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은 따뜻하다 창비시선 88
정호승 지음 / 창비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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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5



시와 뼈다귀

―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0.10.25.



  고흥 시골자락을 떠난 시외버스는 다섯 시간 가까이 달려 서울에 닿습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자락을 떠나 도시로 볼일을 가면서 책을 읽습니다.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시외버스에서 시집을 세 권째 다 읽습니다. 시집을 읽는 동안 시외버스 텔레비전에서는 사람들이 싸우고 죽이고 피가 튀는 모습이 흐르고, 내가 앉은 자리에서 네 칸쯤 앞에 앉은 일곱 살짜리 아이는 이런 방송을 버젓이 들여다봅니다.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나들이를 가는 할매도, 할매 곁에 있는 여러 할배도, 시외버스 일꾼도, 일곱 살 아이가 ‘사람들이 때리고 죽이고 거친 말을 일삼는 온갖 몸짓’이 흐르는 연속극을 안 보게 하도록 멈추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아이와 함께 멍하니 이 연속극을 들여다봅니다.


  재미 삼아서 보면 될 연속극일 수 있습니다. 주먹다짐 연속극도, 살 섞는 이야기 흐르는 연속극도, 일곱 살 아닌 대여섯 살 아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틀어도 될는지 모릅니다. 아니, 한국 사회는 어른과 아이를 모두 주먹다짐 물결과 살섞기 바람으로 휘감으려 하는지 모릅니다.



.. 내 너를 위해 더듬이를 잘라야겠느냐 / 내 너를 위해 저녁해를 따라가야겠느냐 / 모래내 성당의 종소리는 들리는데 / 개연꽃 피는 밤에 가을달은 밝은데 ..  (이별에게)



  서울로 접어든 시외버스는 오직 아스팔트만 있는 찻길을 달려 고속버스역에서 멈춥니다. 서울에서는 길바닥이 아니면 볼 것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길바닥 아닌 다른 데를 보고 걷다가는 전봇대에 부딪히거나 광고판에 부딪히거나 오토바이에 치이거나 다른 사람이 툭툭 치고 지나갈 테니까요. 서울에도 곳곳에 나무가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나무를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걷기 어렵습니다. 겨울눈이 텄구나 하고 생각하며 쳐다보고 길을 걷다가는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자동차가 빵빵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랄 수 있습니다. 거님길을 빠르게 내달리는 자전거한테 치일 수 있습니다.


  시골집에서는 언제나 나무를 바라보며 지냈으나, 볼일을 보러 서울로 오면 길바닥만 바라봅니다. 사람이 걷기에는 너무 좁은 길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자전거와 다른 사람한테 치이지 않으려고 바삐 걸음을 놀립니다.



.. 어둠 속에서도 풀잎들은 자라고 / 오늘도 서울 가는 야간열차의 흐린 불빛을 바라보며 / 내가 던진 마음 하나 별이 되어 사라지면 ..  (당신에게)



  서울을 가득 채운 아주 많은 사람은 저마다 일이 많아 바쁩니다. 발걸음도 바쁘고, 살림돈을 벌어서 달삯을 치르느라 바쁩니다. 여기를 갔다가 저기를 가느라 바쁩니다. 그래도 저마다 손에 손전화를 들고 무엇인가 들여다봅니다. 손에 종이책을 쥐는 일은 드물지만, 손전화에 찍히는 글은 바지런히 들여다봅니다. 책은 안 읽어도 글은 읽는 셈입니다. 다만, 삶을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요, 사랑을 노래하는 글이 아니며, 꿈을 짓는 글이 아닙니다. 10초만 지나면 낡거나 삭는 ‘새롭지 않은 새소식’만 들여다봅니다. 10초만 지나도 잊고 마는 수없이 많은 ‘쪽글’만 들여다봅니다. 하나같이 바쁘면서 ‘새롭지 않은 새소식과 쪽글’을 들여다보느라 바쁘기 때문에, 이 넓은 서울에서는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무척 드물고,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조차 매우 드뭅니다. 지하철역 유리벽에 시 몇 줄을 아로새기기는 하지만, 이 시 몇 줄이나마 읽을 겨를을 낼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유리벽에 아로새긴 시 말고, 정갈한 마음으로 곱게 꿈을 지은 이야기를 엮은 시집 한 권 장만하려고 동네책방으로 나들이를 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  (가을꽃)



  정호승 님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1990)를 읽습니다. 시골집을 떠나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에서 읽습니다. 시골집을 벗어나 읍내로 가까이 갈수록 줄어드는 나무와 숲을 흘깃 바라보면서 시집을 읽습니다. 고흥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탄 뒤로는 차츰 줄어드는 나무와 숲을 살짝 쳐다보다가 시집을 다시 읽습니다.


  별은 따뜻합니다. 저 먼 별도 이 지구별도 따뜻합니다. 연속극을 쳐다보는 일곱 살 시골아이도 따뜻하고, 큰 소리로 연속극을 틀고 시외버스를 모는 일꾼도 따뜻합니다. 따뜻하지 않은 사람은 없고, 따뜻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 호롱불 켜놓고 밤새워 / 콩나물 다듬으시던 어머니 / 날 새기가 무섭게 콩나물다라이 이고 나가 / 온양시장 모퉁이에서 밤이 늦도록 / 콩나물 파시다가 할머니 된 어머니 / 그 어머니 관도 없이 흙 속에 묻히셨다 ..  (어머니)



  그런데, 서울에서는 해가 질 무렵 별을 볼 수 없습니다. 새벽에도 별을 볼 수 없습니다. 달조차 볼 수 없고, 볼 수 없는 별과 달은 아예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천만이 넘는 사람이 바글거리는 서울인데, 경기도를 아우르면 이천만이나 되는 사람이 우글거리는 도시인데, 이곳에서 별을 그리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정호승 님은 《별들은 따뜻하다》 같은 시집을 선보이지만, 정호승 님 스스로 서울에서 별을 얼마나 쳐다보고 나서 이러한 시집을 쓸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밤새 환한 불빛 때문에 별이 안 보이기도 하지만, 높다란 아파트숲 때문에 별이 가리기도 하지만, 엄청난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가 하늘을 잿빛으로 덮어 별이 묻히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두 발로 디디는 이 지구별부터 제대로 느끼려고 하는 몸짓은 아주 드물다고 느낍니다.



..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 가장 높은 가지 위에 집을 짓다가 // 홀로 바람 되어 / 산길 따라 떠난 사내 // 지은 죄 많아 영혼 없어도 / 이제는 죽음도 아프지 않아 // 별들의 시냇물 소리에 / 새벽잠 드는 사내 ..  (金宗三)



  뼈다귀를 묻을 땅 한 뼘이 없는 서울입니다. 고기를 뜯는 사람은 많아도, 고기가 밥상에 오르기까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다가 잡히는가를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뼈다귀를 묻어 흙으로 돌아가도록 할 만한 땅 한 뼘이 없는 서울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을 땅 한 뼘이 없는 서울이요, 고작 한 평짜리 자투리땅조차 대단히 비싼 값으로 사고파는 서울입니다.


  돈이 될 만하면 시멘트 건물을 높이 올리는 서울입니다. 언제나 돈부터 따져야 하는 서울입니다. 삶을 생각하거나 사랑을 헤아리는 보금자리하고는 너무 먼 서울입니다. 아이와 함께 꿈을 짓거나, 어른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두레를 하기에는 너무 벅찬 서울입니다. 지구가 무너지더라도 나무를 심는다는 사람이 있다지만, 막상 이곳 서울에서 나무 한 그루 심겠노라 외치는 사람은 어디에서 만날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아파트를 내 집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아이와 함께 나무를 심을 만한 보금자리를 찾거나 살피려는 사람은 없는 서울입니다.


  나무를 심으려 하지 않으니 책을 읽으려 하기 어렵습니다. 나무를 바라보려 하지 않으니 손수 시를 쓰고 노래하면서 웃기란 어렵습니다.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푸른 바람을 쐬어야 비로소 별을 볼 텐데, 서울에서 부산하게 하루를 여는 아주 많은 이웃들이 이녁 따순 가슴을 자꾸 잊으면서 그예 쳇바퀴만 돌려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는 ‘어느 별이 어떻게 따뜻한지’를 밝히거나 들려주지는 못합니다. 문득 뼈다귀가 떠오릅니다. 4348.1.1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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