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20 온눈



  오늘날 한국에서 나오는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온’을 “전부의”나 “모두의”로 풀이합니다. 아주 잘못된 풀이라 할 수 있고, 아주 그릇된 풀이라 할 만하며, 아주 엉터리로 붙인 풀이일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은 이런 낱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40년에 나온 《문세영 조선어사전》을 살피면, ‘온’을 “= 온통”으로 풀이합니다. 이 또한 어설픈 뜻풀이라 할 테지만, 오늘날 한국말사전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면 ‘온통’은 무엇을 가리키는 낱말일까요. ‘온통’은 첫째, “있는 모두”를 가리킵니다. 둘째, “쪼개거나 나누지 않은 덩어리”를 가리킵니다. 쪼개거나 나누지 않은 덩어리란 무엇일까요? “오롯한 것”이요, 한자말로 하자면 “온전한 것”이나 “완전한 것”입니다.


  ‘온통·온’은 왜 ‘오롯한(온전한/완전한)’ 것일까요? ‘온’은 숫자로 ‘100’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숫자 ‘100’은 한자로 ‘百’이기도 하고, ‘百’이라는 한자는 숫자로 ‘100’일 뿐 아니라 빈틈이 없는 모습(새하얗다)을나타내고, 오롯이 있거나 옹글게 있는 모습을 가리켜요. 한국말 ‘오롯이’는 한자말 ‘온전(穩全)’과 같고, 한국말 ‘옹글게’는 한자말 ‘완전(完全)’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이니, 이 땅에서 오랜 옛날부터 쓰던 한국말부터 제대로 바라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넋에 깃드는 숨결을 제대로 마주해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한국말 ‘온’으로 숫자 100을 가리키려는 한국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작 백(100) 해 사이에 한국말 ‘온’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참으로 재미난 노릇입니다. 고작 ‘100’ 해 사이에 ‘온’이라는 숫자말이 사라지니까요. 왜 그러할까요? 왜 100이라는 숫자만 지나가도 우리는 우리가 수만 해에 이르도록 즐겁게 쓰던 말을 잃거나 잊을까요?


  종(노예)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이 이끄는 대로 휘둘리거나 휩쓸리면서 갇히거나 눌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끄는 대로 가지 못하고, 남이 이끄는 대로 ‘남이 시키는 짓’만 하면서 내 삶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백 해라는 나날은 사람을 슬기롭게 바꿀 수 있기도 하면서, 사람을 바보스럽게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지난 백 해에 걸쳐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잃거나 잊으면서 바보가 되었다면, 오늘부터 앞으로 백 해에 걸쳐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찾거나 헤아리면서 슬기로운 이슬떨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온’이라는 낱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잊도록 정치권력이나 사회제도나 학교교육이 자꾸 짓밟거나 들볶습니다. 이리하여, 요사이는 ‘백’이라는 한자말이 아니면 알아듣지 못하는 흐름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라 하더라도 ‘온통·온갖’ 같은 자리에서 ‘온’이 살아남습니다. 사회의식을 우리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이들은 한국사람한테 한자말을 억지로 쓰도록 밀어붙이고, 이에 따라 ‘전심(全心)’과 ‘전력(全力)’ 같은 한자말을 쓰라고 시키지만, ‘온마음’과 ‘온힘’이라는 한국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있으니, 국립국어원에서는 ‘온힘’을 사전 올림말로 다루지만 ‘온마음’은 사전 올림말로 일부러 안 다루어서 ‘온 마음’처럼 띄어서 써야 한다고 밝힙니다. 이 대목을 깊이 들여다보면 무척 무시무시한 꿍꿍이가 있는 줄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몸은 우리 마음에 따라 움직이기에, ‘마음’을 가리키는 낱말을 사람들이 덜 쓰거나 안 쓰거나 잘못 쓰거나 엉터리로 쓰도록 이끌면, 사람들 몸도 엉터리로 흐르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에는 ‘온마음’이라는 낱말도 안 실리지만, ‘온넋’이나 ‘온얼’이나 ‘온뜻’이나 ‘온머리’나 ‘온삶’이나 ‘온사랑’ 같은 낱말도 안 실립니다. 게다가 ‘온누리’와 ‘온나라’조차 한 낱말로 일부러 안 삼습니다.


  ‘온누리’란 무엇일까요? 오롯한 누리이자 옹근 누리입니다. 모자람도 빈틈도 없는 누리와 나라가 ‘온누리·온나라’입니다. ‘온누리’는 ‘우주(宇宙)’를 가리키는 오래된 한국말이기도 합니다. 왜 그러한지는 앞서 밝혔듯이, ‘모든 누리’가 ‘온누리’이니 ‘모든 터’를 가리키는 한자말 ‘우주’는 한국말로 ‘온누리’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뜻이 더 있어요. ‘온누리’는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누리입니다. 전쟁도 미움도 다툼도 시샘도 없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만한 누리가 온누리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낱말을 정치권력이나 사회제도나 학교교육은 몹시 싫어하고 사람들이 못 쓰게 가로막습니다.


  ‘온힘’을 다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할까요? 언제나 ‘온마음’을 씁니다. 온마음을 써야 온힘을 낼 수 있습니다. 몸에서 온힘을 내자면, 먼저 마음에서 ‘온기운’을 써야 합니다. 온마음을 쓰면서 이웃과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눈을 뜨려 합니다. 모든 귀를 열려 하며, 모든 꿈을 꾸려 합니다. 이리하여, 온기운은 온힘을 내도록 이끌어서, ‘온눈’과 ‘온귀’가 됩니다. 온눈을 뜨는 사람은 ‘오롯한 눈(완전한 눈)’을 뜨는 셈입니다. 이를테면 ‘제3의 눈’을 뜨는 셈이고, ‘제3의 눈’이란 바로 ‘온눈’입니다.


  그런데 사람한테는 ‘셋째 눈’만 있지 않습니다. 셋째 귀도 있어요. 그래서 ‘온귀’입니다. 셋째 눈과 귀가 있으니, 셋째 몸과 머리와 팔과 다리가 있을 테지요. 이 모두 ‘온몸·온머리·온팔·온다리’입니다. 오롯이 모든 것을 쓰는 삶이란 ‘온삶’이고, 온삶일 때에는 뇌를 100퍼센트 씁니다.


  자, 이제 실마리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할 만합니다. 뇌를 100퍼센트 쓰는 일이란, 뇌를 ‘온(100)’으로 쓰는 일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정치권력과 사회제도와 학교교육으로 똘똘 뭉친 사회의식은 한국사람이 ‘온’이라는 낱말을 잊거나 잃도록 몰아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막아야, 이 나라 사람들 모두 종이 되어서 ‘정치권력과 사회의식이 시키는 짓’만 되풀이하는 굴레에 갇히거든요. 이 나라에서 한국말을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배우는 얼거리는 하나도 없이, 영어 바람에 미치고 한자 지식에 짓눌리도록 하는 까닭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온꿈’과 ‘온사랑’으로 퍼집니다. 모든 것을 바라볼 뿐 아니라 꿰뚫어볼 수 있으니, 아무것에도 안 휘둘리면서 내 길을 갑니다. 온눈으로 바라보면서 온길을 걷습니다.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온빛’이 흐릅니다. 온빛이 흘러서 ‘온어둠’이 조용히 잠듭니다. 온어둠에서 새로운 삶이 태어납니다. ‘온새’라고 하지요. 온통 새롭기에 ‘온새’입니다. 온빛을 받아 온어둠에서 온새로 나아가는 온삶일 때에, 우리는 저마다 ‘온사람’으로 섭니다. 홀가분하게 삶을 짓기에 온사람이 되니, 온넋은 온바람을 타고 온곳(온갖 곳/모든 곳/온전하거나 완전한 곳)에 온씨(온갖 씨앗/모든 씨앗/온전하거나 완전한 씨앗)를 뿌립니다. 이제 온별(온 우주에 있는 별)에 환한 무지개가 뜹니다. 온겨레(온별에 있는 모든 사람)가 어깨동무를 합니다. 온나라를 이룹니다. 작은 점 ‘온’에서 비롯하여 ‘온나라’로 갑니다. 4348.2.1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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