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와 권총왕 이원수 문학 시리즈 3
이원수 지음 / 웅진주니어 / 1999년 8월
평점 :
품절


어린이책 읽는 삶 97



봄꽃 같은 아이, 봄나무 같은 어른

― 도깨비와 권총왕

 이원수 글

 권사우·설은영·이준섭 그림

 웅진주니어 펴냄, 1999.7.30.



  봄에 피는 꽃은 모두 봄꽃입니다. 이월에 피건 삼월에 피건 사월에 피건 모두 봄꽃입니다. 아직 봄이라 할 수 없는 이월에 피더라도, 이 봄꽃은 삼월과 사월에도 나란히 피어요. 볕바른 자리에서 아주 일찍 피는 봄꽃이 있고, 응달진 곳에서 느즈막하게 피는 봄꽃이 있어요. 그리고, 볕바른 곳에서도 느즈막하게 올라오는 봄꽃이 있습니다.


  냉이꽃은 이월에도 보지만 사월에도 봅니다. 민들레꽃은 삼월에도 보지만 오월에도 봐요. 어느 씨앗은 겨우내 봄을 기다렸다가 아주 빠르게 싹이 트고 뿌리를 내려서 꽃대까지 올려요. 어느 씨앗은 다른 들풀과 봄꽃이 한껏 터져서 들과 밭과 숲을 가득 메우고 나서야 비로소 기지개를 켭니다.


  가장 먼저 돋는 봄풀을 반기거나 가장 먼저 피는 봄꽃을 반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느즈막하게 돋는 봄풀이나 느즈막하게 피는 봄꽃을 반기는 사람은 드물 수 있어요. 그렇지만 풀과 꽃은 투정을 부리지 않습니다. 풀과 꽃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지 않습니다. 저마다 제때에 찬찬히 온힘을 다해서 이 땅에서 깨어납니다.



.. 경칠이는 재미만 났어요. 누가 야단을 쳐도 히히히 웃으며 도망을 치고는 또 짓궂은 장난만 쳤답니다 … 어머니는 경칠이에게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토끼가 얼마나 착한 짐승인데 그걸 때리고 찌르고 그러니? 아기 토끼의 눈까지 멀게 해 놓았으니 가엾어서 볼 수가 없구나.” 경칠이는 시무룩하니 앉아 있다가 말했습니다. “때려 줘도 아프단 말도 안 하고 날 놀려 주지 않아?” “꼭 아프다고 소릴 쳐야만 하니? 토끼의 말소리는 네 귀에 안 들리니까 그렇지. 너도 토끼 노래를 불렀었지?” ..  (7, 9쪽)



  일월에 태어나는 아이가 있고 십이월에 태어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먼저 태어난다 싶은 아이가 있을 테지만, 먼저라고 해 본들 더 앞서 태어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이와 같습니다. 먼저 태어난 어른은 없습니다. 저마다 제때에 맞게 즐겁게 태어난 숨결입니다.


  나이가 더 어리기에 철이 안 들지 않습니다. 나이가 더 많기에 철이 일찍 들지 않습니다. 저마다 제때에 철이 듭니다. 누군가는 열 살에 철이 들 테고, 누군가는 쉰 살에 철이 들 테지요. 누군가는 일흔 살이 되어도 철이 안 들었다 할 만하고, 누군가는 열 살이 채 안 되어 애늙은이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사람을 마주할 적에는 나이가 아닌 숨결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이를 마주하든 어른을 마주하든 겉모습이나 겉차림이 아니라 속모습과 속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휘둘리지 말고, 속에서 환하게 터져오르는 숨결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엄마가 날마다 고된 일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구나. 집을 뛰쳐나가서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소의 신세는 가엾은 거다.’ … “그래도 난 수근이가 좋았어요. 밤에도 나와서 날 쓸어 주고 그랬어.” “그래, 수근이는 참 착한 아이였어. 그런 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니까 얼마나 좋더냐?” ..  (33, 34∼35쪽)



  이원수 님이 빚은 동화를 엮은 《도깨비와 권총왕》(웅진주니어,1999)을 읽습니다. 이 책에는 〈도깨비와 권총왕〉을 비롯해서 모두 열 가지 짧은동화를 싣습니다. 〈토끼와 경칠이〉는 힘여린 짐승을 괴롭히던 경칠이가 꿈에서 토끼를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떠나는 송아지〉는 가난한 시골집에서 송아지를 팔아야 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수탉〉은 암탉을 늘 괴롭히는 수탉을 지켜보는 아이 이야기를 다루고, 〈바둑이의 사랑〉은 고양이와 한집에서 지내다가 새끼를 남기고 일찍 숨을 거둔 고양이를 마주하는 개 이야기를 다룹니다. 책이름에 붙은 〈도깨비와 권총왕〉은 아이들이 보는 책에 나오는 ‘도깨비’와 ‘권총왕’이 맞서는 이야기를 다뤄요.


  짧은동화 열 꼭지는 모두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이야기입니다. 어린이가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아름다운 마음밥을 받아먹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과 동무를 사랑할 뿐 아니라, 풀과 나무도 사랑하기를 바라는 숨결이 깃든 이야기입니다. 작은 벌레와 짐승도 내 몸과 같이 보살피거나 아낄 수 있기를 바라는 숨결이 깃든 이야기예요.



.. 언젠가 나비의 얄미운 꼴을 보다못해 “저놈의 짐승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린 일이 있고, ‘쥐약 먹은 쥐라도 먹고 거꾸러져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 걸 바둑이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죽은 건 아니겠지.’ … “불쌍한 것들아, 내가 네 엄마가 돼 줄게.” 바둑이는 새끼들 옆에 누워서 몸을 핥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새끼들이 모두 바둑이의 품안으로 기어들었습니다. “이것들아, 나는 지금 젖이 안 나니까 먹일 수 없다만, 따뜻이 품어 주니까 울지 마라.” ..  (56, 60쪽)



  언니이거나 오빠이거나 형이거나 누나라는 자리에 있는 아이라면, 제 동생을 아끼고 보살피면서 흐뭇합니다. 언제나 동생을 챙기거나 돌봐야 해서 고단하거나 힘들 일이란 없어요. 나보다 여리거나 어린 동생을 아끼면서 찬찬히 사랑이 샘솟습니다. 나보다 여리거나 어린 동생을 보듬으면서 찬찬히 어버이 사랑을 깨닫습니다. 내가 어린 동생을 돌보듯이 어버이도 나를 돌보았을 테니까요. 아니, 내가 투정을 부리거나 골을 부리더라도 어버이는 나를 가없는 사랑으로 따스하게 품었을 테니까요.


  나는 어버이한테서 받은 사랑을 동생한테 물려줍니다. 동생은 어버이와 언니한테서 받은 사랑을 동무와 이웃한테 물려줍니다. 동무와 이웃은 저마다 받은 사랑은 둘레에 고이 물려주겠지요.


  사랑이 흐르고 흘러서 아름답게 빛납니다. 사랑을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다 함께 아름답게 깨어납니다. 작은 사랑도 큰 사랑도 따로 없이 모든 사랑은 똑같이 따사로운 바람이 됩니다.



.. “야,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대낮에 도깨비가 다 나와? 총알 맛을 보고 얘길 해.” 하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대낮에 아이들에게 총을 겨누는 놈을 그냥 둘 줄 아나?” 하고 도깨비는 요술 방망이로 벤치를 탕탕 치며 말했습니다. “총알아, 없어져라!” … 용이는 제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걸 알았습니다. 가지도 않는 고장난 시계를 가지고 그나마 어머니 아버지 몰래 훔쳐 가지고 산타 할아버지하네서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  (98, 133쪽)



  요즈음에는 ‘팔려 가는 송아지’를 보며 눈물에 젖을 만한 어린이는 한국에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요즈음에는 ‘도깨비’를 생각하면서 살가운 놀이동무로 여길 어린이도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요즈음에는 ‘권총왕’이 아니라 ‘핵잠수함’이나 ‘우주선’을 떠올리면서, 어마어마한 전쟁무기를 아주 손쉽게 떠올릴 만합니다. 1911년에 태어나 1981년에 돌아가신 이원수 님이 예전에 쓰신 동화는 오늘날 문화나 문명으로 돌아보자면 아무래도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동화책 《도깨비와 권총왕》에는 어제와 오늘을 가로지르는 ‘다른 숨결’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어린이가 가슴에 품을 사랑을 다루는 동화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짝을 짓는 마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아끼고 돌보는 마음으로 다가서는 사랑을 보여주는 동화입니다. 지치거나 힘들 때마다 새롭게 일어서는 기운이 되는 사랑을 들려주는 동화입니다. 아프거나 괴로울 적마다 훌훌 털고 일어나서 새삼스레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사랑을 밝히는 동화입니다.


  겨울을 씩씩하게 난 씨앗이 봄에 활짝 웃습니다. 겨우내 옹크리던 풀씨가 새봄에 기지개를 켜면서 야무지게 잎을 틔우고 꽃을 터뜨립니다.


  봄꽃 같은 아이들입니다. 겨울에 손과 발이 꽁꽁 얼더라도 눈놀이를 하면서 봄을 부르는 아이들입니다.


  자, 어깨를 펴요. 시험성적이나 학원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는 끄고 바깥으로 나가요. 봄바람을 쐬고 봄비를 맞아요. 봄뼡을 쬐고 봄꽃내음을 맡아요. 이 땅에서 새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맑은 꿈을 스스로 지어서 사랑스레 일굴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이 곁에서 든든한 숲이 되어 주기를 빌어요. 봄꽃 같은 아이들 곁에서 봄나무 같은 어른이 될 수 있기를 빌어요. 4348.4.1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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