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 사랑 애지시선 25
조동례 지음 / 애지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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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63



시와 꽃

― 어처구니 사랑

 조동례 글

 애지 펴냄, 2009.4.27.



  봄이 오면 꽃을 노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겨우내 꽃내음을 거의 못 맡다가, 봄에는 들과 숲과 길에 들꽃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여름에도 가을에도 꽃은 어디에나 있고, 겨울까지도 꽃은 참말 어디에나 있으나, 따사로운 볕과 함께 몽실몽실 고개를 내미는 봄꽃이 더없이 살가우면서 반갑기에 꽃을 노래하지 싶습니다.



.. 꽃이 해마다 제 모양으로 피는 것은 / 스스로 피어 스스로 지는 까닭이다 ..  (낙화 유감)



  가을을 코앞에 둔 팔월 막바지에 부추꽃과 까마중꽃을 바라봅니다. 부추꽃도 하얗고 까마중꽃도 하얗습니다. 그런데, 부추와 까마중이 맺는 열매를 보면 새까맣습니다. 부추씨는 아주 조그마한 까만 알갱이요, 까마중알은 새까맣게 잘 익은 열매입니다.


  어쩜 이 아이들은 하얀 꽃에 까만 열매일까요. 어쩜 이 아이들은 가을에 하얗게 빛나는 꽃을 우리한테 베풀까요. 여느 꽃은 오래도록 꽃잎을 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추꽃과 까마중꽃은 퍽 오랫동안 꽃잎을 벌립니다. 그러고는 참으로 천천히 열매가 익어요. 부추씨도 까마중알도 참으로 천천히 익어요.


  부추씨는 토실토실 잘 익으면 천천히 씨방이 벌어지면서 어느 날 톡 터지면서 씨앗이 퍼집니다. 까마중알은 우리더러 얼른 따먹으라면서 노래합니다. 까마중알을 훑어 밥과 함께 먹는데, 까마중알을 훑고 까마중잎을 뜯어서 꾸준히 먹으면 늦여름을 지나 가을을 거쳐 겨울 문턱까지 새로운 열매와 잎을 실컷 누립니다.



.. 앉아가나 서서가나 걷다가 누워가나 목적지는 매한가지인데 출근길 달리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 안절부절이다 신문보는사람 누군가와전화하는사람 문자메시지탁구치는사람 흐린창문닦아바깥보는사람 ..  (일생)



  팔월 끝자락에 피는 부추꽃과 까마중꽃은 어떤 꽃이라고 해야 할까 헤아려 봅니다. ‘팔월꽃’이라 하면 되겠지요. 팔월꽃은 ‘여름꽃’일까요? 그런데 구월에도 하얀 꽃이 그대로 이어가면 어쩌지요? 이때에는 ‘구월꽃’이면서 ‘가을꽃’이라 해야 할까요?


  이도 저도 안 되겠구나 싶어, 다시금 ‘부추꽃’과 ‘까마중꽃’이라고만 이름을 부릅니다. 부추꽃과 까마중꽃 이름을 한창 부르노라면, 어느새 고들빼기꽃이 고개를 내밉니다. 하얗거나 노란 고들빼기꽃이 바람 따라 한들한들 춤을 춥니다. 처음에는 굵직한 외줄기에서 꽃대가 나오는가 싶은 고들빼기인데, 외줄기 꽃대는 둘로 넷으로 여덟로 열여섯으로 갈라집니다. 갈라진 꽃대는 또 둘로 넷으로 여덟로 열여섯으로 갈라집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외줄기 꽃대였던 고들빼기인데, 어느새 수십 갈래 꽃대로 퍼지고, 수십 갈래 꽃대에서는 또 수많은 꽃망울이 맺혀요.


  고들빼기라는 풀 하나가 이루는 꽃망울은 아주 많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조그맣고 가벼운 씨앗인데, 이 작고 가벼운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서 우람한 나무와 같이 선 뒤, 수없이 많은 꽃을 피웁니다.



.. 정육점과 담 사이 고양이 한 마리 때늦은 밥상ㅇ르 앞에 두고 온몸에 힘을 뺀 채 엎드려 있다 하마터면 밟을 뻔한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아닌 새벽 세 시 무언가 잰 동작이 순간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인데 ..  (당당한 배후)



  관청에서는 따로 코스모스를 심느니 루드베키아를 심느니 팬지를 심느니 꽃잔디를 심느니 하는데, 굳이 길가에 꽃을 사다가 심어야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됩니다. 어떤 들꽃이 피고 지는가를 지켜보면 됩니다.


  들꽃 가운데 ‘잡꽃’은 없습니다. 들풀 가운데 ‘잡풀’은 없습니다. 모든 풀과 꽃은 흙을 살립니다. 사람들이 농약과 비료로 더럽히거나 망가뜨린 흙을 살리는 들풀입니다. 사람들이 자동차 배기가스와 온갖 화학물질로 더럽히거나 망가뜨린 흙을 살찌우는 들꽃입니다.


  들꽃은 스스로 씨앗을 퍼뜨립니다. 들꽃은 스스로 풀잔치와 꽃잔치를 베풉니다. 사람들은 들풀과 들꽃 곁에서 풀잔치와 꽃잔치를 누리면 됩니다. 풀꽃이 어떻게 우리 삶자락을 가꾸는가를 바라보면서, 알맞게 풀을 뜯어서 봄나물과 여름나물과 가을나물과 겨울나물로 먹으면 됩니다. 꾸준하게 피고 지는 꽃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꽃놀이도 하고 사진놀이도 하면 됩니다.



.. 남들은 이가 나기 시작하면 / 젖을 떼애 한다고 당부하는데 / 마땅히 줄 게 없던 나는 차마 / 아이가 돌이 지나도록 젖을 물렸다 / 왼젖을 빨릴 땐 오른젖을 손에 쥐어주고 / 오른젖을 빨릴 땐 왼젖을 손에 쥐어주었다 ..  (사랑과 집착 사이)



  풀이 좀 드세게 자랐다 싶으면? 낫으로 베면 되지요. 그냥 발로 밟아서 쓰러뜨려도 돼요. 풀은 사람한테 무어라 따지지 않습니다. 낫으로 베이거나 발로 밟힌 풀은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조용히 숨을 거둔 풀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요. 흙이 됩니다. 흙에서 태어난 풀은 흙으로 돌아가면서 흙을 살찌워요. 그러니, 풀이 가득 돋은 땅에 농약을 뿌리지 마셔요. 흙을 살리고 싶으면 풀이 해마다 나고 지고 죽는 흐름을 지켜보면 되고, 지켜보기가 벅차다면 가끔 낫질을 해서 풀이 흙으로 돌아가도록 해 주면 됩니다.


  풀은 사람이 어떻게 하든 딱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농약을 자꾸 뿌리면 사람한테 농약을 고스란히 돌려주어요. 농약을 뿌리는 사람들한테는 ‘농약 기운이 담긴 남새’를 선물하지요. 고추밭에 농약을 뿌리면 다른 풀과 풀벌레가 죽을까요? 아마 죽을는지 모르지요. 그리고, 그만큼 흙이 죽습니다. 흙이 죽으면 남새도 싱그럽지 못해요. 그래서 시골에서는 농약과 함께 ‘화학약품 비료’를 줍니다. 또는 ‘항생제와 사료를 먹은 소나 돼지가 눈 똥으로 만든 거름’을 주는데, 이런 거름은 아주 화학약품덩이입니다. 하나도 유기농이 아닙니다. 화학농입니다.


  수박밭이나 참외밭이나 포도밭이나 능금밭에 농약을 뿌리면 어디로 가겠어요? 모두 열매한테 갑니다. 농약을 뿌리는 만큼 우리는 누구나 농약을 먹는 셈이에요. 농약을 안 뿌리면? 농약을 안 뿌리면 흙기운과 볕내음과 바람노래와 빗방울을 먹는 셈입니다.



.. 제발 그만 좀 하시라니까요 가만히 앉아서 전화 한통이면 서울이 아니라 팔도 안방까지 갖다준다니까요 오천 원이면 차비 반도 안 되니까 착불로 하시면 된다니까요 이제 답답한 세상 그만 좀 사시라니까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다니까요 듣는 둥 마는 둥 천리 길 달려온 어머니 택배는 집에 들어서자마다 짐을 부리시더니 주섬주섬 꺼내주는 서비스까지 잊지 않으신다 ..  (택배)



  조동례 님 시집 《어처구니 사랑》(애지,2009)을 읽습니다. 풋풋하면서 어여쁜 기운이 감도는 싯말을 가만히 혀에 얹습니다. 조동례 님은 이 책에 담은 시를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요. 이녁 어머니한테 한소리를 잔뜩 늘어놓지만, 막상 어머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애틋한 마음으로 시를 썼을까요. 고작 돌쟁이밖에 안 된 아기한테 어떻게 젖을 뗄 수 있느냐고, 이가 난 아기가 젖을 빨다가 깨물어도 가없는 사랑인 줄 여기면서 시를 썼을까요.


  아무렴 그렇지요. 예전에는 누구나 아이한테 서너 살 아닌 예닐곱 살에도 젖을 물렸는걸요. 한두 살뿐 아니라 대여섯 살도 아직 ‘아기’이니까요.



.. 앞선 무덤 가 연두빛 새순 보다가 / 오래 잊고 산 이름 하나 떠올라 / 눈물이 벚꽃처럼 터지려는데 / 언제 피었을까 노오란 꽃다지 ..  (다시 피는 꽃을 위하여)



  시 한 줄은 꽃 한 송이입니다. 시 두 줄은 꽃 두 송이입니다. 잘난 시가 없고 못난 시가 없습니다. 잘난 들꽃이나 못난 들꽃이 없듯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아름다운 눈망울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스러운 몸짓입니다. 우리는 서로 착한 노래입니다. 우리는 서로 즐거운 웃음입니다.


  시를 쓰는 마음은 꽃을 보는 마음입니다. 시를 읽는 마음은 풀을 뜯어서 된장으로 석석 무친 뒤 밥 한 숟갈과 함께 꿀꺽 먹는 마음입니다.



.. 스님, 마음이 없다고 하셨지만 / 마음이 있다는 거 나는 알아요 / 막상 꺼내보라 하면 할 수 없지만 / 얘야, 너무 멀리 나가 놀지 말아라 / 그때 어머니 말씀 등지고 / 고개 넘고 다리 건너간 그놈을 알아요 ..  (안심법문)



  비가 오고 나면 비가 그칩니다. 해가 뜨면서 빗물이 마릅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니 땀이 줄줄 흐릅니다. 이러다가 여름이 저뭅니다. 가을에 찾아옵니다. 겨울을 앞두고 뜨끈뜨끈하던 햇볕이 그립니다. 추위가 몰아치고, 드센 겨울바람을 한창 맞다 보면, 어느새 겨울바람에도 익숙합니다. 찬바람을 맞으면서 아이들은 신나게 눈놀이를 합니다. 이윽고 된바람이 수그러들고, 포근한 기운이 온 들판을 적시면서 들풀이 한 포기 돋고 들꽃이 한 송이 핍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됩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들꽃이 피고, 시가 한 줄 태어납니다. 가만히 바라보면 됩니다. 가만히 바라보면 들꽃으로 봄잔치를 이루고, 시집 한 권이 소담스레 태어납니다. 4347.8.2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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