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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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우리는 모두 이웃



  아침에 뒤꼍에서 감을 두 알 줍습니다. 나무에 달린 감을 딸 수도 있지만, 스스로 똑 떨어진 감을 주울 수도 있습니다. 흙바닥에 떨어진 감을 주으니, 한 알에는 개미가 열 마리 남짓 신나게 파먹고, 다른 한 알은 딱정벌레 두 마리가 바쁘게 파먹습니다. 어떻게 할까 하고 한동안 생각하다가 손으로 감알 살점을 떼어냅니다. 개미와 딱정벌레도 함께 먹을 감알이니까요.


  뒤꼍에서 난 커다란 호박을 한 덩이 잘라서 삶았습니다. 엊저녁에 남은 덩이에서 속을 파는데 꼬물꼬물 하얀 벌레가 여러 마리 보입니다. 이 벌레는 어떻게 호박덩이에 파고들었을까요. 호박 속을 조금 더 긁습니다. 다 긁은 속은 옆밭 귀퉁이로 던집니다. 호박벌레는 옆밭 귀퉁이 풀밭에서 남은 속을 더 먹다가 풀잎을 먹고 자랄까요. 아니면 흙으로 파고들어 조용히 겨울잠을 자려 할까요.


  만화를 그리는 이희재 님이 빚은 《낮은 풍경》(애니북스,2013)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낮은 풍경》은 만화책이라 할 수도 있고 그림책이라 할 수도 있으며 이야기책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나즈막한 곳에서 나즈막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웃으로 만나서 그림 몇 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입니다.


  서울 광화문에 나들이를 가서 만난 수많은 이웃을 바라보던 이희재 님은 도란도란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사람들은 모여서 떠들고 노래하고 토론의 순간을 즐겼다. 끼리끼리 노래 부르다 낯선 이들과도 거침없이 뒤섞였다. 한 자리에서 머물다 파도를 타듯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와 같은 말을 붙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른 마당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모두 너른 마당에서 모입니다. 너른 마당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왁자지꼴 이야기잔치를 벌입니다. 막걸리 한 사발이 오가기도 하고, 밥 한 그릇이나 지짐이 하나 나누어 먹기도 합니다.


  너른 마당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놉니다. 너른 마당은 그야말로 너른 마당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이야기꽃이요 아이들은 놀이꽃입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어른들은 바닥에 펑퍼짐하게 주저앉습니다. 놀이꽃을 피우는 아이들은 온몸에 땀을 내면서 나무도 타고 흙바닥에 그림도 그립니다. 너른 마당이 있을 때에 삶에서 꽃이 피지 싶습니다. 삶꽃입니다.


  돈을 들여서 지을 공원이 아니라,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는 흙바닥 너른 마당입니다. 자동차가 들어오지 않는 너른 마당입니다. 사람들이 두 다리로 오가는 너른 마당입니다. 들일을 쉬는 너른 마당이요, 도시에서 사람들이 숨을 돌리는 너른 마당입니다. 시원한 들바람을 쐬는 너른 마당이며, 도시에서 사람들이 자동차 배기가스와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날 만한 너른 마당입니다.


  이야기책 《낮은 풍경》을 읽으면 이야기가 조물조물 흐릅니다. 이희재 님은 서울에서 나즈막한 동네로 마실을 갑니다. 나즈막한 동네에서 나즈막한 집을 짓고 나즈막하게 살림을 꾸리는 이웃을 만납니다. 이러다가 또 그림을 그리고, “타향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곳은 삶의 터전이었고 고향이었다. 2009년 이래, 재개발을 하네 마네 하며 지축이 흔들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말이 춤을 추었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갔고, 남은 이들은 철거와 보상의 저울추 사이에서 불안과 싸웠다.”와 같은 말을 붙입니다.


  삶터가 일터입니다. 삶터가 놀이터입니다. 어른들은 삶터에서 일을 하고 사랑을 속삭입니다. 아이들은 삶터에서 놀이를 하고 사랑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습니다.


  돈을 벌어서 돈을 써야 할 삶이 아닙니다. 사랑을 지어서 이야기를 나눌 삶입니다. 돈만 많이 번대서 살림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경제개발이나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우리 삶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즐겁게 어우러질 삶이 되어야 살림이 나아집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하루가 될 때에 비로소 삶이 나아집니다.


  생각해 보셔요. 4대강사업 같은 끔찍한 막공사를 저지르면서 쏟아부은 돈이 얼마이고, 4대강사업으로 지은 시멘트 건물을 지키려고 들여야 할 돈이 얼마인가요. 처음부터 이런 돈을 세금으로 거두지 않았으면 사람들 살림살이는 넉넉했겠지요. 이만 한 돈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마을과 보금자리를 가꾸도록 도와주었으면, 정부가 따로 하는 일이 없어도 사람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레 하루를 일구겠지요. 더욱이 남녘과 북녘은 군사비로 지나치게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남녘은 남녘대로 ‘평화 지키기’를 외치면서 값비싼 전투기와 탱크와 미사일과 전함을 사들입니다. 북녘은 북녘대로 ‘평화 지키기’를 외치면서 온갖 전쟁무기를 스스로 큰돈 들여서 만듭니다. 남녘과 북녘이 서로 참다운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무기를 차츰 줄이거나 없애면서 참으로 평화로운 길을 걸어야 마땅합니다. 전쟁무기를 자꾸 늘리면 그예 전쟁으로 갈 뿐입니다. 전쟁무기를 줄여야 평화로 갑니다. 전쟁무기를 자꾸 늘리면 북녘뿐 아니라 남녘도 그 많은 전쟁무기를 사들이고 지키느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써야 하니, 나라살림이 와르르 무너질밖에 없어요.


  그림쟁이, 또는 만화쟁이, 또는 이야기쟁이 이희재 님은 “나는 둑길에 앉아 점심을 먹는 것도 잊고 장터의 풍정에 홀려 사람들을 그렸다.” 하고 말합니다. 저잣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살갑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구나 싶기에 그만 배고픔까지 잊은 채 그림을 그립니다.


  이 마음이 곱습니다. 이웃을 살갑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게 바라보는 이 마음이 곱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아이들이 해맑고 웃으면서 노래하거나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 배고픈 줄 모릅니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까르르 웃고 노래하면서 어울려 놀 때에 배고픈 줄 모릅니다. 한참 노는 아이들을 불러서 ‘얘, 배고프지 않니?’ 하고 물어야 아이는 비로소 ‘어, 배고프네.’ 하고 말합니다.


  삶을 가꾸거나 살림을 펴는 길은 먼 데에 없습니다. 삶을 북돋우거나 살림을 일구는 길은 가까운 데에 있습니다. 돈을 더 벌어야 삶이나 삶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과 살림에 사랑이 깃들어야 하루가 즐겁습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듯이, 어른들이 기쁘게 이야기꽃을 피우듯이, 우리는 저마다 즐거운 아름다움을 사랑스럽게 찾아서 누릴 때에 새로운 삶과 살림을 가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웃입니다. 이웃끼리는 밥 한 그릇을 즐겁게 나눌 뿐, 밥값을 받지 않습니다. 이웃끼리는 즐겁게 선물을 나눌 뿐, 선물값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지구별 이웃인 줄 느끼며 살아간다면,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과학도 교육도 슬기롭게 가다듬는 길을 열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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