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88 꽃샘



  ‘꽃샘’은 이른봄에 꽃이 필 무렵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는 모습을 가리키는 낱말이라고 합니다. ‘꽃샘추위’라는 낱말도 함께 씁니다. ‘꽃 + 샘’이고, “꽃을 샘하다”를 가리키는 얼거리입니다. 이 얼거리에 따라 ‘책샘’이라든지 ‘밥샘’이라든지 ‘일샘’이라든지 ‘잔치샘’ 같은 낱말도 쓸 만하리라 느낍니다. 무엇을 샘한다고 하면 ‘(무엇) + 샘’처럼 쓸 수 있겠지요.


  그러면, 꽃샘바람이 불고 꽃샘추위가 다가오는 이른봄은 어떤 철일는지 헤아려 봅니다. 이른봄에 땅은 어떻게 달라지고, 꽃이나 겨울눈은 어떻게 바뀌는지 찬찬히 돌아봅니다.


  겨울이 저물면서 따사롭게 바람이 불면 들과 숲마다 푸릇푸릇 새싹이 돋습니다. 새싹은 겨울 끝자락부터 돋습니다. 한겨울에도 볕이 포근하면 딱딱한 땅을 뚫고 어느새 풀싹이 돋습니다. 동백꽃은 한겨울에도 꽃송이를 터뜨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직 겨울이 다 가시지 않은 때에 돋는 풀싹은 다시 겨울바람이 차갑게 불면 거의 다 시들시들 떨면서 옹크립니다. 일찍 돋은 풀싹은 잎 끝이 싯누렇게 마르기도 해요. 그런데, 이무렵 돋는 냉이나 씀바귀를 나물로 삼습니다. 달래나물도 이무렵에 캐서 먹습니다. 아직 추위가 흐르는 철에 봄나물이자 ‘늦겨울나물’을 먹어요.


  꽃샘바람은 꽃을 샘하는 바람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꽃을 샘하는 바람이 불기에 꽃은 더 기운을 내고, 겨울눈도 새롭게 기운을 냅니다. 마지막 기운을 모두어서, 잎을 더 푸르게 틔우려 하고, 꽃을 더 싱그러이 터뜨리려 합니다.


  찬바람이 불기에 풀과 꽃과 나무는 새롭게 기운을 얻습니다. 아니, 찬바람을 먹으면서 풀과 꽃과 나무는 스스로 더욱 기운을 내면서, 한결 씩씩하고 튼튼하게 이 땅에 섭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이 있기에 겨울이 있는데, 겨울이 있기에 봄과 여름과 가을이 있어요. 고요히 잠들도록 하는 겨울을 누리면서, 목숨 있는 모든 것은 새롭게 기운을 얻어서 활짝 깨어납니다.


  꽃샘은 꽃을 ‘샘하’기도 하지만, 꽃이 새롭게 피어나도록 하는 ‘샘물’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 꽃샘은 꽃을 시샘하는 한편, 꽃이 스스로 더 기운을 내도록 북돋우는 샘이 되어 줍니다.


  삶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모든 일은 뜻이 있어서 나한테 찾아옵니다. 이 일은 이러한 뜻이고, 저 일은 저러한 뜻입니다. 이 일을 나쁘게만 여긴다면 나로서는 그저 나쁠 뿐이고, 저 일을 좋게만 여긴다면 나로서는 그저 좋다고 여길 뿐입니다. 이 자리에서 맴돕니다. 좋고 나쁨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늘 제자리걸음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삶을 짓습니다. 좋음도 나쁨도 아닌 줄 알아채면서 마주할 수 있을 때에 삶을 짓는 첫걸음을 씩씩하게 내딛습니다.


  꽃을 시샘하는 추위는, 다른 눈길로 보자면, 꽃이 더 튼튼하고 씩씩하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추위입니다. 이만 한 추위쯤에는 지지 말라고, 이만 한 추위를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봄에도 쌩쌩 모진 바람이 불 수 있으니, 미리 잘 겪고 받아들이면서 한결 기운차게 솟으라고 하는 추위가 바로 ‘꽃샘추위’이지 싶습니다.


  샘물은 겨울에 얼지 않습니다. 샘물은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합니다. 샘물은 여름에는 여름대로 뭇목숨을 살찌우고, 겨울에는 겨울대로 뭇목숨을 보살펴요. ‘꽃샘’이란 무엇일까요? 꽃샘은 그저 꽃을 시샘하기만 하는 바람이거나 추위일까요? 꽃샘은 우리 삶에서 무엇일까요? 오늘날에는 거의 안 쓰는 옛말 가운데 ‘꽃등’이 있습니다. ‘꽃등’은 “맨 처음”을 뜻합니다. ‘꽃샘’은 봄으로 들어서는 첫 문턱입니다. 꽃샘을 거치면서 비로소 봄으로 나아갑니다. 4348.3.11.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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