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린네 13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343



어떤 삶을 바라나

― 경계의 린네 13

 타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5.25.



  누구나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아갑니다. 스스로 바라지 않았는데 찾아오는 일은 없습니다. 나한테 찾아오는 모든 일은 스스로 마음속으로 바랐기에 찾아옵니다. 내가 겪는 모든 일은 스스로 마음속으로 빚은 이야기입니다.


  기쁨과 슬픔도 스스로 그립니다. 사랑과 꿈도 스스로 그립니다. 웃음과 눈물도 스스로 그립니다. 노래와 춤도 스스로 그립니다.


  오늘 이곳에서 늘 새롭게 살아가는 내 하루이기에, 내가 하루를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나한테 찾아오는 빛이 바뀝니다. 스스로 삶을 새롭게 그리지 않으면 새로운 이야기가 없습니다. 스스로 삶을 새롭게 그리면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어떨까요. 이런 흐름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런 흐름을 느끼지 않은 채 날마다 똑같은 몸짓을 되풀이하면서 쳇바퀴로 살아가기만 할까요.



- ‘나는 로쿠도의 아버지에게 1000엔을 빌려드렸습니다. 분명 돈은 갚지 않겠지. 그런 예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후.’ (26쪽)

- “괜찮겠어요, 린네 님? 아무리 공짜라지만.” “확실히 사신에게 낫은 생명과 같지. 말하자면 생명을 맡긴 거야. 그 신뢰에 응할 각오는 되어 있겠지?” (39쪽)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비가 퍼붓습니다. 비가 퍼붓는 소리를 얼핏설핏 들으면서 잠을 깹니다. 마당에 있는 살림 가운데 비를 맞으면 안 되는 것이 있는지 살핍니다. 섬돌 둘레에 흩어진 신을 추스릅니다. 제비집을 올려다봅니다. 비가 퍼붓지만 바람은 그리 불지 않아 빗물이 들이치지는 않습니다.


  이윽고 날이 새고 마을방송이 퍼집니다. 이장님은 올해부터 우리 마을이 ‘친환경농업단지’에서 풀린 까닭을 밝히지 않으면서 ‘친환경농업단지에 주는 친환경농약 보조금’이 사라졌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지난해와 그러께에 수없이 농약을 논에 뿌려댔으니 ‘친환경 쌀’이라고 내세운 우리 마을 쌀이 모조리 농약검사에 걸렸는데, 이런 이야기를 밝히지 않습니다.


  아마 밝힐 까닭이 없을 수 있어요. 모두 다 알 테니까요. 친환경농약이든 일반농약이든 모두 똑같은 줄 뻔히 알 테니, 굳이 ‘농약 없는 농사’를 지을 생각이 없으리라 느낍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시골 할매와 할배는 ‘겉보기로 반들거려서 도시사람이 상품으로 좋아하는 농산물’만 거두면 된다고 여기리라 느껴요.



- “정말 돈 욕심은 없었던 거군요.” “연구에 열중하며 독특한 낫을 만드는 건 좋지만, 중요한 건 이, 평범한 낫인데 말이야.” (61쪽)

- “로쿠도 린네. 미…….” “사과하지 마, 카인. 너답지 않게. 다만, 빙의 스티커 값은 네 보너스에서 받아 간다.” (115∼116쪽)




  동이 트면서 우리 집 처마 밑 제비집이 부산합니다. 새끼 제비는 밥을 달라 노래합니다. 어미 제비는 비가 퍼붓는 하늘을 재빨리 날면서 먹이를 물어다 나릅니다. 이 빗속에서 먹이를 어떻게 찾았을까? 어쩌면 이렇게 비가 퍼붓는 날에는 나비나 벌레가 풀숲에 얌전히 앉아서 쉴 테니 먹이를 찾기 한결 쉬울까?


  어미 제비는 비가 오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빗줄기를 가르며 납니다. 나도 어버이로서 아이들한테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려서 줍니다. 밥을 차리고 마당에서 풀을 뜯을 적에 전화가 오면 전화를 안 받습니다. 밥차림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거나 놀 적에 오는 전화는 못 받습니다. 아이들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재울 적에 오는 전화는 못 듣습니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엊저녁에 전화가 온 줄 비로소 압니다.


  하나하나 돌아보면, 나도 스스로 내 삶을 빚습니다. 아이들과 지내는 삶을 스스로 빚습니다. 밥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히며 손을 잡고 마실을 다니는 삶을 스스로 빚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샘터를 치우면서 물놀이를 하고, 가까운 골짜기나 바다로 나들이를 가고, 둘레 초등학교 놀이터로 찾아가는 나날도 스스로 빚은 삶입니다. 아이들한테 들려주는 노래 또한 스스로 빚은 삶일 테지요.


  그래요. 그렇습니다. 내가 오늘 아이들한테 들려주는 노래를 처음 익힐 적에 스스로 생각했어요. ‘나중에 나한테 아이가 오면 이런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하고. 스무 해쯤 앞서 내 마음속에 깃든 이 꿈대로 오늘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리고, 오늘 품은 꿈대로 앞으로 스무 해를 더 살 테고, 스무 해 뒤에는 또 다른 스무 해를 마음속으로 그리겠지요.



- “리, 린네 님. 드디어 사 버렸어요.” “흥분하지 마, 로쿠몬.” “이런 사치를 부리다가 천벌 받진 않을까요?” “천벌은 무슨. 1년에 한 번 오는 크리스마스이브잖아? 촛불을 켜고 호화판 케이크(편의점 케익 한 조각)를 나눠 먹는 거야.” “촛불이야 매일 밤마다 켜고 살지만요, 하하하하.” (156∼157쪽)

- ‘어, 어떡하지? 꺼낼까?’ ‘다섯이 나눠 먹는다고요? 이 작고 앙증맞은 케이크를?’ ‘끝까지 숨길까? 하지만 기다려 봐. 어쩌면.’ (167쪽)





  타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책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2014) 열셋째 권을 읽습니다. 《경계의 린네》 열셋째 권에서는 ‘다음 삶’ 이야기가 흐릅니다. 오늘 이곳에서 누리던 삶을 미련하게 붙잡는 넋은 아직 ‘다음 삶’을 스스로 그리지 못한 숨결입니다. 몸은 죽었으나 몸이 죽기 앞서 다음 삶을 알뜰히 그리지 못했기에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떠돌며 애꿎은 짓만 일삼습니다. 다음 삶을 스스로 그려 새롭게 살아갈 빛을 꿈꾸지 못해요. 다음 삶을 스스로 빚어 사랑스레 살아갈 노래를 부르지 못해요.



- “어떡하면 만족하고 성불하겠어요? 무슨 소원이라도.” “훗. 아무것도 없어. 이 세상에 미련 같은 건.” “어, 그럼.” “얼른 성불해서 다시 태어나는 게 어때요?” “다시 태어나? 그, 그런 무서운 짓을. 지금보다 더 보잘것없고 인기 없고, 지금보다 더더더 한심한 인간으로 태어날지도 모르잖아.” (184∼185쪽)

- “자, 너는 어떤 내세를 원하지? 생각해 봐.” (187쪽)



  오늘 이곳에서 ‘몸이 아직 살아서 움직이’는 우리들은 어떤 삶일까 궁금합니다. 우리들은 ‘오늘 내 삶’을 얼마나 그리는가요. 아침마다 ‘오늘 내 삶’을 얼마나 새로 짓는가요. 저녁에 잠들면서 ‘이튿날 맞이할 내 새로운 하루’를 얼마나 새로우면서 아름답게 가꾸는가요.


  ‘또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잠들기에 참말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쳇바퀴 삶입니다. 언제나 새롭게 길을 찾으면서 빛을 밝히려는 마음이 자라지 않으면, 언제나 쳇바퀴에서 머뭅니다. 아니, 언제나 쳇바퀴를 밟으면서 쳇바퀴를 밟는 줄조차 느끼지 못해요.


  요즈막에 대통령 자리에 있는 어느 분이 ‘국무총리 후보’로 그 나물에 그 밥인 어리보기를 자꾸 고르는 까닭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느껴요. 그분 스스로 그런 삶을 쳇바퀴처럼 굴리는데, 스스로 쳇바퀴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새 삶을 지을 줄 모르고, 스스로 새 빛이 되면서 노래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4347.6.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