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시론 - 굴렁쇠 생각 3
이오덕 지음 / 도서출판 굴렁쇠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오덕을 읽는다 5

 


아이들을 사랑하는 시 한 줄
― 아동시론
 이오덕 글
 굴렁쇠 펴냄, 2006.11.10.

 


※ 책풀이 ※
1973년에 처음 나오고 2006년에 다시 나온 《아동시론》은 어른이 써서 어린이한테 읽히는 시와 어린이가 써서 어린이가 읽는 시, 이 두 가지를 찬찬히 살피면서, 어린이가 누릴 어린이 시문학이 어떻게 나아갈 때에 아름다운가를 밝힌다. 삶을 아름답고 즐겁게 가꾸는 밑거름이 되는 시쓰기를 이야기한다.


..


  아이는 ‘실험’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는 ‘사랑’할 아이들입니다. 아이들한테 이것 해 보고 저것 해 볼 수 없어요. 아이들한테는 가장 따사로운 사랑을 베풀 노릇이고, 가장 너른 꿈을 들려줄 노릇이며, 가장 빛나는 이야기를 물려줄 노릇입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한테 물려주어 아이가 이루도록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은 내가 이룰 꿈입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새롭게 꿈을 꾸면서 살아갈 때에 아름답습니다. 먼먼 옛날 누구나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일구고 살더라도, 아이는 어버이 뒤를 똑같이 따르지 않아요. 짚을 엮어 짚신을 삼더라도 어버이가 삼던 짚신과 사뭇 다른 짚신을 삼습니다. 바구니를 엮거나 둥구미를 엮을 적에도 사뭇 다르게 엮습니다. 괭이질을 하거나 호미질을 해도 서로 같지 않아요. 씨앗을 뿌리거나 심을 때에도 저마다 조금씩 달라요.


  판박이가 아닌 새로운 숨결로 태어나는 아이입니다. 똑같은 틀로 짜거나 맞추는 아이가 아니라, 새삼스러우며 싱그럽게 자라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한테 드리우는 빛을 생각해요. 아이가 짓는 웃음을 헤아리고, 아이가 읊는 노래를 들어요. 내가 아이였을 적에 어떤 빛이 감돌았는지 돌아봐요. 내가 아이였을 적 지은 웃음을 곱씹고, 내가 그동안 읊은 노래를 짚어요.


  어느 때에 즐겁게 누린 하루인가요. 어느 곳에서 즐겁게 노래한 삶인가요. 오늘은 어떤 삶을 짓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가요.


  어버이 스스로 아름답게 노래하면 아이들은 아름다운 노래를 물려받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사랑스레 일하면 아이들은 사랑스레 일하는 매무새를 물려받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착하게 어깨동무하면 아이들은 이웃하고 착하게 어깨동무하면서 두레를 즐기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시가 없다. 그들의 일상의 말과 행동과 마음속에 충만해 있는 참된 시의 세계는 그릇된 어른들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고 봉쇄당하여, 대신 얼토당토않은 기묘한 흉내내기 놀이를 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답지 못한 원숭이 흉내가 곧 어린이들이 쓰고 있는 ‘동시’라는 것이다 … 교사들이 동요나 동시를 가르치고 어린이들이 동요를 쓰는 동기와 궁극의 목표가 백일장이나 글짓기 대회에서 당선되는 일이고 보면, 교육이란 행위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을 키워 간다는 그 본디의 자세는 철저히 망각 무시되고, 다만 그럴싸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만이 최상의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동요가 어린이들의 생활과 심정에 뿌리박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유로(流露)가 아니라 치졸한 언어의 조합의 수공품으로서 백일장이나 글짓기 대회의 행사에서 소중히 여겨진 것이 이때부터다. 그리고 얼른 보아서 이러한 작품들은 윤석중 씨의 동요 세계의 일면을 그대로 반영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재미스럽고 귀여운 유아의 재롱, 세상 모르게 구는 어린애의 천진성 같은 것이 재치 있는 말의 기교로 만들어지는 윤 씨의 동요 세계는, 과도기에 처해 있는 우리 사회에서 각종의 문화 운동으로 선전 보급될 가능성이가장 많았으며, 이리하여 빈약한 문학 유산밖에 이어받지 못한 우리 어린이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유일한 정서 표출의 세계로서 무조건 받아들이고 모방하였던 것이다 ..  (5, 14, 19쪽)


  어버이는 어버이입니다. 어버이는 교사가 아닙니다. 교사는 교사라 할 테지요. 그러나 교사도 어른이요 어버이입니다. 교사라는 이름에 앞서 어른이면서 어버이입니다. 아이들은 아이입니다. 학생 아닌 아이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있든 마을에 있든 집에 있든 언제나 아이입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가 아닌 어버이와 아이 사이입니다. 교사와 학생으로 만날 사이가 아닌 어른과 아이로 만날 사이입니다. 사랑을 물려줄 어버이요, 사랑을 받을 아이입니다. 사랑을 가르칠 어른이면서, 사랑을 배울 아이입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아이한테 영어를 가르칠 까닭이 없어요. 아이가 스스로 영어를 쓰거나 영어로 된 책을 읽거나 영어를 쓰는 이웃나라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느낄 적에 영어를 알뜰살뜰 알차게 가르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아이한테 수학을 가르칠 까닭이 없어요. 아이가 스스로 셈과 기호와 빛과 넋을 한 자리에 어울려 놓으면서 마음을 단단하게 다스리고 싶다고 느낄 적에, 이 아이가 참답게 셈과 기호와 빛과 넋을 한 자리에 그러모으면서 엮도록 도울 수 있으면 됩니다.


  어버이는 언제나 사랑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어른은 언제나 사랑을 말하면 됩니다. 아이는 언제나 사랑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면 됩니다. 아이는 언제나 사랑을 들으면 됩니다.


  사랑받는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요. 사랑받는 꽃이 곱게 피어요. 사랑받는 풀이 푸른 내음 듬뿍 베풀어요. 사랑받는 아이가 튼튼하게 자라지요. 사랑받는 아이가 아름답게 노래하지요. 사랑받는 아이가 착한 눈빛 밝히지요.


.. 아이들의 감동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감동이다. 그리고, 이 새로워지는 감동은 마음속에 두고두고 간직해 둔 그것이 아니라 생활의 현장에서 발화되어 갱신되는 것이다 … 생활 현장에서 그때 그때 얻어진 감동을 대체로 소박 솔직하게 토해 내듯이 쓰면 시가 되는 것이 아이들의 시다 … 감동을 그대로 토해 내듯 쓰고 있는 어린이의 시에는, 더구나 저학년의 시에는 생략될 것은 거의 되고 있는 것이다 … 아이들이 자기 자신의 생활과 마음을 자기의 말로 쓰게 된다면, 거기 유사 모조품이란 거의 있을 수 없다. 천 명의 아이가 쓴 천 편의 시는 천의 얼굴처럼 다 다를 것이 당연하다 … 우리의 언어란 것이 완전한 것이라고 하면 시인은 노래하듯 시를 쓰면 될 것이고, 사실은 그런 상태가 이상이라고 본다 … 내가 배제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생활 감동의 효과적인 파악과 표현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생활을 외면하고 감동이 없으면서도 기교만으로 작품(감동)을 만들어 내려고 하고 있는 현재의 그릇된 동시 제조의 방법과 태도다 ..  (22, 23, 27, 65, 74쪽)


  교사라 할 적에 굳이 ‘참교사’와 ‘거짓교사’를 가를 까닭은 없어요. 그렇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참교사는 지식을 아이한테 가르치더라도 사랑스럽게 삶으로 녹여내서 포근하고 따사롭게 베푸는 사람입니다. 아니, 참교사는 아이한테 지식을 보여주지도 말하지도 않아요. 그저 사랑스럽게 삶으로 녹여내는 이야기를 들려줄 뿐입니다. 그저 따사롭고 포근하게 베푸는 사랑으로 환하게 웃을 뿐입니다.


  거짓교사는 시험점수를 아이 앞에서 팔랑거립니다. 거짓교사는 대학입시로 아이들을 옥죄어 놓습니다. 거짓교사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을 몽땅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도록 내몰거나 부추깁니다. 거짓교사는 아이들이 밤낮으로 시험공부만 생각하도록 다그칩니다. 거짓교사는 아이들이 제힘으로 씩씩하게 서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서지 못하면 교사란 무슨 뜻이 있을까요. 아이들이 스스로 서도록 이끌지 못하면 교사라는 자리는 무슨 보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교사가 된 어른부터 스스로 서지 못하니, 아이들이 스스로 서도록 이끌지 못해요. 교사가 되어 월급 받는 어른부터 스스로 설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아이들이 스스로 아름답게 서서 착하며 참답게 삶을 빛내도록 가르치지 못해요.


  교과서 지식만 배워 교사가 된 어른은 아이들한테 교과서 지식만 집어넣어요. 교과서 지식으로 교사가 된 어른은 아이들한테 교과서 바깥으로 씩씩하게 나가서 스스로 삶을 붙잡도록 돕지 못해요, 교과서 지식으로 교사가 된 어른은 아이들이 교과서 지식으로 대학생이 되도록 밀어붙일 뿐입니다. 교과서 지식으로 돈 잘 벌 수 있는 길만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교사입니다.


.. 재미스럽고 귀여운 것을 찾으려 하고 그러한 말을 흉내내려 하는 곳에는, 어른의 경우든 아이들의 경우든, 시와 생활의 창조가 아니라 파탄이 있을 뿐이다 … 본디 우리 동요에 나타는 이 ‘지요’ ‘해요’ ‘야요’의 ‘요’ 어미는 일본의 근대 동요에서 현저한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같은 음의 어미와 그 뜻이 어느 정도 비슷한 것으로, 일본 동요의 영향이라고 본다 … 아이들이 쓰는 말이 이렇게 획일적으로 된다는 것은 그들의 감각과 사고가 획일화된다는 것이요, 개성의 사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시는 우리 아이들의 개성, 곧 우리 민족의 생명을 학살하고 있다 … 모든 동요적 발상의 운문에 공통된 점은 치졸한 것, 혹은 어른스러운 것의 모방이요, 남을 비웃는 자세요, 자기 중심의 경망성이다. 그것은 곧 시와 생활이 거부된 세계요, 비참한 어떤 동물들의 모방 훈련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유행가, 그렇다. 동시는 아이들의 천박한 유행가로서 바야흐로 저널리즘과 교육계에서 상품의 선전으로 크게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  (32, 44, 56, 64쪽)


  학교가 있어야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어른으로 살아온 나날을 바탕으로 아이들한테 삶을 가만히 보여주면서 온몸으로 가르칩니다. 교과서로 가르치지 않아요. 교과서가 있어야 가르치지 않아요. 삶은 그예 삶으로 가르칩니다. 삶은 그저 삶으로 보여줍니다.


  책을 읽혀야 잘 가르치지 않아요. 책이 있어야 잘 가르칠 수 있지 않아요. 먼먼 옛날부터 어느 누구도 책으로 시골일 가르치지 않았어요. 나물을 캐고 풀을 뜯으며 밥을 짓는데, 몸으로 보여주면서 몸으로 익히도록 할 뿐이에요. 어느 누구도 요리책을 들추지 않아요. 간을 맞추고 밥물을 살필 적에 두 눈으로 살피고 스스로 해야 익히지, 요리책을 본대서 알 수 없어요.


  요리책에는 계량기를 써서 하나하나 따지도록 하지요. 그런데 옛날에 어느 누가 계량기를 썼나요. 손으로 했지요. 손으로 살피고 눈으로 헤아리며 마음으로 느껴요. 식구들 머릿수에 맞추어 절구를 찧어 겨를 벗긴 뒤에 키질을 해서 부스러기를 날리고는 조리로 일어 돌을 고릅니다. 밥물을 맞출 적에도 솥에 담은 쌀을 살펴 알맞게 물을 붓습니다. 느낌으로 알아요. 지식으로 알 수 없어요.


  아이를 얼러 자장노래를 부를 적에, 어떤 가락과 노랫말로 몇 분 동안 불러야 한다는 법이 없어요. 짧게 부를 수 있고 길게 오래 부를 수 있어요. 대단한 노래꾼이어야만 자장노래를 부르지 않아요. 사랑으로 부르는 자장노래예요.


  아이를 안거나 업을 적에 어떤 법이나 규칙이란 없어요. 아이가 걷도록 가르칠 적에도 어떤 법이나 규칙이란 없어요.


  삶이란 삶일 뿐, 법이나 규칙이 아닙니다. 삶은 삶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을 뿐, 책으로는 가르치지 못하고 물려주지 못합니다. 책으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못 느끼게 합니다.


.. 시인들은 언어로 시를 구축하지만 아이들은 생활에서 이미 얻은 시를 기술하는 것이다 … 아이들의 성장은 어디까지나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아이들의 시는 작품으로서 완전한 것보다 그 시를 획득하는 노력과 자세를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는 예술이요 문학이지만, 어린이의 시는 문학이기 전에 교육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아이들이 시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시를 쓰는 직업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이 정직하고 행동이 순진하고, 용감하고, 인간성이 풍부하고, 개성이 뚜렷한 창조적 인간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비 개인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그 아름다움에 놀랄 줄 아는 사람, 발에 밟힌 한 마리의 곤충을 마음 아파하고, 절름발이 거지 아이를 보고 비웃고 놀리고 돌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불행한 사람이 있는 까닭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 괴로운 일을 하면서도 그냥 괴로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부모 형제와 남들과의 관계에서 그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 그리하여 생활을 창조해 가는 사람, 이런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  (66, 78∼79쪽)


  학교는 왜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못 가르치는데 학교는 왜 있을까요.


  나도 참 궁금합니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참말 아무것도 없는데, 학교는 왜 이다지도 많고, 학교를 짓고 지키느라 왜 이렇게도 많은 돈을 들여야 할까요. 가만히 보면, 군대도 이와 같아요. 군대는 평화를 지켜 주지 않아요. 군대는 전쟁을 하려고 미리 갖추는 무기일 뿐이에요. 전쟁을 벌이려고 군대를 두지, 평화를 지키려고 군대를 두지 않아요.


  그러니까, 학교도 군대도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들 아니랴 싶어요. 잘 보셔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도시로 갑니다. 시골에서 태어나도 도시로 가고, 도시에서 태어나도 도시에 남습니다. 학교를 다니며 시골에서 즐겁게 살아가거나 일하거나 사랑하는 아이가 아주 드물어요.


  학교에서는 오직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혼자 살아남는 법과 규칙’을 가르칩니다. 학교에서는 오직 지식을 다룹니다. 학교에서는 삶을 다루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사랑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사랑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꿈을 키우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꿈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학교라는 곳은 시험공부만 시킵니다. 학교라는 곳은 대학교만 보여줍니다. 학교라는 곳은 시험점수만 따집니다. 학교라는 곳은 시험점수에 따라 아이들을 다룹니다. 학교라는 곳은 숫자와 시험과 점수와 대학교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아이들이 못 보고 못 느끼고 못 누리도록 가로막습니다.


  삶을 배우려면 학교를 안 다닐 노릇입니다. 밥을 맛나게 지어 이웃과 나누고 싶다면 학교를 떠날 노릇입니다. 옷을 곱게 지어 식구들과 나누고 싶으면 학교와 멀어질 노릇입니다. 집을 튼튼하게 지어 내 사랑하는 곁님과 오순도순 살림을 꾸리고 싶으면 학교 아닌 보금자리를 찾아 내 빛을 가꿀 노릇입니다.


.. 시가 아이들의 생활에서 우러난 감정으로 씌어지는 것이라면, 일부러 시를 쓰려고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 그러니 집에서 밥을 짓다가, 혹은 심부름을 가는 길에서, 또는 동생을 등에 업고 들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그때 그때 감동이 식기 전에 시로 써 두는 일은 시를 쓰는 아이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 작품이 아무리 시에서 멀어져 있다 하더라도, 거기 좋은 점을 찾아낼 수 있으면 그것을 칭찬해 주는 것이 좋다 … 형식에 내용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형식을 맞추어야 한다. 아니, 내용이 나타나면 그것이 그대로 형식이 되는 것이다 … 서정시는 단순한 마음의 색상을 뒤적거리는 모방과 유형에서 벗어나 생활을 노래하고 생활을 얘기하는 그 속에서 보다 건강한 세계를 전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시의 창조, 그것은 어린이의 경우 결코 꾀나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손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몸과 마음으로 이뤄지는 행위인 것이다 ..  (93, 97, 103, 130∼131, 135쪽)


  숨을 쉬어야 목숨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숨을 쉬어야 살아갑니다. 숨을 쉬지 못하면, 1분 아닌 10초만, 아니 1초라도 숨을 쉬지 못하면 모두 죽습니다. 바람이 없는 곳에 1초만 있어 보셔요. 바로 죽지 않겠어요? 숨을 몇 분 동안 참을 수 있다지만, 숨은 허파로만 마시지 않아요. 살갗도 숨을 마시고, 머리카락도 눈알도 발가락도 숨을 마셔요. 우리는 바람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아가요. 바람이 없으면 커다란 궁궐이건 수십 억짜리 아파트이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물을 마셔야 목숨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벌레도 새도 물을 마십니다. 물이 없으면 어떤 목숨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셔요. 오늘날 우리 도시를 바라보셔요. 깨끗한 바람이란 없어요. 맑은 물이란 없어요. 흐르는 바람과 물이어야 깨끗하고 맑은데, 우리 사회와 우리 도시는 바람도 물도 흐르지 못합니다. 바람은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 매연과 발전소 쓰레기덩이 때문에 더러워집니다. 물은 자동차에서 나오는 쓰레기와 공장이랑 발전소가 버리는 쓰레기와 골프장과 논밭에 뿌리는 농약 때문에 더러워집니다.


  경제개발 안 한대서 나라가 무너지지 않아요. 깨끗한 바람과 맑은 물이 없으면 나라가 무너져요. 수출을 많이 하거나 문화상품 많이 만들어야 나라가 발돋움하지 않아요. 바람이 깨끗해야 하고 물이 맑아야 합니다. 바람이 지저분하고 물이 더러우면, 수백억이나 수천억이 우리 손에 있다 한들 하루조차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람답게 꿈을 키우는 빛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착하게 사랑하는 살림살이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직업인이 되어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전문가나 학자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살림꾼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오롯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 실제로 보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보고 생각한 것처럼 일부러 어린애 흉내를 내어 보이는 것이 ‘동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스러운 ‘동시’를 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 우리도 이와 같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눈에게, 바람에게, 구름에게, 나무에게, 새와 벌레에게 해 봅시다 … 이 시는 사실을 그대로 쓴 것뿐인데 지은이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그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 터서 갈라져 피가 묻은 손 이야기가 이렇게 훌륭한 시로 된 것은, 거기 생활과 마음의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가 나도록 일하던 그 손으로 이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겪을 수 있는 조그만 일, 지나가 버리면 곧 잊어버리고 말 조그만 마음의 움직임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 자기 몸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치 있는 시를 쓸 수 없습니다 … 우리들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희망인 이 어린이들은 지금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보고 무엇을 괴로워하고 무엇을 미워하고 있는가 ..  (161, 174, 178, 182, 189, 200, 246쪽)


  이오덕 님이 쓴 어린이문학 비평인 《아동시론》(굴렁쇠,2006)을 읽습니다. 어린이한테 시쓰기와 시읽기를 알려주는 길잡이책입니다. 시란 무엇인가 하고 밝힙니다. 시쓰기와 시읽기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시를 쓰는 즐거움과 시를 읽는 기쁨을 찬찬히 들려줍니다.


  문학으로 해야 하는 시가 아닙니다. 문학을 누리자는 시읽기가 아닙니다. 문학을 창작하도록 이끄는 시쓰기가 아닙니다.


  삶을 밝히는 시쓰기입니다. 삶을 누리는 시읽기입니다. 삶을 보듬는 시입니다. 삶을 가꾸는 시예요.
  아이들한테 시빛을 건네면서 어른들도 스스로 시빛을 품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동시론》이에요. 아이들은 아이답게 ‘아이 마음’을 곱게 가꾸고, 어른들은 어른답게 ‘아이로 태어나 자라서 어른 되어 살아가는 마음’을 곱게 살찌우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동시론》입니다.


.. 생활 속에 시가 넘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책상에 엎드려 시의 모조품을 만들기에 고심하겠는가 … 지금까지 아이들이 동시인들의 흉내를 내어 써 오던 동시란 것은 성장이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만약 무슨 변화란 것이 있었다면 늘어난 말재주와 잔꾀 부리는 기술이었다 … 어린 생명들을 위축 말살시키는 이 거짓 놀음의 동시 교육이란 것은, 겉치레와 선전만을 능사로 하는 입신출세주의 교육의 한 표본으로서, 그것은 수험 준비를 위해 단편적 지식을 암기하는 이상의 해독을 아이들에게 주는, 교육의 공해 지대가 되어 있는 것이다 … 명랑하고 배부른 시를 쓰는 것이 승리가 될 수 없고, 비통한 마음을 시로 쓴다고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가령 농촌의 빈궁한 아이들이 도시의 부유한 아이의 작품을 흉내내는 것이야말로 패배라 할 것이다. 그것은 생활뿐 아니라 시까지 패배한 것으로 보고 싶다. 또한 현재의 도시 아이들이 옛날의 전원 풍경 같은 것을 어른들 따라 흉내내어 쓰는 것도 우스운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 도시적이라는 것과 농촌적이라는 것의 차이는 소비생활을 위주로 하는 안일한 생활 태도와 노동에 종사하는 인간의 생활적이고 합리적인 생활 태도의 차이다 ..  (211, 214, 215, 222∼223, 261쪽)


  문학을 읽지 마요. 문학이 아닌 삶을 읽어요. 문학을 하지 말아요. 문학이 아닌 삶을 일구어요. 문학을 쓰지 말아요. 문학이 아닌 삶을 써요. 문학상을 마련하거나 문학상을 주고받지 말아요. 삶을 빛내는 노래를 부르고, 삶을 밝히는 조촐한 두레와 품앗이와 잔치를 벌여요.


  어린이문학을 하지 말아요. 어린이와 함께 노래를 불러요. 어린이문학을 비평하지 말아요. 어린이와 함께 삶을 읽어요. 어린이문학이라는 껍데기를 내려놓아요. 어린이문학이 아닌, 어린이와 어른 모두 즐겁고 아름다울 삶을 바라보아요.


  아이들더러 학교에 걸어서 오도록 하면서 어른들은 자가용을 몰고 학교 안까지 들어오지 말아요. 어른들이 자가용을 몰고 학교 안까지 들락거리니까 아이들한테까지 노란버스를 태워 집까지 오가도록 시키는데, 제발 이러지 말아요. 어른도 아이도 두 다리로 걸어야지요. 학교를 다닌다면, 집과 학교 사이를 두 다리로 걸어서 다녀야지요. 두 다리로 걸어서 다니지 못할 만큼 아주 먼 곳에 집이 있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학교 곁으로 집을 옮기든, 집 가까운 데에 새로운 학교를 마련하든 해야겠지요. 집과 마을과 학교를 온몸으로 부대끼고 마주하도록 모두 걸어서 다녀야지요.


  학교에 맞추어 아이들이 먼길을 다녀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맞추어 학교를 두어야지요. 교과서에 맞추어 아이들이 따라오게 하지 말아요. 아이들한테 맞추어 교과서를 고쳐야지요. 입시지옥에 맞추어 아이들을 들볶지 말아요. 아이들한테 맞추어 우리 사회를 바로세워야지요.


  말랑말랑 말마디만 이쁘장한 글을 써서 동시나 시라고 아이들한테 읽히지 말아요. 아이들이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노래할 수 있는 착하고 참다운 빛을 글로 담아서 함께 읽어요. 아이들 스스로 풀과 나무와 하늘과 비와 구름과 벌레와 짐승과 새와 바다와 들과 숲과 멧골을 아끼고 사랑하도록 북돋우는 이야기를 글로 엮어서 함께 읽어요. 아이들이 즐겁게 밥을 짓고 옷을 지으며 집을 짓는 길을 차근차근 보여주고 나누는 넋을 글로 담아서 함께 읽어요.


.. 경상도 어느 산골 아이가 쓴 시라면 경상도 그 어느 산골의 냄새가 나고, 전라도 어느 바닷가 아이가 쓴 시라면 전라도 어느 바닷가의 맛이 나는 것이다. 그러하거늘, 경상도 산골 아이가 썼는지 서울 아이가 썼는지 모르도록, 어느 곳의 아이라도 쓸 것 같은 얌전한 표준말로 쓴 것이라면, 그런 것은 도저히 시가 될 수 없는 무의미한 언어의 나열밖에 안 될 것이 뻔하다 … 저학년에서는 처음부터 줄이 짧은 시를 보여줄 필요가 없이 시를 읽어 주어서 감상시킬 필요가 있다 … 여기 어떤 상급 학년의 담임 교사가 있어 입신양명식 교육을 무시하고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아이들의 이런 자기를 외면하는 태도를 시정하는 참된 교육을 실천한다고 할 때, 그 아이들로부터 놀라운 시가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런 시에는 아이들의 일상 용어가 아무 두려움도 주저도 없이 자유롭게 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  (228, 239, 245쪽)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시 한 줄을 써요.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시 한 줄을 읽어요. 문학만 따로 하는 사람들이 쓴 시 말고, 삶을 가꾸는 우리 스스로 시 한 줄을 써서 아이하고 함께 읽어요. 시만 따로 쓰는 사람들이 쓴 시는 내려놓고, 삶을 사랑하는 우리 스스로 시 한 줄을 쓰고 나서 아이와 함께 정갈하게 옮겨적어 보고 가락을 입혀 함께 노래로 불러요.


  시는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있는 시를 길어올리면 됩니다. 시는 우리 삶에 있습니다. 누구나 삶에서 시를 만나면 됩니다. 시는 우리 사랑으로 자랍니다. 누구나 사랑을 빛내면서 시를 밝히면 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시가 샘솟아요. 자전거를 타고 들길을 달리면서 시가 흘러요. 밥을 짓고 밥상을 차리며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며 밥을 먹는 사이 시가 감돌아요.


  문학잡지에 선보이는 시가 아니라, 살아가며 즐겁게 부르는 시예요. 문학상을 타야 하는 시가 아니라, 사랑하며 어깨동무하는 시예요.


  영양소를 아이한테 먹이지 마요. 사랑으로 지은 밥을 함께 먹어요. 졸업장을 아이한테 들이밀지 말아요.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 다 함께 누려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을 아이한테 하지 말아요. 돈은 언제나 넉넉히 있어요. 삶은 아주 많은 돈이 있어야 누리지 않고, 삶은 아주 많은 돈이 나한테만 있을 때에 아름답지 않아요. 능금 한 알은 햇볕과 빗물과 바람과 흙을 먹고 자라지, 돈을 먹고 자라지 않아요. 딸기 한 톨은 햇볕과 빗물과 바람과 흙을 먹으며 늦봄에 바알갛게 익지, 졸업장을 먹고 익지 않아요.


.. 농촌 사람들의 정신은 완전히 도시에 가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시에 나가 사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다. 아이들도 어른들 따라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 … 봄이 되어 마늘에 싹이 난다는 것은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일인가? 아니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로서 그것은 커다란 놀라움이요, 즐거움이다 … 눈이 쌓이고, 얼어붙을 듯한 바람이 날뛰던, 그 말라죽은 잔디밭에 어느새 돋아났는지 짙은 자줏빛으로 피어난 할미꽃을 들여다보는 기쁨! 그 기쁨은 살아가는 목숨의 기쁨이요 생명의 신비와 존귀함을 느끼는 기쁨이다 … 음악은 살아가는 데 기쁨과 용기를 주는 것이어야 한다. 경망한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되고, 지혜와 이성을 잠재우는 마취제 노릇을 해서는 안 되고, 열등의식을 조장하여 노예 감정을 길러도 아니 된다 … 생활이 없는 작품은 필연적으로 모조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 우리는 끈질긴 인내와 노력으로 아이들을 인간스럽게 키워 가도록 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 시 교육을 알뜰히 해 나가야 할 것이다 ..  (267, 270, 280, 287, 340, 341쪽)


  아이들은 사람으로 자랄 때에 아름답습니다. 어른인 우리들 또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아름답습니다. 어른인 우리들부터 사람으로 살아가면, 아이들은 우리 곁에서 사람다운 빛을 뽐내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어른인 우리들부터 사람으로 살지 않으면, 아이들은 입시지옥에서 시험기계가 될 뿐입니다. 어른인 우리들부터 돈에만 얽매인 채 어깨동무를 안 한다면, 아이들은 취업지옥을 잇달아 맞이하면서 삶은 온통 잊고 맙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써요. 나와 곁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읽어요. 나와 곁님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나눠요. 우리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라서 새로운 짝을 만나고 새로운 아이를 낳을 적에 사랑씨앗 이어질 수 있도록 시를 빛내요.


  시를 쓸 때에 삶을 사랑스레 씁니다. 시를 읽을 때에 삶을 사랑스레 읽습니다. 시를 쓰며 삶을 사랑스레 가꿉니다. 시를 읽으며 삶을 사랑스레 나눕니다. 4346.1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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