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29. 말넋을 거스르는 네 가지 ㄱ
― 토씨 ‘-의’를 잊어야 한다


  수수한 말이란, 어린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함께 쓰는 말입니다. 몇몇 지식인과 전문가만 쓰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즐겁게 쓰는 말이 수수한 말입니다. 수수한 말이란, 모든 사람이 즐겁게 쓰는 말입니다. 교수와 교사와 학자와 박사만 주고받는 말이 아니라,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쓰는 말이 수수한 말입니다. 수수한 삶일 때에 이 나라가 아름답습니다. 수수하게 어깨동무를 할 적에 함께 웃고 노래하면서 이야기꽃이 피어납니다. 수수하지 않을 적에는 평화가 아닌 전쟁이 됩니다. 수수하지 않기에 신분과 계급을 가릅니다. 수수하지 않은 말로는 인문학도 역사도 문학도 꽃피우지 못합니다.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아주 어려운 인문책에 나오는 낱말로 이루어져요. 교과서 편집자들이 쓰는 ‘여느 말’부터 벌써 어려운 인문책 낱말로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를 엮는 이들은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이한테 알맞거나 여덟∼열세 살 어린이 눈높이한테 알맞춤한 낱말을 살피지 않습니다. 교과서 엮는 이들은 지식발달 단계와 교과과정만 살핍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낱말로 어떤 삶을 가꾸면서 어떤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면 아름다울까를 안 살핍니다.

  말에는 언제나 넋을 담습니다. 내 넋을 담아 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말에는 언제나 뜻을 싣습니다. 내 뜻을 실어 이웃과 같이 생각을 주고받습니다. 말에는 언제나 꿈을 넣습니다. 내 꿈을 넣어 서로서로 즐거이 사랑할 길을 돌아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넋과 뜻과 꿈을 북돋웁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쓸 테고, 미국사람은 미국말을 쓸 테며, 중국사람은 중국말을 쓸 테지요.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중국사람이 한국말을 쓸 일이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일본말이나 미국말이나 중국말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요즈음 우리 모습을 들여다보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쓰지 못합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내팽개치거나 망가뜨린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지만, 교과서 지식과 수업일 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즐겁게 노래할 말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지식은 지식일 뿐 말이 아니지만, 입시지식만 학교에서 가르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는 말이라면, 집에서 어버이가 가르치거나 사람들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대학생이 되기에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전문가나 지식인 자리에 들어서면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어른한테서 배우고 아이한테서 배우며 스스로 넋을 가꾸거나 살찌우면서 배울 노릇입니다.

  책으로는 말을 못 배웁니다. 말이란 머리에서 생각을 기울여 마음을 담아 들려주는 이야기이기에, 스스로 몸과 마음과 삶을 함께 가꾸면서 저마다 넋에 사랑과 꿈과 즐거움을 다스려야 비로소 배웁니다. 식물도감으로 풀을 배울 수 없듯이, 한국말사전으로 말을 배울 수 없습니다. 풀은 풀이 자라는 숲이나 들에서 풀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배웁니다. 대학교 전문과정에서 흙일을 배울 수 없듯이, 전문 강사한테서 말을 배울 수 없습니다. 농학박사가 된대서 흙일을 하지 않아요. 스스로 땅을 마련해서 흙을 살찌우고 보듬으며 아낄 수 있어야 흙일을 합니다.

  학교에서 말을 제대로 못 가르치고, 사회에서도 말을 얄궂게 뒤틉니다. 학교와 사회가 못 가르치거나 얄궂게 뒤트는 커다란 굴레를 네 가지 꼽자면, ‘-의’하고 ‘-的’하고 ‘존재’하고 ‘번역’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커다란 굴레는 ‘-의’입니다. 말끝마다 ‘-의’를 붙이거나 넣는 말씨는 한국말을 몹시 어지럽힐 뿐 아니라,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 스스로 넋과 얼을 무너뜨리곤 합니다.

  보기를 들자면, ‘바람골’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바람의 골”이 아닌 “바람골”입니다. 일본에서 나온 만화영화 가운데 “바람 골짜기의 나우시카”로 알려진 작품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만화영화를 “風の谷のナウシカ”로 적습니다. 한국사람은 ‘바람골’이거나 ‘바람 골짜기’이지만, 일본사람은 “바람의 골(짜기)”입니다. 한국사람은 ‘빨강’이나 ‘붉은 빛’이라 말하지만, 일본사람은 ‘赤の色’으로 적습니다. 한국사람은 ‘파란 하늘’이라 말하지만, 일본사람은 ‘靑の空’으로 적어요.

  한국말은 “내 아버지”이거나 “우리 어머니”입니다. 한국말을 잊은 사람들은 “나의 아버지”나 “우리의 어머니”처럼 잘못 씁니다. 한국말은 “네 목소리”요 “할머니한테서 배웠어요”인데, 한국말을 잊은 사람들은 “너의 목소리”나 “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어요”처럼 잘못 써요.

  개구리가 봄날에 노래하면 “개구리 노래를 들었어요”라 말해야 올바릅니다. “개구리의 노래를 들었어요”라 말하면 올바르지 않습니다. 사이에 꾸밈말을 넣어 “개구리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어요”라든지 “개구리가 들려준 노래를 들었어요”처럼 적을 때에 올바르지, ‘-의’를 넣으면 올바르지 않아요.

  요즈음은 “나의 취향의 남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비극의 시작을 보면”, “네 살 위의 누나예요”, “최선의 방법으로”, “감시의 눈길을 보내다”, “아래의 내용을 읽으시오”, “그녀의 다른 작품으로는”, “종전의 관행을 보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나중의 문제입니다”, “두 개의 도시를 여행하다”처럼 ‘-의’를 섣불리 넣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 “온힘을 다해서”, “비극이 일어난 곳을 보면”, “네 살 위인 누나예요”, “가장 나은 방법으로”, “지켜보다”, “다음 내용을 읽으시오”, “(아무개)가 쓴 다른 작품으로는”, “예전 관행을 보면”,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나중 문제입니다”, “두 도시를 여행하다”처럼 쓸 줄 모르고, 이처럼 쓸 수 있는 줄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이와 같이 먼먼 옛날부터 수수하게 말하며 살아온 줄 깨닫지 못합니다.

  말은 쉽습니다. 누구나 쓰는 말이기에 쉽습니다. 지식을 담으려 한다면 지식을 담을 노릇이지, 말을 어렵게 뒤틀거나 일본 말투나 서양 말씨를 써야 하지 않습니다. “민들레는 봄꽃”이나 “민들레는 봄을 부르는 꽃”이나 “민들레는 봄을 노래하는 꽃”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민들레는 봄의 꽃”이라 말할 일은 없습니다. 4347.4.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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