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 세고! : 수와 양 끼리끼리 재미있는 우리말 사전 2
박남일 지음, 문동호 그림 / 길벗어린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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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58

 


시골살이에서 태어난 말입니다
― 재고 세고!, 수와 양
 박남일 글
 문동호 그림
 길벗어린이 펴냄, 2007.8.25.

 


  박남일 님이 쓴 글에 문동호 님이 그림을 붙인 《재고 세고!, 수와 양》(길벗어린이,2007)이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끼리끼리 재미있는 우리말 사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을 모둠으로 엮어서 찬찬히 들려주는 책입니다. 한국말을 슬기롭게 가르치기보다는 영어와 한자를 지식으로 외우도록 내모는 제도권 학교교육 얼거리를 돌아본다면, 이러한 그림책은 무척 뜻있으며 값있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제대로 못 쓰거나 안 쓰는 하나치(단위)를 잘 묶어서 보여주는 《재고 세고!》라고 봅니다. 길이와 부피와 물건과 나이와 날짜를 세는 낱말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이 그림책을 아이한테 읽히는 어른이 함께 들여다본다면, 어라 이런 말이 있었네, 그동안 잊고 살았구나, 하고 생각할 만하리라 봅니다. 요새는 ‘아름’이나 ‘푼’이라는 낱말조차 들을 일이 드물고, ‘뭇’이나 ‘짐’이나 ‘섬’이나 ‘모숨’ 같은 낱말은 아예 들을 일도 없구나 싶어요.


  ‘열’이나 ‘스물’이라는 낱말도 사람들은 잘 안 씁니다. 한자말로 ‘십’이나 ‘이십’이라 말합니다. ‘하루’나 ‘이틀’ 같은 낱말을 얼마나 쓸까요. ‘일일’이나 ‘이일’이라는 한자말만 쓰지 않나요.


.. 자가 없으면 뼘으로도 길이를 잴 수 있지. 어른 한 뼘은 크고, 아이 한 뼘은 작고. 키가 한 뼘이나 자랐다면 아주 기분 좋은 일이지 ..  (7쪽)


  그런데, 그림책 《재고 세고!》는 큰 틀에서 한국말을 슬기롭게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가 없으면 뼘으로도 길이를 잴 수 있지”라고 말하지만, 예부터 한겨레는 굳이 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저도 어릴 적에 으레 듣고 쓰곤 했는데, 손뼘으로뿐 아니라, 손가락 마디로 길이를 쟀고, 팔등을 뻗어서 길이를 재곤 했어요. 한 팔을 뻗어서 잰다든지 두 팔을 벌려서 길이를 잽니다. 걸음으로 길이를 재고 다리를 뻗어 길이를 잽니다.


  골목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우리들이 언제 ‘자’를 챙기면서 놀겠어요. 맨몸으로 놀아요. 그러니 온몸을 써서 길이를 잽니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주워서 길이를 재요.


  다시 말하자면, 어른도 아이도 언제나 맨몸으로 길이를 쟀습니다. 자로 길이를 잰 사람이라면 가겟집 일꾼이라든지 양반집 사람들뿐이었으리라 느껴요. 집을 짓던 옛사람도 자를 쓰지 않았어요.


.. 옛날에는 쌀가게에서 쌀을 한 말씩 사다 먹곤 했지. 한 말씩 열 말이 모이면 두 가마, ‘한 섬’이 되는 거야 ..  (15쪽)


  ‘가마’는 ‘가마니’와 같은 낱말입니다. 이 낱말은 한겨레가 쓰던 낱말이 아닙니다. 1900년대 첫무렵에 일본에서 들어왔습니다. 한국을 식민지로 삼던 일본이 쓰던 낱말이 ‘가마니’예요. 그러니, 이 낱말을 아이들한테 한국말을 가르치려고 다룰 때에는 알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 슬픈 발자취가 깃든 낱말이에요.


  열 말이 모이면 두 가마라고 이야기할 까닭이 없습니다. ‘가마’라는 낱말은 일본사람이 쓰는 말이고, 한국사람은 예부터 ‘섬’이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아직 곳곳에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찌꺼기 낱말이 있는데, 그림책에서까지 이런 식민지 찌꺼기 낱말을 다루면서 아이들한테 가르쳐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런 책일수록 더더욱 말뿌리를 슬기롭게 살피고 올바르게 돌아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더욱이, 옛날에는 쌀을 “사다 먹”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누구나 손수 흙을 일구어 나락(벼)을 거두어서, 절구질이나 방아질을 해서 겨를 벗긴 뒤 쌀을 얻어서 먹었습니다.


.. 이제 물건을 세 보자. 재미있게도 물건마다 세는 말이 다 달라 ..  (19쪽)


  물건을 세건 부피를 세건, 모든 낱말은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물고기를 세건 배추나 무를 세건 볏섬을 세건 모두 시골사람이 쓰는 낱말입니다. 물을 길어 동이에 담을 적이든 솥에 불을 지펴 밥을 지을 적이든 언제나 시골사람이 쓰는 낱말입니다.


  물건을 세는 이름은 “재미있게도 다 달라”라고 할 일이 아닙니다. 삶이 늘 다르고, 물건마다 쓰임새가 다른 만큼, 이 자리와 저 자리에서 쓸 적에 다 다르게 말할밖에 없습니다. 쓰임새를 찬찬히 나누고 일머리를 슬기롭게 가르고자 언제나 다 다른 말씨를 빚어서 썼어요.


  논과 밭은 같은 땅이에요. 같은 땅이지만 어떻게 갈아서 쓰느냐에 따라 논이 되고 밭이 되어요. 들과 숲도 같은 땅이에요. 나무가 우거질 적에는 숲이요, 사람들이 곡식이나 푸성귀를 얻으려고 갈아엎을 적에는 들입니다.


.. 큰 수를 세는 우리말도 있지. 백은 온, 천은 즈믄이야. 온갖 곡식이란 온 가지 곡식, 백 가지 곡식을 말하는 거지. 옛날에 백이라면 거의 모든 것을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백 가지로 모든 것을 나타내기에는 턱도 없지 ..  (31쪽)


  온갖 곡식을 가리키면서 쓴 ‘온’이라는 낱말은 “많다”와 “크다”는 뜻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온통’이라든지 ‘온누리’처럼 써요. “온 나라에 가득하다”라든지 “온 하늘에 넘친다” 같은 자리를 헤아려 보셔요. ‘온’은 그저 숫자 100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림책 《재고 세고!》는 틀림없이 뜻있고 값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백이면 백 모두 도시에서 살아가니, 이러한 그림책을 어버이와 함께 읽으면서 한국말을 차근차근 배우도록 돕는 좋은 길동무 같은 책으로 삼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뿌리를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니 아쉽습니다. 말뿌리와 함께 삶자취를 넓게 돌아보지 못하니 쓸쓸합니다.


  말이 태어난 뿌리를 짚으면서 낱말을 하나하나 다룬다면, 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아름다운 삶빛을 보여주리라 생각합니다. 말이 쓰인 자리를 헤아리면서 낱말을 차근차근 보듬는다면, 우리 겨레가 이 나라를 이루면서 살아온 발자취뿐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슬기롭게 가꾸는 길에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붙여야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책이 되지 않아요. 지식과 정보를 더 다루어야 쓸 만한 그림책이 되지 않아요. 말을 말답게 알뜰히 다루고, 삶을 삶답게 슬기롭게 밝힐 적에 아름다운 그림책이 됩니다. 4347.3.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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