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1490) 고사 1 : 고사한 거목


살쾡이는 살기에 딱 좋은 고사한 거목의 구멍을 발견했다

《이마이즈미 요시하루(글),다니구치 지로(그림)/김완 옮김-시튼 (2)》(애니북스,2007) 12쪽


 고사한 거목의 구멍을

→ 말라죽은 큰나무 구멍을

→ 말라죽은 큰나무에 생긴 구멍을

 …



  한국말사전에 모두 스물일곱 가지에 이르는 한자말 ‘고사’가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우리가 쓸 만한 ‘고사’는 몇 가지인지 알쏭달쏭입니다. 우리 삶터에서 쓰임직한 ‘고사’를 몇 가지나 추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쓰이지 않을 뿐더러 쓰일 일이 없는데다가 구태여 한국말사전에 실을 까닭이 없는데 쑤셔넣은 ‘고사’가 한가득이지 않은가요. 예전에도 그리 쓰일 듯하지 않을 뿐더러, 오늘날에는 조금도 쓰이지 않고, 앞으로도 쓰일 낌새가 보이지 않는 낱말을 꾸역꾸역 한국말사전에 몰아넣지 않았나요.


  오래된 절이면 ‘오래된 절’입니다. 한 마디로 ‘옛절(古寺)’입니다. 오래된 일은 한 마디로 ‘옛일(古事)’입니다. 그러고 보면, 옛날 역사를 ‘古史’라는 한자말로만 짓기보다, ‘옛역사’라는 낱말로 새로 지어서 쓰면 한결 잘 어울리며 손쉽게 알아들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자세히 생각하고 조사함”을 ‘考査’라느니 ‘考校’라느니 쓴다는데, ‘살펴보다’나 ‘알아보다’라 말하면 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치는 시험을 ‘고사(考査)’라고 이름을 붙이며 ‘월말고사·기말고사·중간고사’처럼 쓰기도 하는데, 시험은 그저 ‘시험’이라고 할 때가 가장 알맞다고 느낍니다. ‘월말시험·학기끝시험·중간시험’으로 쓰면 됩니다. 머리를 조아리면 ‘조아린다’고 하면 되지, ‘고사(叩謝)한다’고 하면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괴로움을 늘어놓는 일은 ‘늘어놓다’고 하거나 ‘털어놓다’고 하면 됩니다. ‘고사(苦詞)’를 아예 한자로만 적어 놓는다고 해서 누가 무슨 뜻인지 알아챌까요.


 고사를 살펴보면 → 옛역사를 살펴보면

 퇴락해 가는 고사 → 무너져 가는 옛절

 고사가 되어 버린 그 일 → 옛일이 되어 버린 그 일

 오래돼 보이는 고사로 → 오래돼 보이는 사당으로


  말을 가꾸는 사람은 학자가 아닙니다. 정부도 아닙니다. 날마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가꾸는 말이며, 우리 스스로 키우는 글입니다. 스스로 일으키는 말인 한편, 스스로 갉아먹는 말입니다. 스스로 보듬는 글이면서, 스스로 무너뜨리는 글입니다. 우리 삶과 생각과 매무새에 따라서, 말이며 글이며 크게 달라집니다.


 수차례의 고사 끝에 → 여러 차례 손사래친 끝에

 새옹지마라는 고사 → 새옹지마라는 옛말

 고사를 따르다 → 오랜 규칙을 따르다

 고사 각조를 조정하다 → 높이 쏠 각도를 재다


  쓰이지 않을 뿐더러 군더더기만 가득가득 넘치는 한국말사전을 뒤적이면서 ‘한국말사전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으니 한국말이란 아무 뜻이 없지’ 하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한국말이 어떠한 줄 제대로 모르는 한편, 스스로 손을 놓는 셈입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옛집’이라는 한국말이 하나 실리기는 하지만, 이와 맞물려, ‘옛집’을 가리키는 한자말을 ‘고거·고택·구가·구거·구서·구옥·구택’, 이렇게 일곱 가지나 실었습니다. 끔찍하지 않습니까? 저는 끔찍하다고 느낍니다. ‘옛집’ 한 마디면 되는데, 무슨 ‘한자놀이’ 하는 셈도 아니고, 한국말사전에 이런저런 군말을 잔뜩 올려야 할까 모르겠어요.


  옛일은 그예 ‘옛일’일 뿐입니다. ‘고사(古事)’와 ‘고사(故事)’는 무엇이 다릅니까? 어떻게 가릅니까. 두 가지 한자말로 나누어 써야 할 까닭이 따로 있을까요? 두 가지 한자말을 아예 한자로만 적어 놓는들, 두 낱말 쓰임새가 환히 나뉘겠습니까.


 환경 오염에 따른 나무의 고사

→ 환경 오염 때문에 나무가 말라죽음

→ 삶터가 더러워지며 나무가 말라죽음

 당산나무의 고사를

→ 당산나무가 말라죽은 일을

→ 당산나무가 말라죽어서

→ 말라죽은 당산나무를


  말라서 죽으니 ‘말라죽다’입니다. 그러나 한국말사전에는 ‘말라죽다’ 같은 낱말이 실리지 않습니다. “꽃이 말라죽었어요”라든지 “나무가 말라죽었어요” 하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 나라 한국말사전에는 이 낱말 ‘말라죽다’는 안 싣습니다. 곰곰이 살펴보면, 얼어서 죽는 ‘얼어죽다’도 한국말사전에 안 실립니다. 오로지 ‘동사(凍死)’만 실립니다. ‘깔려죽다’나 ‘눌려죽다’ 또한 안 실리고, 오직 ‘압사(壓死)’만 실립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하자면 한국말사전을 버려야 할 판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알뜰살뜰 익히자면 한국말사전은 불태워야 할 노릇입니다.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넉넉히 헤아리자면 한국말사전이라는 책은 잊어야 하는 셈입니다. 4342.1.5.불/4347.8.14.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살쾡이는 살기에 딱 좋은 말라죽은 큰나무 구멍을 찾았다


“거목(巨木)의 구멍”은 “큰나무 구멍”이나 “큰나무에 난 구멍”으로 다듬습니다. ‘발견(發見)했다’는 ‘찾았다’나 ‘보았다’로 손봅니다.



 고사(古史) : 옛날 역사

   - 고사를 살펴보면 오늘날에도 배울 점이 많다

 고사(古寺) : 오래된 절

   - 퇴락해 가는 고사

 고사(古事) = 옛일

   - 이미 고사가 되어 버린 그 일을

 고사(古祠) : 오래된 낡은 사당(祠堂)

   - 오래돼 보이는 고사로 몸을 숨기다

 고사(古祠) ; 오래된 낡은 사당(祠堂)

 고사(叩謝)

  (1) 머리를 조아려서 고마운 마음을 나타냄

  (2) 머리를 조아려서 죄를 빎

 고사(考思) = 고려(考慮)

 고사(考査)

  (1) 자세히 생각하고 조사함

  (2) 학생들의 학업 성적을 평가하는 시험

   - 월말 고사 / 학기마다 두 번씩 고사를 치른다

  (3) [역사] = 고과(考課)

 고사(告祀) : [민속] 액운(厄運)은 없어지고 풍요와 행운이 오도록 집안에서 섬기는 신(神)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비는 제사

 고사(告詞/告辭) : 의식(儀式) 때에 상급자가 글로 써서 읽어 축하하거나 훈시하는 말

 고사(固辭) : 제의나 권유 따위를 굳이 사양함. ‘거절함’, ‘굳이 사양함’으로 순화

   - 수차례의 고사 끝에 결국에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사(孤寺) :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절

 고사(故事)

  (1) 유래가 있는 옛날의 일. 또는 그런 일을 표현한 어구

   - 새옹지마라는 고사를 아나? / 강 태공의 고사를 여기서 눈으로 본 듯하다

  (2) 옛날부터 전해 오는 규칙이나 정례(定例)

   - 고사를 따르다 / 고사에 어긋나다

  (3) = 옛일

 고사(枯死) : 나무나 풀 따위가 말라 죽음. ‘말라 죽음’으로 순화

   - 환경 오염에 따른 나무의 고사 / 당산나무의 고사를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고사(苦使) : 매우 혹독하게 일을 시키거나 부림

 고사(苦思)

  (1) 괴롭거나 고통스러운 생각

  (2) 마음을 썩이며 깊이 생각함

 고사(苦詞) : 괴로움을 말로 늘어놓음

 고사(苦辭) : 간절히 사양함

 고사(庫司) : [불교] = 도감사

 고사(庫舍) = 곳집

 고사(庫紗) : 여름 옷감으로 쓰는 비단의 하나

 고사(高士) : 인격이 높고 성품이 깨끗한 선비

 고사(高砂) : ‘대만’의 다른 이름

 고사(高射) : 공중에 높이 쏨

   - 고사 각도를 조정하다

 고사(高師) : [역사] 일제 강점기에, ‘고등 사범 학교’를 줄여 이르던 말

 고사(鼓詞) : [음악] 산문(散文)의 이야기와 운문(韻文)의 창(唱)으로 구성된 중국의 창극

 고사(?師) : 배를 부리는 일에 숙련된 나이든 뱃사공


..



 알량한 말 바로잡기

 (396) 고사 1 : 고사하고

 

니가 참아라. 재작년에 윗집 삼식이 보증서 준 것이 말썽인 모양이다.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못 갚아 보증 선 사람들이 갚아야 한다지 않냐

《윤기현-보리타작 하는 날》(사계절,1999) 70쪽


 원금은 고사하고

→ 꾸어 준 돈은커녕

→ 맡긴 돈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일로 읽을 때도 있지만 어린이도 읽고 느끼며 헤아리도록 쉽게 쓴 글을 즐겁게 읽습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니 찾아 읽고, 마음밭을 살찌우니 기꺼이 읽습니다.


  요즈음 나오는 어린이책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나날이 한자말을 적게 쓰는 듯합니다. 그나마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읽는 책에는 이만큼 되는구나 싶은는데, 중학교 갈 적부터 읽는 책에는 ‘초등학교 다니던 때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한자말’이 수두룩하게 나오면서, 모든 지식을 새로 익히도록 짜는구나 싶습니다. 그나마 깨끗하다는 말로 된 어린이책도 도시에서 중산층쯤 되는 사람들 삶에 맞추어 쓴 글이 수두룩합니다. 이 나라에 중산층이라 할 만한 사람이 많이 늘어났고, 책을 사서 읽는 사람도 으레 중산층쯤 되는 살림을 꾸린다고 할 터이니 아주 스스럼없는 흐름이기는 할 텐데, 어째 내키지 않습니다. 어딘가 얄궂습니다. 아무리 요새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도시에서 회사를 다니고 아파트에 살고 자가용을 굴리고 한다지만, 아이들이 읽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거의 모두 이런 삶에 맞춘다면, 글쎄요, 바람직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어린이책을 엮을는지 궁금합니다.

 

 1등은 고사하고

→ 1등은커녕

→ 1등은 꿈도 못 꾸고

→ 1등은 안 될 뿐더러

 배불리 먹기는 고사하고

→ 배불리 먹기는커녕

→ 배불리 먹지 못할 뿐더러

→ 배불리 먹지 못할 뿐 아니라

→ 배불리 먹지 못하는데다가

 

  어린이책에 쓰는 말도 말이지만, 어린이책에 담는 삶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말은 제법 나아지거나 거듭났다고 하지만, 말에 담는 삶이 옹글게 영글지 않는다면 그리 반갑지 않아요. 글은 퍽 훌륭하거나 짜임새 있게 꾸몄다고 하지만, 글에 싣는 넋과 얼이 알차지 않았다면 조금도 즐겁지 않아요.


  말장난과 글놀이에 빠져들자고 읽는 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재주와 글솜씨를 키우자고 가까이하는 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4334.10.11.나무/4342.1.6.불/4347.8.14.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니가 참아라. 그러께에 윗집 삼식이 보증서 준 것이 말썽인 모양이다. 맡긴 돈은커녕 이자도 못 갚아 보증 선 사람들이 갚아야 한다지 않냐

 

‘재작년(再昨年)’은 ‘지지난해’나 ‘그러께’로 다듬습니다. ‘원금(元金)’은 ‘꾸어 준 돈’이나 ‘맡긴 돈’으로 고쳐 줍니다. 요사이는 쓰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길미’라는 한국말이 있습니다. ‘길미’를 한자말로 옮기면 ‘이자(利子)’입니다.


 

 고사하고(姑捨-) : 더 말할 나위도 없이

   - 1등은 고사하고 중간도 못 가는 성적 / 배불리 먹기는 고사하고 굶어 죽을 판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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