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두 갈래



  책을 읽는 두 갈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보기를 들 만합니다. “우리한테는 불가능이 없다”와 같은 말씨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가능만 있다”와 같은 말씨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사람이니, 이 말씨를 한국말로 고쳐서 “우리한테는 못 할 일이란 없다”와 “우리한테는 할 수 있는 일만 있다”처럼 말하듯이 책을 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그리는’ 대로 삶을 짓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을 지으려는 대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마음속에 그리는 대로 하루를 열고, 스스로 마음속에 그리는 대로 ‘내가 바라는 책’을 만나서 손에 쥐어 읽습니다. 내가 바라지 않는 책이 나한테 오는 일은 없습니다. 자질구레한 책이든, 쓰레기처럼 느끼는 책이든, 이 모든 책은 ‘내가 바랐기에’ 나한테 옵니다.


  내 눈에 뜨이는 책은 모두 내가 바라던 책입니다. 바라지 않는 책은 내 눈에 아예 안 보입니다. 내 눈에 뜨여서 내가 손에 쥐어 읽는 책에서는 ‘내가 바라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책마다 백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내가 바라는 이야기를 골라서 읽기에, 백 가지 가운데 열 가지나 한 가지만 읽을 수 있고, 참말 누구나 이렇게 책을 읽습니다. 이리하여, 거의 모든 사람은 ‘백 가지 이야기가 깃든 책에서 고작 한두 가지나 열 가지쯤 읽’고 나서 이 책 하나를 ‘마치 다 읽거나 다 안다’고 하는듯이 느낌글을 쓰거나 서평을 쓰거나 독후감을 쓰거나 비평을 합니다.


  백 가지 이야기 가운데 한두 가지나 열 가지를 읽는다는 말은, 고쳐서 말하면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우리는 누구나 ‘내 뇌(머리)’를 10퍼센트조차 제대로 못 쓴다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우리 뇌(머리)를 100퍼센트 다 쓴다면, 어느 책을 읽든 백 가지 이야기를 모두 살피고 헤아려서 모두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뇌(머리)를 쓰는 만큼 어느 책 하나를 읽습니다.


  책을 잘 읽는 길은 따로 없습니다. 책을 손에 쥐기 앞서, 내 몸과 마음을 아름답고 사랑스레 추스르면 될 뿐입니다. 내가 어떤 책을 골라서 읽든, 나는 늘 내 몸과 마음에 맞추어 ‘몇 가지 이야기’만 골라서 읽으니까요.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