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책길 걷기
4. 책은 어디에 있을까


  비질을 책으로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걸레질을 책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빗자루를 옳게 쥐는 법을 책으로 쓸 수 있을 테지만, 굳이 책으로 써야 할까 생각해 보셔요. 연필을 잘 깎는 법을 책으로 묶을 수 있을 테지만, 애써 책으로 묶어야 할는지 헤아려 보셔요.

  요리책이 참 많아요. 아마 웬만한 집마다 요리책을 몇 권씩 두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요리’는 책으로 배워야 할까요? ‘요리’가 아닌 ‘밥’은 어떨까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짓는 밥을 공책을 펴서 쌀 몇 그램 보리 몇 그램 콩 몇 그램 낱낱이 밝힌 뒤, 물은 몇 밀리리터를 부어서 쌀을 헹구고는, 헹군 물을 몇 밀리리터 버리고 나서, 다시 물을 몇 밀리리터 또는 몇 리터 담아서 불은 어떠한 세기로 몇 분 동안 넣어야 밥을 지을 수 있다고, 하나하나 숫자로 밝혀야 할는지요?

  사진기를 새로 장만하거나 손전화 기계를 새로 장만한다면, 설명서가 꼭 있습니다. 설명서를 읽으면 사진기나 손전화 기계 성능을 낱낱이 알 수 있어요. 기계를 다루는 설명서는 어느 모로 보면 ‘책’입니다. 잘 쓸 수 있도록 알려주는 길잡이책이에요.

  밥을 짓고 반찬을 마련하며 국을 끓일 적에 요리책이든 길잡이책을 봐야 할는지 생각해 보셔요. 먼먼 옛날부터 아무도 책이 없었지만,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으며 몸으로 하면서 밥짓기를 물려주고 물려받았어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입과 몸으로 밥짓기를 물려받았습니다.

  스스로 겪어야 압니다. 스스로 안 겪으면 모릅니다. 해돋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스스로 겪으면 압니다. 해넘이 빛이 얼마나 고운지는 스스로 바라보면 압니다. 바다가 들려주는 노래는 바닷가에 서면 누구나 스스로 압니다. 풀벌레와 개구리와 새가 들려주는 노래는 숲에 깃들면 누구나 스스로 알아요.

  먹어야 맛을 알아요. 굶어야 배고픔을 알지요. 추위와 더위는 스스로 겪을 때에 압니다. 바다뿐 아니라 하늘과 별과 무지개도 스스로 보아야 알아요. 바람과 햇살도 스스로 맞이해야 압니다.

  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책은 무엇을 쓸까요. 책을 쓰는 이들은 우리한테 무엇을 가르쳐 줄까요. 책을 읽는 우리들은 책에서 무엇을 배울까요.

  마쓰타니 미요코 님이 쓴 동화책 《안녕 모모, 안녕 아카네》(양철북,2005)가 있어요. 나는 마흔 살이 넘은 어른이지만 동화책을 즐겁게 읽습니다. 동화책도 아름다운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동화책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누구나 읽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푸름이도 동화책은 얼마든지 즐길 아름다운 책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동화책은 다 같이 누릴 아름다운 이야기잔치예요.

  이 작은 동화책을 펼치다가 “아카네가 목욕탕 문 옆에 서서 말했어요. ‘있잖아, 마코토. 우리 집 목욕탕에는 새하얀 보통 비누랑 사과 모양으로 생긴 비누가 있거든, 사과 비누 한번 써 봐. 그거, 미인이 되는 비누야.’ 그러자 문 안쪽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어요. ‘흥, 우리 집에는 남자다워지는 비누가 있어서, 난 매일 그걸로 씻어.’(53쪽)”와 같은 대목을 찬찬히 읽습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두 아이는 비누 하나를 놓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뒷이야기는 어떻게 될까요. 마코토라는 사내 아이는 사과 모양 비누를 썼을까요, 안 썼을까요. “흥!” 하고 콧소리를 낸 사내 아이는 사과 모양 비누를 못 본 척했을까요, 살그마니 바라보다가 ‘어디 한번’ 써 볼까 하고 생각했을까요.

  오늘날 학교에서는 성교육을 합니다. 아기씨가 어떻게 생기고, 아기씨는 어떻게 아기방으로 들어가서 작은 목숨이 새로 태어나는가를 학교에서 배웁니다. 그런데, 아기씨 흐름을 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기는 하되, 정작 아이를 낳는 일과 아이를 낳기 앞서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라든지, 아이를 낳고 나서 어떻게 아이와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지는 않아요. 아기를 낳고 젖을 어떻게 물리는지, 아기를 낳기 앞서 몸을 어떻게 가누는지, 아기 낳는 어머니 곁에서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고 집일과 집살림과 밥하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하나도 안 가르치는 성교육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평등이 많이 나아졌다지만, 아직까지 어머니가 집일을 도맡기 일쑤예요. 집에서 밥을 차리는 아버지는 아직도 매우 드뭅니다. 그러면, 어머니 혼자 집일을 도맡다가 아기를 낳으면 어떡해야 할까요. 끼니마다 밥을 시켜서 먹어야 할까요. 할머니를 불러서 할머니더러 밥을 차리라고 해야 할까요. 어머니가 아프거나 다치면 집일과 밥은 어떻게 하나요.

  제대로 하는 성교육이라면, 가시내와 사내가 살을 섞는 일만 보여줄 노릇이 아니라, 둘이 함께 빚는 아름다운 삶을 이루는 살림살이를 오롯이 알려주고 밝혀야 한다고 느껴요. 가시내도 사내도 밥을 맛나게 지을 수 있어야 하고, 빨래와 청소는 서로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기를 낳았으면, 기저귀를 어떻게 다루고, 기저귀 빨래는 어떻게 하며, 아기를 어떻게 씻기고, 아기한테 말과 삶을 어떻게 가르칠 때에 즐겁거나 아름다운가를 학교와 집과 마을에서 함께 가르치면서 물려줄 수 있어야지요.

  작은 동화책을 더 읽습니다. “‘아빠, 나, 여름밀감 가져왔어.’ 아카네가 배낭에서 여름밀감을 꺼냈어요. 그러자 온 방 안에 여름밀감 냄새가 퍼지고, 아빠 얼굴빛이 순식간에 밝아졌어요. 아빠는 후우 숨을 들이쉬고 아카네를 안아 주었어요. ‘아, 아주 편안해졌어. 여름밀감은 정말 대단하구나. 금세 공기가 부드러워졌어.’(149∼150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읽습니다. 여름밀감 한 알이 집안에 맑은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능금 한 알이나 배 한 알도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오월 한복판부터 들과 숲에서 돋는 들딸기와 멧딸기도 온 집안에 맑은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들딸기가 어떤 맛인지 아나요? 비닐집에서 키워 한겨울에도 먹는 ‘비닐집 딸기’하고 숲에서 스스로 돋아서 하얗게 꽃이 피다가 빠알갛게 익는 들딸기하고 맛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아나요? 먹어야 알 테지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따서, 입에 넣고는 냠냠 씹고 꿀꺽 삼켜야 알 테지요.

  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잘 생각해 보셔요. 책은 바로 우리 곁에 있어요. 더 헤아려 보셔요. 책은 바로 우리 삶이에요. 가만히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들어 보셔요. 우리 마음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를 듣고, 내 어버이와 이웃 마음속에서 흐르는 고운 노래를 들어 보셔요. 책은 어디에나 살가이 피어나면서 퍼집니다. 4347.5.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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