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책길 걷기
2. 책은 무엇인가

 


  《샬롯의 거미줄》이라는 책을 쓴 엘윈 브룩스 화이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뉴욕에 머물면서 쓴 《여기, 뉴욕》(숲속여우비,2014)라는 책이 있습니다. 1949년에 처음 나온 책이니 미국 뉴욕 모습을 1940년대 끝무렵 눈길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머리말을 살피면, 1949년에 책을 펴낼 적에도 ‘달라진 뉴욕 모습’이 있어 글을 고쳐야 할까 망설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글을 쓰며 본 모습’과 ‘글을 쓴 뒤 달라진 모습’을 낱낱이 고칠 수 없다고 밝힙니다. “여기, 뉴욕”이라 했지만, 정작 책이 나온 뒤에는 ‘여기’에 ‘그것’이 없을 수 있어요. 이는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오늘날에는 재개발과 공사가 너무 잦아, 어제와 오늘 사이에도 수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제주섬을 나들이를 한 뒤 누군가 여행책을 내놓습니다. 여행책을 쓴 분은 이녁이 즐겁게 제주섬을 누빈 이야기를 적습니다. 제주섬을 거닐거나 자전거를 달리거나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모습을 글로 쓰고 사진으로 찍습니다. 나들이를 마친 뒤 글을 쓰고 책으로 내기까지 여러 달이 걸리곤 하며, 여러 해가 걸릴 수 있습니다. 이동안 제주섬 모습이 달라집니다. 책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이 모습은 이대로였으나, 책이 나오고 이레가 지난 뒤, 또는 달포가 지난 뒤, 또는 한두 해가 지난 뒤 다른 모습이 되곤 합니다.


  책은 무엇인가요. 책은 어떤 모습을 담는가요. 책에 적은 이야기는 어떤 모습을 어떻게 그리는가요.


  2000년에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1999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1999년에 일어난 일을 적은 책을 읽어도 머릿속으로 어렴풋하게 그릴 뿐입니다. 1990년에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1989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1989년에 일어난 일을 적은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흐릿하게 그릴 뿐입니다.


  지나간 삶자락을 적바림하는 책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말하고 지나간 문화를 밝힙니다. 지나간 삶자락은 오늘날 어떤 뜻이 될까요. 어떤 빛과 값으로 우리 마음에 스며들 만할까요.


  모든 책은 언제나 헌책이 됩니다. 2014년 1월 1일에 나온 책이라 하더라도 1월 2일부터는 ‘옛이야기’입니다. 2015년 1월 1일에 돌아보아도 옛이야기요, 2024년 1월 1일에 돌아보아도 옛이야기입니다. 책으로 나올 적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묵은 이야기라 할 만합니다.


  모든 책은 새로 태어나면서 언제나 묵은 이야기를 담는데, 막상 우리들은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느끼고 ‘새로운’ 눈길로 삶을 배우곤 합니다. 꼭 1500년대 이야기를 읽거나 기원전 이야기를 읽어야 ‘옛 것을 바탕으로 새 것을 익힌다’는 매무새가 되지 않아요. 어느 책을 읽든 늘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눈길과 생각’을 느끼거나 얻거나 익힙니다.


  왜냐하면, 책으로 읽는 이야기는 우리가 스스로 겪지 못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닌 이웃과 동무(남)가 겪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책이란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오며 겪은 이야기입니다. 책읽기란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오며 겪은 이야기를 읽는 일입니다. 책읽기를 하면서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오며 겪은 이야기를 눈여겨보고 귀여겨듣습니다.


  내 삶은? 내 삶은 스스로 글을 쓰지 않아도 내 마음과 몸에 아로새겨요. 가만히 지난날을 떠올리면, 스스로 ‘내 삶 읽기’가 됩니다. 어제 무엇을 했고 조금 앞서 무엇을 했는가 떠올려 보셔요. 차근차근 걸어온 내 삶을 돌아볼 적에는 나 스스로 지난날 어떻게 했는가를 하나씩 그리면서 ‘내 삶을 스스로 새롭게 읽어 오늘 누리는 하루를 새삼스레 바라볼’ 수 있어요.


  스스로 어제를 되짚을 적에도 책읽기입니다. 마음속에 내 지난날 삶을 찬찬히 아로새겼으면, 내 마음속에는 ‘내 삶을 적은 책’이 알뜰살뜰 있는 셈입니다. 종이책에 얹은 이야기는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온 나날을 적은 셈입니다.


  책은 무엇인가 하면 삶입니다. 자서전처럼 손수 내 삶을 글로 옮긴 책이 있습니다. 자서전이 아닌 책은 이웃과 동무가 저마다 이녁 삶을 글로 옮겼지요. 책은 삶이기에, 책을 읽으면 언제나 삶을 읽습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삶을 씁니다. 삶을 글로 쓰는 까닭은, 내 삶을 남한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삶을 글로 옮기면서 이웃과 동무하고 어깨를 겯고 함께 나아갈 길을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겪은 삶을 글로 옮겨서 이웃과 동무한테 알립니다. 서로 삶을 한결 깊이 들여다봅니다. 저마다 겪은 새로운 삶을 차곡차곡 나눕니다. 슬기롭게 살아갈 길을 책(삶)에서 얻습니다. 종이책을 읽을 적에도 슬기롭게 살아갈 길을 얻고, 말로 이야기꽃을 피울 적에도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얻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을 차분히 되짚을 적에도 사랑스럽게 살아갈 길을 얻어요.


  엊그제 이웃한테서 《학교 참 멋지다》(북뱅크,2014)라는 그림책을 선물로 받았어요. 우리 집 아이들한테 읽히라는 뜻에서 이웃이 선물로 보내 주었습니다. ‘학교가 얼마나 멋지다고 책이름을 이렇게 붙였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 그림책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글을 쓰고 일론 비클란드 님이 그림을 넣었어요. 스웨덴 아이들 삶이 환히 드러나는 빛깔 고운 그림책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오빠가 어린 동생과 함께 학교에 가서 겪은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어린 동생은 오빠 혼자 다니는 학교를 늘 궁금해 했고, 오빠는 아무렇지 않게 동생을 학교로 데리고 가서 담임교사와 동무한테 동생을 소개해요. 동생은 오빠 곁에서 하루를 지내며 학교란 어떤 곳인지 지켜봅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보았어요. 초등학교 1학년인 오빠나 형이나 누나나 언니가 어린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오면, 담임교사와 동무들은 어떤 모습일까 퍽 궁금해요. 교칙 위반이라고 하려나요? 고등학교 1학년인 오빠나 형이나 누나나 언니가 꽤 어린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오면, 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요. 이때에도 어린 동생은 “학교 참 멋지다” 하고 느낄 만할까요? 교사와 동무는 아이한테 학교 소개를 찬찬히 하면서 수업도 함께 받도록 할 수 있을까요?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이웃나라에서 태어난 책을 즐겁게 만납니다. 이웃과 우리는 저마다 어떤 삶을 일구면서 사랑을 속삭이는지 생각에 잠겨 봅니다. 4347.3.3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름이와 함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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