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와 가시내 책읽기



  일곱 살 큰아이와 네 살 작은아이가 면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 놀이터에 나들이를 가서 한참 논다. 이제 작은아이가 졸릴 때가 가깝구나 싶어서 짐을 꾸리려는데,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 둘이 놀이터로 자전거를 타고 온다. 하나는 여덟 살이고 다른 하나는 아홉 살이다. 아홉 살인 아이가 우리 집 네 살박이를 바라보면서 “너 남자야, 여자야?” 하고 묻는다. 우리 집에서는 도무지 안 쓰는 말이니 네 살박이 작은아이는 이 말을 알아듣지 않는다. 옆에서 일곱 살박이 큰아이가 “보라는 남자야.” 하고 말을 거드는데, 이때에 네 살박이 작은아이가 “나는 보라야!” 하고 크게 외친다.


  큰아이가 네 살 무렵일 적에도 큰아이를 보고 ‘사내’인지 ‘가시내’인지 묻는 사람이 참 많았다. 그게 그렇게 대수로운가? 그걸 그렇게 알고 싶은가? 아이들 성별을 물을 적에 나는 웬만해서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대꾸할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에 큰아이는 스스로 “나는 사름벼리예요!” 하고 외쳤다. 큰아이는 그림책이나 만화책이나 만화영화에서 ‘어른들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가르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에 이제는 ‘남자·여자’라는 낱말을 안다. 우리 집에서는 사람을 구태여 사내와 가시내로 나누지 않지만, 사회에서는 사람을 늘 둘로 쪼갠다.


  사회에서 사람을 사내와 가시내로 쪼개거나 가르는 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저 쪼개거나 가르는 일일 뿐이다. 그러면, 사회에서는 사람을 왜 둘로 쪼갤까? 사람을 둘로 쪼개면서 두 갈래 사람을 서로 섬기거나 아끼거나 모시거나 사랑하려는 뜻인가? 사람을 두 가지로 가르면서 두 가지에 따로 서는 사람을 높이거나 보살피거나 좋아하려는 뜻인가?


  평화나 평등으로 나아가려는 뜻에서 사내와 가시내를 가른다면 재미있거나 즐거울 만하리라 본다. 그러나, 사회나 언론이나 교육이나 문화나 예술이나 정치나 경제에서 가르는 잣대는 ‘평화가 아니’고 ‘평등이 아닌’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저 ‘사람’을 보면 된다. 사내나 가시내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사람’을 보면 된다. 어린이나 어른이 아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도 아니다. 모두 그저 ‘사람’이다. 대추나무를 알아보고 잣나무를 살필 줄 아는 눈은 반갑다. 그러나 대추나무도 나무요 잣나무도 나무이다. 사내와 가시내를 가려서 보려 한다면, 먼저 둘 모두 오롯이 사람인 줄 바라보면서 살가이 아낄 수 있는 마음이 되기를 빈다.


  그런데, 고작 아홉 살짜리 아이가 읊는 “너 남자야, 여자야?”를 놓고 시시콜콜 따지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이 아홉 살짜리 아이는 벌써 ‘옷차림’이나 ‘머리카락 길이’나 ‘입은 옷 빛깔’만 놓고서 사내와 가시내를 갈라야 한다는 ‘강박관념·고정관념·선입관’이 박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4347.12.2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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