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은 오래 묵어야 기름진 흙이 돼요. ‘새 흙’이란 없습니다. 켜켜이 쌓이고 묵으면서 삭은 오래된 흙이 풀과 꽃과 나무를 살찌웁니다. 흙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햇볕을 골고루 받아먹은 뒤 푸른 숨결을 내놓고는, 나뭇가지에서 톡 떨어져 가랑잎이 되면, 흙에서 삭아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에서 태어난 풀벌레가 흙에 뿌리를 내린 풀잎과 풀열매를 먹고 살다가 어느새 흙에 살포시 안겨 흙으로 돌아갑니다.


  한두 해를 묵거나 삭아서는 기름진 흙이 되지 않습니다. 열 해나 스무 해를 묵거나 삭으며 비로소 기름진 흙이 됩니다. 백 해나 이백 해를 묵거나 삭으며 아름다운 흙이 되고, 즈믄 해 즈음 묵거나 삭을 때에 짙푸른 숲을 이루는 사랑스러운 흙이 됩니다.


  사람들이 이루는 삶은 얼마나 삭거나 묵었을까요. 사람들이 빚는 글이나 노래나 이야기는 얼마나 삭거나 묵었을까요. 흙과 마찬가지로 사람들 삶도 오래도록 삭거나 묵으면서 아름다운 빛이 서리리라 느낍니다. 흙처럼 사람들 삶도 두고두고 삭거나 묵는 동안 시나브로 사랑스러운 빛으로 거듭나리라 느낍니다.


  책은 오래될수록 아름답게 빛납니다. 오래도록 읽히고 되읽힐 수 있는 책은 한결같이 사랑스레 빛납니다. 한 번 읽고 내려놓는 책도 있기는 할 테지만, 모름지기 책이라 할 때에는, 즈믄 해에 다시 즈믄 해가 찾아와서 사람들 마음자리에 환한 숨결로 푸르게 노래하는 빛을 품은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4347.8.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