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빛 1
와타나베 다에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07

 


나뭇잎이 흔들린다
― 바람의 빛 1
 와타나베 타에코 글·그림
 학산문화사 펴냄, 2001.11.25.

 


  나뭇잎이 흔들립니다. 바람이 불 적마다 나뭇잎이 한들한들 흔들립니다. 풀잎이 흔들립니다. 바람이 불 때에도 풀잎이 흔들리고, 누군가 풀밭을 지나갈 때에도 풀잎이 사그락사그락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흔들립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는 크다면 크지만, 작다면 작습니다. 자동차가 한 대 휭 지나가기만 하더라도 나뭇잎 소리를 못 듣습니다. 마을방송을 한다며 쩌렁쩌렁 울릴 때에도 나뭇잎 소리를 못 듣습니다. 전화기가 울려도 풀잎 소리를 못 들어요.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본다면 이때에도 풀잎 소리를 못 듣지요.


  도시에서는 풀잎이 눕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도시에도 풀이 아예 없지는 않을 테지만, 도시에서 살며 풀잎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도시에서도 봄과 여름뿐 아니라 가을과 겨울에도 바람이 불 텐데, 도시에서 일하며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요.


- 도읍 교토는 시대의 바람에 나뭇잎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3쪽)
- ‘이제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아직도 형님이 그리워 참을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힘든 연습과 대무에 지쳐 있을 때가 아니라, 이렇게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느꼈을 때입니다.’ (127쪽)

 


  예부터 새를 떨어뜨리는 무시무시한 권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릴 적에 이 말을 들으면서 피식 웃었어요. 얼마나 잘났기에 새를 떨어뜨린담? 한편, 우는 아기 울음을 멈춘다는 무서운 권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아이와 살아가며 이 말에 피식 웃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대단한 권력이라 하더라도 뭔 권리로 우는 아기를 잠재우느냐 하고. 권력이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더라도 우는 아기한테 젖을 물립니다. 권력이 눈알 부라리면서 노려보더라도 차분하고 따사로운 목소리를 뽑아 아기한테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어디서 권력 따위가 아기 옆에서 얼쩡거리나요. 어디서 총칼 앞세운 권력 주제에 아기 둘레에서 저지레를 하겠어요.


  사냥꾼이 총을 쏘면 새를 떨굴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갖가지 매연과 배기가스를 내뿜을 뿐 아니라, 온갖 쓰레기를 버리면, 새는 살아남을 길이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요. 새 또한 사람처럼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걸요. 새도 다른 목숨들과 똑같이 배가 고프면 살아가지 못하는걸요. 그러니, 새를 떨구는 권력이란 사람을 하찮게 보는 권력입니다. 사람을 하찮게 보는 권력이란, 권력을 거머쥔 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셈입니다. 남을 깎아내리는 사람이란 늘 스스로 깎아내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란 언제나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 “유난히 무사, 무사하고 떠드는 사람 중엔, 희한하게도 원래 무사가 아닌 사람이 많거든. 그건 대체 왜일까?” (24쪽)
- “세이자부로! 널, 장난 삼아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리 남장을 해도 넌 여자다, 세이. 사람을 죽이기보다, 낳고 살리는 것이 더 잘 어울려.” (56∼57쪽)

 


  와타나베 타에코 님 만화책 《바람의 빛》(학산문화사,2001) 첫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1800년대가 무르익으면서 1900년대로 넘어서기 앞선 어느 한때 일본 사회 이야기를 보여주는 만화책인 《바람의 빛》이에요. 싸울아비가 나오는 만화책입니다. 칼부림이 흐르고, 손목이나 머리가 뎅겅 하고 잘리는 그림이 가끔 춤을 추는 만화책입니다. 순정만화라 하는데, 일본에서는 순정만화로도 이렇게 목아지를 스윽 베는 그림이 나오기도 하는구나 하고 헤아립니다.


  칼이란 그렇지요. 사람을 베어 죽이는 데에 쓰는 칼이란 그렇지요. 목을 베라고 만든 칼이니 목을 베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사람을 찔러 죽이는 데에 쓰는 칼이니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이야기가 나와요.


  나는 너를 왜 죽여야 할까요. 너는 나한테 왜 죽어야 할까요. 서로서로 왜 눈알을 부라리면서 앙갚음을 하려 하나요. 내가 앙갚음을 하면 모든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나요. 내가 앙갚음을 하더라도 이녁은 나한테 앙갚음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지 않을까요.


- “부디 제 정체를 잊고 저를 동지로 받아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안됐지만, 대무는 여자를 고용할 정도로 만만한 데가 아니야.” “아뇨! 할 수 있습니다! 해 보일 겁니다! 어지간한 남자들한테는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가 사람을 벨 수 있을까?” (68∼69쪽)
- “절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저는 무사입니다! 봉록을 탐하여 세운 뜻이 아닙니다!” (81쪽)

 


  나뭇잎이 흔들립니다. 바람이 일렁이며 나뭇잎이 흔들립니다. 칼을 손에 쥔 싸울아비는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서 나를 베려고 하는구나 하고 알아챕니다. 칼을 손에 쥔 싸울아비는 누군가한테 조용히 다가서면서 재빨리 누군가를 베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뭇잎이 흔들립니다. 바람이 일렁이면서, 비가 내리면서, 햇볕이 내리쬐면서, 나뭇잎이 찬찬히 흔들립니다. 사랑을 담아 천천히 다가서는 이가 있어 나뭇잎이 흔들려요.


  나뭇잎은 조용히 지켜봅니다. 마음속에 미움을 품은 사람을 지켜봅니다. 가슴속에 사랑을 담은 사람을 지켜봅니다. 냇물도 구름도 사람을 지켜봅니다. 새도 짐승도 풀벌레도 사람을 지켜봅니다. 딱정벌레와 무당벌레도, 잠자리와 개구리도, 다 같이 사람을 지켜봅니다. 이 지구별에서 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가만히 지켜봅니다.


  따사로운 빛이 흐르면 나뭇잎은 춤을 춥니다. 차가운 빛이 감돌면 나뭇잎이 파르르 떱니다. 너그러운 빛이 서리면 나뭇잎은 노래를 불러요. 매몰찬 빛이 깃들면 나뭇잎은 부르르 떨어요.


- “무사에게는 먹는 것을 참아서라도 망가뜨리면 안 되는 ‘꼴’이 있다!” “그거 허례허식 아닌가요?” “듣기 싫어! 소우지! 웃지만 말고 이 녀석을 빨리 연습장으로 데려가!” (123∼124쪽)
- “제발, 제가 원래 그렇게 몹쓸 놈은 아닙니다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사도 아니야.” (185쪽)


  칼로 물을 벤다고 했어요. 칼로 아무리 물을 베어도 물은 잘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칼로 수많은 사람을 베고 또 베어도 사람은 자꾸자꾸 있습니다. 칼로 수많은 나무를 베고 풀을 베어도 나무와 풀은 새로새로 자랍니다.


  곧, 죽음은 아무것도 낳지 않아요. 죽임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요. 죽음으로는 삶도 사랑도 꿈도 빛내지 못해요. 죽임으로는 평화나 평등이나 민주를 펼치지 못해요.


  칼을 쓰기에 ‘무사’일까요. 우리가 쓸 칼이라면, 무를 베고 배추를 썰며 마늘을 다질 적에 써야 하지 않을까요. 칼을 솜씨 좋게 다루기에 ‘싸울아비’인가요. 우리가 사람답게 나아갈 길이란, 낫으로 풀과 나락을 베고, 호미로 땅을 쪼며 나물을 캐는 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싸움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사랑 따사로운 사람이 늘기를 빌어요. 자동차와 기계 소리에 길드는 사람이 아닌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살가이 들으면서 마음을 활짝 여는 사람이 늘기를 빌어요. 4347.1.2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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