ‘마음’이 되고, 살결은 ‘몸’이 됩니다. 이제, 내가 받아들인 바람은 내 몸에 새로운 씨앗으로 드리워서 내 마음에 새삼스레 깃듭니다.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삭일 수 있는 넋이라면, 새로운 생각을 마음에 심을 수 있습니다. 바람결은 숨결을 거쳐 마음결로 거듭납니다. 새로운 마음결이 될 수 있으면, 내 눈은 바람결을 언제 어디에서나 늘 알아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습니다. 빛결을 헤아리는 눈결이 되어요. 이때부터 나는 귓결로 흘리는 소리가 없습니다. 모든 소리가 노래인 줄 깨달을 수 있는 생각을 바람결에 새롭게 실어서 날립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으려고 밥을 끊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는 몸이 되도록 밥을 끊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몸으로 거듭나면, 이제 어떤 밥을 어디에서 어느 만큼 먹더라도, 나는 내 몸을 따사롭게 보살피면서, 내 마음을 언제나 넉넉하게 돌봅니다.


  바람이 있어야 물이 흐릅니다. 바람이 있어야 불이 탑니다. 바람이 있어야 숲이 푸릅니다. 바람이 있어야 하늘이 파랗습니다. 바람이 있어야 지구별에서 온 목숨이 깨어납니다. 바람이 있어야 온별누리(모든 은하계)에 이야기가 자랍니다. 바람을 바람대로 바라보면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람으로 몸과 마음을 함께 씻습니다. 바람이 우리 몸과 마음을 고루 씻어 주면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납니다. 바람을 들이켜서 내 몸과 마음을 구석구석 씻는 동안 내 넋은 기쁘게 웃고 노래합니다. 4348.3.11.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숲말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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