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책길 걷기
1. 책을 왜 읽는가

 


  ‘책을 왜 읽는가?’ 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낱말을 살짝 바꾸어 여러모로 헤아려 봅니다. ‘학교를 왜 다니는가? 밥을 왜 먹는가? 일을 왜 하는가? 사랑을 왜 나누는가? 돈을 왜 버는가? 꿈을 왜 꾸는가? 노래를 왜 부르는가? 길을 왜 걷는가? 씨앗을 왜 심는가? 숨을 왜 쉬는가? 아이를 왜 낳는가? 삶을 왜 가꾸는가? 글을 왜 쓰는가?’


  책을 왜 읽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 삶을 여러모로 바라보면 됩니다. 책을 왜 읽는가 느끼고 싶으면, 우리 삶을 깊고 넓게 살펴보면 됩니다.


  학교를 왜 다닐까요? 졸업장을 따려고 다닐까요. 초등학교는 중학교에 가려고 다니는가요. 중학교는 고등학교에 가려고 다니는가요. 고등학교는 대학교에 가려고 다니는가요. 그러면 대학교는 왜 다닐까요. 대학교를 마치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밥을 왜 먹을까요? 살려고 먹는가요, 죽지 않으려고 먹는가요. 목숨을 이으면서 무엇가 하고 싶으니 밥을 먹는가요. 그저 주니까 먹는가요. 학교에서는 급식이 나오고 집에서는 어머니가 차려 주니 끼니를 때울 뿐인가요.


  하나하나 스스로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책을 읽는 까닭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으면, 학교에 다니는 까닭이나 돈을 버는 까닭이나 사랑을 나누는 까닭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요. 책을 읽는 까닭을 곰곰이 깨우칠 수 있으면, 노래를 부르는 까닭이나 길을 걷는 까닭이나 씨앗을 심는 까닭을 찬찬히 깨우칠 수 있어요.


  아이를 왜 낳는지 깨닫지 못하면 책을 왜 읽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삶을 왜 가꾸는지 깨닫지 못하면 책을 왜 읽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숨쉬기와 책읽기는 서로 같습니다. 글쓰기와 책읽기는 서로 같습니다. 밥하기와 책읽기도 서로 같고, 설거지와 책읽기도 서로 같아요.


  여린 동무를 따돌리는 짓도 책읽기와 같습니다. 힘센 동무가 해코지하는 여린 동무를 못 본 척하는 모습도 책읽기와 같습니다. 먹고 남은 과자 봉지를 아무 데나 몰래 버리는 짓도 책읽기와 같습니다. 손빨래를 하거나 빨래기계에 맡기는 살림살이도 책읽기와 같습니다.


  책을 읽을 적에는 책에 깃든 삶을 읽습니다. 소설책을 읽든 인문책을 읽든, 우리는 누구나 책에 깃든 삶을 읽습니다. 만화책을 읽든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든, 우리는 늘 책에 서린 삶을 읽습니다.


  삶을 재미나게 그린 책을 읽기도 하고, 삶을 깊이 파헤친 책을 읽기도 합니다. 삶을 아프게 그린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미처 생각조차 못하던 삶을 그린 책을 읽으며 크게 놀라기도 합니다.


  어느 책이든 삶을 담습니다. 삶을 담지 않은 책은 없습니다. 다 다른 삶을 담은 책입니다. 좋거나 나쁘지 않고, 옳거나 그르지 않습니다. 이런 삶은 이 책에 깃들고 저런 삶은 저 책에 감돌아요. 아마 어떤 이는 거짓말을 책에 쓸 수 있을 테지요. 어떤 이는 거짓말인 줄 못 느끼면서 책을 읽을 수 있을 테지요. 어떤 이는 거짓말을 참말인 줄 여기면서 책을 읽을 수 있을 테고요. 어떤 이는 참말만 책에 쓸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참말을 참말로 못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이는 참말을 낱낱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책을 읽는 모습은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참말과 거짓말을 슬기롭게 알아채는 사람은 스스로 슬기롭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참말과 거짓말을 제대로 못 알아채는 사람은 스스로 어설프거나 어수룩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책을 왜 읽을까요? 씨앗을 왜 심을까요? 콩을 심은 자리에 콩이 나고 팥을 심은 자리에 팥이 납니다. 콩을 심은 자리에 팥이 나지 않습니다. 팥을 심었으니 콩이 나지 않습니다. 참말을 담은 책을 읽으면서 참말을 익힙니다. 거짓말을 적은 책을 읽으면서 거짓말이 머릿속에 스며듭니다. 스스로 읽는 책에 따라 스스로 삶을 가꿉니다. 스스로 손에 쥐는 책에 따라 스스로 삶이 바뀝니다.


  잘 생각해 보셔요. 집과 마을에서 늘 따사롭고 살가운 말을 듣는 아이가 있고, 집과 마을에서 늘 거칠고 아픈 말을 듣는 아이가 있어요. 두 아이는 저마다 다른 말이 익숙할 테지요. 두 아이는 저 스스로 모르게 여느 때에 늘 듣던 말투대로 말을 꺼내겠지요.


  학교를 다니며 시험공부에 길들거나 익숙하다면, 스스로 이웃이나 동무를 ‘숫자’나 ‘등급’으로 바라보는 눈길에 길들거나 익숙하기 마련입니다. 학교에서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는 넋을 늘 배운다면, 스스로 이웃이나 동무를 따사롭게 바라보고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치고받으며 죽이는 이야기 흐르는 전쟁영화를 많이 보면, 내 마음속에는 전쟁 이야기가 늘 감돕니다. 서로 아끼며 사랑하는 이야기 흐르는 만화를 많이 보면, 내 가슴속에는 사랑 어린 이야기가 늘 서립니다.


  역사책을 즐겨읽는 사람은 역사 이야기가 늘 마음속에 있어요. 환경책을 즐겨읽는 사람은 환경을 가꾸고 돌보는 이야기가 늘 마음속에 있어요. 연예인 소식을 인터넷으로 찾아서 읽는 사람은 연예인 이야기를 두루 꿸 테지요. 운동경기 소식을 빠짐없이 챙겨서 읽는 사람은 운동경기 이야기라면 두루 꿰겠지요.


  책읽기는 책읽기이면서 삶읽기입니다. 어느 책을 왜 골라서 읽느냐에 따라 어느 삶을 어떻게 살피며 읽느냐가 달라집니다. 책을 스스로 골라서 읽듯이,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을 스스로 골라서 읽습니다. 책을 스스로 살펴서 읽듯이, 이웃과 동무를 바라보는 눈썰미와 눈매가 달라집니다. 책을 스스로 찾아서 읽듯이, 꿈과 삶을 마주하는 몸가짐이 거듭납니다.


  졸업장을 따려고 학교를 다니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식을 얻으려고 책을 읽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을 벌려고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이가 찼으니 시집장가를 가서 이냥저냥 아이를 낳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와 달리, 마음 가득 뜻을 품고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졸업장도 학문도 아닌 꿈과 사랑을 키우려고 학교를 다니면서 마음을 살찌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츠모토 코유메 님이 그린 만화책 《그린 핑거》(학산문화사 펴냄)가 있어요. ‘그린 핑거’는 ‘푸른 손가락’을 가리킵니다. ‘푸른 손가락’은 흙을 살찌워 풀과 나무를 살리는 손길을 나타냅니다. 만화책 《그린 핑거》를 읽으면,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새롭게 눈뜨는 이야기가 흘러요. 원예나 연예에 눈뜨는 이야기가 아니라, 흙과 풀과 나무를 사랑으로 바라보면서 눈뜨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푸른 손가락이 흙과 풀과 나무를 사랑스레 살린다면, 이 푸른 손가락으로 책을 읽을 적에는 꿈과 삶과 빛을 사랑스레 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책을 왜 읽는가?’ 하고 묻는다면,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답게 살고 싶어서요, 즐겁게 살고 싶어서요, 착하게 살고 싶어서요, 참답게 살고 싶어서요, 웃고 노래하면서 살고 싶어서요. 4347.3.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삶 푸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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