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시인선 106
안명옥 지음 / 천년의시작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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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62



시와 먹구름

― 칼

 안명옥 글

 천년의시작 펴냄, 2008.11.30.



  일곱 살 큰아이 손을 잡고 길을 걷습니다.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멧기슭에 자리한 이웃집에 마실을 간 뒤, 천천히 길을 걸어서 우리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웃집에서 면소재지까지 한 시간 오십 분 동안 걷습니다. 시골에서는 군내버스를 타는 데가 드문드문 있을 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읍내로 가도록 버스길이 뻗으니, 이웃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돌아가자면 한참 걸어야 합니다.


  아직 뜨겁게 내리쬐는 팔월 십일일 햇볕을 받으면서 걷습니다. 구름이 살살 흐르면 햇볕을 가리면서 그늘이 집니다. 바람이 쏴아 불면 햇볕을 받으면서 걷더라도 시원합니다.


  해를 바라보면서 걸을 적에는 구름을 올려다보기 어렵습니다. 아주 눈부시기 때문입니다. 해를 등지고 걸을 적에는 구름을 올려다보기 수월합니다. 이맛살을 쫙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눈이 안 아픕니다.



.. 언니, 사는 게 너무 힘드네 / 그렇게 사는 게 다 네 업이야 ..  (무거운 도화지)



  구름은 여러 겹입니다. 구름은 높이마다 다릅니다. 아주 높이 뜬 구름이 있고 나즈막하게 흐르는 구름이 있습니다. 탁 트인 들길을 걸어가면서 온갖 구름을 만납니다. 온갖 구름과 이야기를 나누고, 온갖 구름한테 노래를 들려줍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해창만 들길을 걷습니다. 큰아이를 업다가 안다가 걸립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무척 씩씩하고 튼튼하지만, 뙤약볕을 두 시간 가까이 걷기란 만만하지 않겠지요.


  아이를 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걷습니다. 아이를 안고 걷는 동안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가 그만 내려서 걷겠다고 할 적에는 손을 잡고 노래를 부릅니다. 두 시간 가까이 걷는 동안 이 길을 걸어서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도 못 봅니다. 경운기를 달리는 사람 서넛, 자가용을 달리는 사람 스무 남짓, 짐차를 달리는 사람 열 즈음 만납니다.



.. 나무껍질을 벗긴다 / 대패질을 하면서 나무의 결을 만들어가면 / 조금씩 드러나는 나무 색깔, / 애무하듯 구석구석 정성을 들이며 / 결을 따라 부드럽게 사포질한다 ..  (바로크가구)



  예전에는 누구나 이 길을 걸었겠지요. 예전에는 누구나 이만 한 길을 걸어서 학교도 다니고, 면내나 읍내를 다녔겠지요. 예전에는 누구나 이런 길을 걸어가면서 노래를 불렀겠지요. 예전에는 누구나 이런 길을 걷다가 나무그늘에서 다리를 쉬고 도랑물에 목을 축였겠지요.


  오늘날에는 십 분 넘게 길을 걷는 시골사람조차 만나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도 십 분 넘게 길을 걷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삼십 분 넘게 걷는다든지 한 시간 넘게 걸어서 학교나 회사를 오가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걸어다니면서 노래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귀에 소리통을 꽂고 노래를 듣는 사람은 있겠지만, 스스로 노래를 부르면서 걷는 사람은 참말 얼마쯤 있을까요.


  그래요. 이제 이 나라에는 노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채우는 대중노래는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부르는 노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을 지으려고 부르는 노래는 없습니다.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가슴에서 샘솟는 노래는 없습니다.



.. 오래전에 입었던 바지를 꺼내 입는다 //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살 ..  (구름바지)



  안명옥 님 시집 《칼》(천년의시작,2008)을 읽습니다. 안명옥 님 삶과 넋과 꿈이 깃든 시집을 읽습니다. 안명옥 님은 이녁 삶과 넋과 꿈을 ‘칼’이라는 낱말 하나로 갈무리합니다.


  칼이란 무엇일까요. 전쟁을 벌여 서로서로 죽고 죽이는 무기일까요. 부엌에서 통통통 고소한 도마질 소리를 내면서 살가운 숨결을 나누어 주는 밥을 짓는 살림살이일까요.


  나물을 다듬는 칼일까요. 물고기 대가리를 따는 칼일까요. 나무를 깎는 칼일까요. 능금알을 쪼개는 칼일까요.



.. 내 귓속에서 / 세상의 소리들이 하나씩 죽어가고 있다 / 소리는 쌓여서 무덤을 이룬다 / 빛을 향해 열려 있는 내 몸 / 조용히 흘러 들어와 내 몸 어딘가에 / 소리 그림자를 저장해 두는 것들 ..  (귀-2)



  오늘 나는 큰아이와 두 시간 가까이 들길을 걸어 군내버스를 타려 했는데, 그만 코앞에서 놓칩니다. 고단하고 발이 아픈 큰아이를 가슴에 안고 잰걸음으로 면소재지에 들어서려는 때에 군내버스가 우리 앞을 부웅 스치고 지나갑니다. 버스를 부를 겨를도 없이, 버스를 잡을 틈도 없이, 군내버스는 저 앞으로 멀리 사라집니다.


  버스를 탔으면 찻삯 1500원이 들었을 텐데, 택시를 불러 8000원 찻삯을 치릅니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 집에 잘 들어왔고, 큰아이와 작은아이를 함께 씻긴 뒤 새 옷을 입힙니다. 땀에 옴팡 젖은 두 아이 옷과 내 옷을 조물조물 주물러 빨래합니다. 기지개를 켜고 마당에 내다 넙니다. 아침에 빨아서 내다 넌 옷은 다 말랐습니다.


  파랗게 싱그러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천천히 흐르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참 구름을 바라보면 구름빛은 찬찬히 바뀝니다.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구름은 없습니다. 올해까지 마흔 살을 살면서 이제껏 똑같은 구름을 본 적은 한 차례도 없습니다. 앞으로 마흔 살을 더 살아도 똑같은 구름은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 혼자, 길을 간다 // 지도 한 장 펼쳐보아도 /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 어렴풋이 빛이 보이는 쪽으로 걷는다 / 이정표의 글자들이 흔들린다 ..  (먹구름)



  네 살 작은아이는 아직 ‘먹구름’이라는 낱말을 모릅니다. 네 살 아이는 먹구름을 볼 때면 “저기 까만 구름 있어.” 하고 말합니다. 그래, 너한테는 까만 구름이로구나. 그렇지만, 까만 구름도 ‘까만 빛’이라고 하기는 어려워. 잿빛이라고 해야 맞겠지. 때로는 짙은 잿빛일 테고 여느 때에는 옅은 잿빛인 구름일 테지.


  여름에는 구름이 흘러 시원합니다. 여름에는 구름이 흐르면서 바람이 산뜻합니다. 여름에는 구름이 끼면서 그늘이 드리워 더위를 식힙니다. 구름이 있으면 에어컨도 선풍기도 부채도 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해가 따순 볕을 내리쬐고 틈틈이 구름이 흐르면서 숲과 들과 마을과 집이 모두 아름답게 빛납니다. 4347.8.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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